114화. 대화(1)
내가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중공 이 새끼들이 어떤 민족성을 가진 놈들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중공군 측에서 대화를 요청해왔습니다. 아무래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베이징에서 정식 외교 루트를 타고 온 연락인가?”
“그건 아닙니다. 중공군 27 군장 팽덕청이라는 자가 연락해왔다고 합니다.”
대화?
언제부터 대화를 통해 문제해결 하는 걸 좋아했다고 지금 와서 이러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옵션 중 하나를 빼먹은 모양이다.
“연합군 측에선 영관급 장교를 보내 이야기를 들어볼 모양입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내가 가봐야겠네. 지금 당장 미 8군 사령부로 갈 것이니 빨리 지프 한 대 대기시키게.”
“예? 귀찮게 여단장님께서 직접 가지 않으셔도 알아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 보내지 않겠습니까?”
아니, 적당한 사람으론 안 된다.
‘저요. 저요. 제가 아니면 안 돼요.’라고 떼를 써서라도 가야만 한다.
아직 영관급 장교인 것이 너무나 다행으로 여겨졌다.
기본적인 요건은 이미 충족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제일 근처에 있는 아무 지프 준비시켜.”
“예. 알겠습니다.”
통신장교가 그제 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는지, 지프를 구하기 위해 튀어나갔다.
모든 일이 술술 풀리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자라날지 모를 변수를 차단하지 않는 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지금처럼 정세가 복잡한 시기에는 자그마한 티끌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알 수 없다.
“여단장님! 지프 준비됐습니다.”
“누가 나를 찾거든 잠시 8군 사령부에 볼일 보러 갔다고 전하게. 출발하지.”
말이 끝나자마자 지프가 우렁찬 엔진음을 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깟 꼼수에 일이 틀어져서는 안 되지.’
어쩌면 역사상 가장 많은 포로가 한반도에 생길지도 모른다.
내 예상대로라면 놈들은 지금 항복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려는 것이고, 그건 절대 안 될 일이다.
외교관 흉내를 내서라도 일이 틀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담판으로 고려를 지켜낸 서희처럼.
조금만 기다려.
더는 얕은 꼼수를 쓸 수 없게 만들어 줄 테니까.
***
미 8군 사령부.
행여나 늦을까, 지프에서 거의 뛰어내린 뒤 워커 중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는 집무실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사령관님.”
“오! 이 대령. 자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인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연락도 없이 급하게 찾아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있던 워커 중장이 허리를 펴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뭔가 중대한 일이라도 터졌냐는 듯이.
“자네가 괜한 일에 이리도 호들갑 떨 위인은 아니고··· 천천히 말해보게.”
“중공군 측에서 대화를 요청해왔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야 그렇네. 그것 때문에 자네가 직접 여기까지 올 일은··· 우선 앉게. 커피라도 한잔하겠나?”
이 중요한 순간에 커피나 권하는 걸 보니,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그보다 영관급 장교를 대화 자리에 보내신다고··· 제가 가도 되겠습니까?”
“자네가 직접?”
“예.”
표정을 보아하니 떼를 좀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에이, 고작 그런 자리에 자네같이 바쁜 사람이 갈 필요가 있겠나. 중공에서 정식으로 보내온 연락도 아닐뿐더러, 쥐새끼처럼 몰래 연락해 온 것으로 봐선 살고 싶은 몇 놈이 투항이라도 하겠다는 게 전부 아니겠나?”
쥐새끼 몇 마리면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쥐새끼 수십만 마리가 투항해 온다면?
그 사실이 정식으로 상부에 보고될 경우, 쥐새끼들에게 포로 대우를 해줘야 할지도 모른다.
수십만의 포로를 정리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소요됨은 물론 막대한 식량과 이들을 통제할 인력 또한 엄청나게 늘려야 하며 이 모든 건 연합군에게 있어 엄청난 손실로 다가온다.
시간을 번 중공이 또 어떤 속내를 숨기고 있을지 누가 알고.
“전쟁이 터지고부터 지금까지 한국은 한 번도 북한이나 중공과의 대화 자리에 나서본 적이 없습니다. 사령관님 말씀대로 별 것 아닌 일이겠지만, 사소한 대화의 첫발이라도 꼭 제가 떼고 싶을 뿐입니다.”
떼를 쓰고.
“제가 또 일 처리 하나는 깔끔하게 하지 않습니까. 제가 가게 해주십시오.”
또 떼를 썼다.
“사령관님?”
좀··· 보내줘!
“별 것 아닌 일이 자네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준다면야··· 자네가 이렇게 부탁하는 데 못 들어줄 이유가 없지. 알겠네. 이미 프리드 중령이 준비를 다 마치고 출발 명령만 기다리고 있네만, 같이 가보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워커 중장은 곧바로 부관을 통해 출발 직전이었던 프리드 중령을 막아 세웠다.
“필요한 것들은 프리드 중령이 다 챙겨놨을 테니, 몸만 가면 될 걸세. 이런 사소한 것까지 다 신경 쓰다니··· 자네는 역시 보통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야. 그럼 갔다 와서 어땠는지나 말해주게.”
감사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뒤, 워커 중장 집무실에서 나와 또다시 지프에 올라탔다.
바람도 찬데, 놈들에게 찬물을 시원하게 끼얹어 줘야겠다.
***
청천강 이북. 운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인지, 정찰기 한 대가 하늘에 맴돌고 있었다.
본래 협상을 위한 장소를 선정할 땐 서로의 영향권을 고려해 중립인 곳으로 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중공이 연합군 측에 말이라도 붙여보려면 사령부 한복판까지 무기 없이 맨몸으로 들어오라 해도 들어 와야 할 판이었다.
중공 측에선 군장급 지휘관이 나오는 반면, 워커 중령은 대대장급 지휘관인 프리드 중령을 보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힘의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중립이라는 단어는 그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했다.
“도착했습니다. 이강산 대령님.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 놈들이 함정을 파놓은 것은 아니겠죠?”
지프에서 내리자, 작은 목조 건물 앞에 세워진 군용 지프가 눈에 들어왔다.
중공 측에서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한 모양이다.
“걱정할 필요 없네. 만약 여기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중공은 지도에서 지워질 테니. 자네 조국이 어떤 나라인지는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짧게 머리를 굴린 프리드 중령이 안심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걱정할만한 구석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연합군 측에선 영관급 장교를 보내겠다고만 했지, 내가 나서는 건 워커 중장조차 좀 전에 알았다.
만약 함정을 파놓고 연합군 지휘관을 암살하기 위해 덤벼들었다?
한반도에 내려온 70만 중공군의 목숨으로도 다 갚지 못할 최악의 실수가 된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끼익
나무로 된 문을 열자 문에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안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건물 내부에 있는 중공 측 인사는 3명.
“흔쾌히 자리에 나와줘서 고맙소. 인민지원군 제27 군장 팽덕청이요. 이쪽은 내 부관과 통역을 맡은 병사이외다.”
끝까지 인민지원군은 개뿔.
“프리드 중령입니다. 이쪽은···”
“대한민국 국군 특공여단장 이강산 대령입니다.”
소개하는 도중 팽덕청 군장이 화들짝 놀랐다.
중공 말로 소개한 것에 반응한 건지, 이강산이라는 이름에 반응한 건진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 그 유명한 이강산 대령이 나올 줄은 상상치 못했소. 왜 통역을 안 데려왔나 했더니만, 억양이나 발음이 중공 출신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을 정도 수준이요.”
둘 다였나보다.
그보다 중공 출신이라 해도 믿겠다니, 초면부터 그 무슨 누추한 입으로 누추한 말씀을.
“이야기를 주고받기에 앞서 통역은 물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곳에서 나오는 말을 여러 사람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제가 영어까지 모두 수월하게 통역할 수 있으니 피차 그게 편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리 하시오. 한 입에서 3개 언어가 나와야 하는데 헷갈리진 않을지 모르겠네만.”
눈에 띄게 돋은 가시는 아니었지만, 팽덕청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체적으로 모가 나 있었다.
튀어나온 모는 정에 맞아 깎이는 게 순리인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왜 보자고 했는지.”
“허허. 참 화끈한 성격이오. 좋소. 서로 면을 마주 보고 있는 게 그리 달갑진 않을 것이니. 나와 27군은 연합군에 항복하겠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군장들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소.”
“갑자기 항복이라니,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으셨나 봅니다.”
전혀 몰랐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누구 머릿속에서 나온 작전인진 모르겠지만 자칫 잘못 판단했다간 연합군이 삐끗했을지도 모를 작전이었다.
“심경의 변화라니. 그 무슨 말이오?”
말 몇 마디 섞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인지 얼추 알 수 있다.
팽덕청은 자존심이 강한 부류.
27군을 모조리 갈아 넣을지언정, 절대 순순히 항복할 인간이 아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항복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 항복을 한다는 것이 제 상식으론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아서 해본 말일 뿐입니다. 겉보기와 달리 몸을 굉장히 소중히 하시는 모양입니다. 하하.”
항복이라는 말이 쏙 들어가게 해주리라.
그도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고 항복하는 것이겠지만, 이런 자존심 강한 부류를 다루는 건 생각보다 쉽다.
“어떤 대화가 오가고 있는 겁니까?”
프리드 중령이 궁금한 듯 물어왔다.
[팽덕청 군장이 27군과 함께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네. 나는 친절히 투항 절차를 알려주는 중이네.]
“···”
으득.
팽덕청 군장이 어금니를 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항복하는 즉시 전쟁법 상 제대로 된 전쟁포로 대우를 해주기 바라오. 설마 연합군이 스스로 투항해 온 포로들을 홀대하고 그러면 안 될 테니까. 아니 그렇소?”
전쟁법?
불법개입한 중공군이 전쟁법을 운운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니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준비해온 대사를 읽는 팽덕청 군장이 개그맨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포로가 될 테니 당장 중공군이 먹을 충분한 음식과 따듯한 옷을 달라는군. 참··· 사람이 염치도 없지. 일단 최대한 알아듣게 말해보겠네.]
“아니 그 무슨···”
프리드 중령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긴 지금이 때마침 춥고 배고플 계절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졸리기까지 하면 거지가 따로 없지···”
“뭐요! 거지라 했소?”
쾅!
팽덕청 군장이 주먹으로 상을 내리쳤다.
[적법한 절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나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군.]
모든 통역엔 오역과 오해가 조금씩 섞이기 마련이다.
최대한 열심히 통역을 이어나갔다.
“이마를 땅에 세 번 찧으면서 조아려도 모자랄 판에. 그게 항복하겠다는 사람 태도가 맞습니까? 지금 주먹을 내리친 것만큼의 세기로 머리를 상에 3번 박으면 상처받은 제 마음을 좀 진정시켜 보겠습니다.”
“이··· 이강산 찢어 죽일 놈이!”
그가 역정을 내며 손이 권총이 있는 허리춤으로 가자, 옆에 있던 부관이 팽덕청을 재빨리 끌어안았다.
[어휴··· 분위기가 살벌하군. 자네도 봤지? 대화는 여기까지 해야겠네.]
프리먼 중령 역시 오른손이 허리춤에 가 있었다.
그의 손을 진정시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있었던 일은 상부에 그대로 보고하겠습니다. 억울한 게 있으시거든 군장께서도 상부에 보고하시면 될 겁니다.”
진짜 투항할 생각이었어도, 시간을 끌기 위한 가짜 투항이었어도 뒤끝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본전도 찾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팽덕청 군장의 표정이 가관일 뿐이었다.
“부관에게 평생을 고마워하셔야 할 겁니다. 그 총을 여기서 뽑았으면 조상님들 묻혀있는 땅까지 잿더미가 됐을 테니까. 그럼 기회 되면 또 봅시다.”
말을 마치고 조용히 문을 향해 걸었다.
프리먼 중령은 뒤를 돌아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후···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어서 돌아가 보고해야겠네.”
다 이를 거다. 개자식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