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대화(2)
지프가 출발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프리드 중령이 안심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하늘에 떠 있던 정찰기 역시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사라졌다.
무사히 청천강을 건너 8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군. 어땠나, 자네가 나설 정도의 일은 아니었지 않나?”
입이 하나 두 개도 아니고 70만 개가 늘어나는 게 별일 아니라고 한다면 세상만사 웬만한 일들은 다 별일이 아닐 것이다.
태평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워커 중장의 물음에 프리드 중령이 학을 떼며 말했다.
“아닙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이강산 대령과 제가 순발력 있는 대처를 하지 않았다면··· 기어코 총격전이 벌어졌어도 100번은 더 벌어질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오늘부로 하늘이 주신 두 번째 목숨으로 산다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무용담을 늘어놓는 프리드 중령을 굳이 말리진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한 일이라고는 내 입에서 나온 구글 번역기 뺨치는 통역이나 듣고 있던 게 전부이긴 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총격전이라니. 그 자리가 망할 중공 놈들이 파놓은 함정이었단 말인가? 이런 미친놈들이.”
프리드 중령이 자신의 무용담은 이만하면 충분히 전파했다는 듯, 입을 닫은 채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인상을 찌푸린 워커 중장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총격전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만, 그보다 몇 배는 더 큰 일이 일어날 뻔했습니다.”
“이··· 이 미개한 놈들이 감히 대화를 요구하는 척 우릴 기만했단 말인가? 역시 상종조차 말아야 했단 말인가.”
이번에 또다시 느끼는 거지만, 대화는 어디까지나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소통수단이다.
벌레나 짐승이 아니라.
“처음엔 27 군장 팽덕청으로부터 27군 전체가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전달받았습니다. 전쟁법 상의 포로 대우를 요구했고 제가 알아듣게 잘 이야기해보려 했으나···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27군 전체가? 게다가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용병이라고 지껄일 땐 언제고, 전쟁법 상 포로 대우라니.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그리고 또 뭐라던가?”
전쟁법, 정확히 전시 국제법은 무력분쟁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여 전투원과 민간인이 필요 이상의 고통과 피해받는 것을 줄이기 위해 제정된 법이다.
전시 국제법이 명시하고 있는 정당한 포로 대우를 받기 위해선 교전 국 양측이 전시 국제법을 준수하는 정규군 소속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중공이 주장해온 바로는 한반도에 있는 이들은 ‘항미원조’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인민지원군, 즉 정규군이 아니기에 전시 국제법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아무리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지만 전쟁터에서 그딴 억지가 통할 리가.
“저는 흥분한 팽덕청 군장을 설득하려 수차례 노력하였으나, 팽덕청 군장 입에서 나온 말은 저를 찢어 죽여 버리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권총에 손을 가져다 대기까지 해 상황이 여의치 않은 탓에··· 대화를 더 이어갈 순 없었습니다. 내 말이 사실과 다른가? 프리드 중령?”
“사실 그 자체입니다. 이강산 대령은 최대한 침착하고 친절하게 그들과 대화하길 원했지만, 팽덕청 군장은 당장이라도 권총을 꺼내 들어 방아쇠를 당길 기세였습니다.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순간까지 저와 이강산 대령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습니다.”
프리드 중령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을 입증해주는 증언만으로도 그는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프리드 중령. 자네는 즉시 연합군 전 부대에 중공군이 거짓 항복해오는 것에 관한 내용을 전파하게. 이로 인해 어떠한 피해도 있어선 안 될 것이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실시하겠습니다.”
워커 중장이 프리드 중령을 보며 지시했다.
그는 자신의 무용담을 완성 시키기 위해 조금도 시간을 지체하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뒤를 돌아 자리에서 떠났다.
이제 그의 지인들은 무용담을 수십, 수백 번을 듣게 될 것이다.
‘이제 같잖은 꼼수는 못 부리겠지.’
한반도에 불법 개입한 중공군이 전시 국제법이 정의하고 있는 전쟁 포로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건 나도, 투항하겠다는 중공군도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포로로 인정받지 못한다 한들, 맨몸으로 투항해 오는 적을 모두 죽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중공은 국제사회를 향해 연합군이 전투 의지도 없는 민병대를 대학살 했다는 선전을 필사의 각오로 펼쳐댈 것이고, 그에 따른 어떠한 역풍이 불어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가만두면 알아서 추위, 배고픔, 포화로 인해 착하게 변할 놈들에게 역풍을 불러올 조금의 명분도 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이강산 대령. 사령부에서 새로운 작전계획이 하달되었네.”
워커 중장이 내게 건넨 말은 드디어, 역사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순간이 왔다는 말로 들렸다. 이건 절대 놓쳐선 안 될 기회가 분명했다.
***
“뭐야? 투항에 실패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윽···”
펑더화이가 던진 유리잔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은 그의 부관 양펑안이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산산 조각난 유리 조각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양펑안은 흘러내리는 피를 닦을 수도, 어떠한 변명을 할 수도 없었다.
“이런 병신 같은 것들을 봤나! 전투에서 이기지도 못해, 적당히 말 몇 마디 내뱉어 투항하라고 했더니 그것마저··· 군인? 살아생전 병신도 이런 병신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다니.”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급격히 추워진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동계 피복과 추가 식량 지원을 당에 간곡히 요청했다.
연합군 폭격 탓에 쉽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가 요청한 동계 피복과 식량을 대신해 당에서 내려온 명령을 보고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보급 물자의 소모 속도를 줄이고 보급로를 확보할 시간을 벌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연합군에 투항시킬 것]
이걸 명령이라고 내렸는지 어처구니가 없지만 어쩌겠는가.
콩 한 쪽이라도 나눠 먹었다간 모조리 아사하게 생긴 판국에.
나눠 먹기보단, 우선 나눠 먹을 사람을 줄여야 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이 작전을 더 쓸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연합군 전 부대에 거짓 투항을 조심하라는 내용의 서면이 전달되었다는 첩보를···”
“대체 자리에서 어떤 개만도 못한 짓을 했으면 실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거짓 투항이라는 사실을 연합군 전 부대에 알릴 수 있었는지 말이나 해 보겠나?”
양펑안도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화 자리에 나섰던 건 자신이 아니라 팽덕청놈이었으니까.
속에선 짜증과 분노가 솟구쳤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펑더화이 앞에선 조금도 내색할 수 없었다.
“원래는 미군 영관급 장교가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막상 자리에 나가보니 한국군 이강산 대령이라는 놈이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이강산? 그놈이 또···”
“팽덕청 군장이 보고해온 바로는 이강산 그자가 자신의 심기를 건드려가며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합니다만···”
머리에선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양펑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펑더화이의 책상엔 더 집어 던질 물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그놈이 대체 어찌 알고 그 자리까지 찾아와 판을 망가트렸단 말인가. 어? 으아아악! 이강산 이놈! 끄아아악!”
쿵!
펑더화이가 화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짐승이나 낼 법한 악을 질러댔다.
책상에 던질 물건이 남아 있지 않자, 책상을 통째로 뒤집어 넘겨버렸다.
“당에선···”
“당? 당 같은 소리는 이제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마. 한가하게 베이징에서 노닥거리면서 개소리나 해대는 놈들 말은 듣고 싶지도, 들을 생각도 없으니까.”
“양펑안.”
“예. 총사령관님.”
얼마나 이를 꽉 깨물고 있었으면, 턱 주변 근육들이 자유분방하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아수라장(阿修羅場), 아비규환(阿鼻叫喚)을 다 겪었음에도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겠지. 이젠 이판사판(理判事判)이다.”
이판사판(理判事判)
이 방법 저 방법을 다 써봤음에도 뾰족한 묘안이 없다는 뜻이었다.
양펀안이 두 눈을 질끈 감은 뒤 떴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는 듯.
“현 시간부로 군장들 모두 회의장으로 소집시켜. 토를 다는 놈이 있거든,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해. 괴뢰군 놈들 손에 죽을 건지, 내 손에 죽을 건지.”
평생을 거의 전쟁터에서 살아 오다시피한 펑더화이였지만,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군대를 투항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온 순간부터 당이 군대를 버렸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시간에도 베이징에서 따듯한 음식을 먹고, 목욕이나 하고 있을 당원들과 수뇌부를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빨리 나가지 않고 뭐해! 아, 사족 하나 붙이지. 그 누가 됐건 가장 늦게 나타나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막다른 길에 몰린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
미 10군단 사령부.
손에 서면 한 장을 쥔 미 10군단 군단장 알몬드 소장이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새롭게 내려온 부대 이동 명령 때문이었다.
“서해, 남해를 거쳐 상륙함들을 대만 해협으로 이동시키라니. 내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좀처럼 믿어 지지가 않는군.”
알몬드 소장에게 내려온 명령은 간단했다.
최소한의 전투병력과 기간병을 제외한 군단 병력을 현 시간부로 인근 부대와 협력해 새롭게 편제시킬 것.
군단에 남은 최소한의 전투병력과 기간병을 태운 상륙함 전부를 타이완해협으로 이동시킬 것.
가장 충격으로 다가온 건, 마지막 줄이었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을 상륙함에 태워 대륙에 상륙할 준비를 서두를 것]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들 계신 건지···”
이 명령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높은 자리에 있는 어르신들이 10군단 상륙함을 이용해 장제스 국민당군의 중공 대륙 상륙을 돕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고, 그건 곧 미국이 중공과의 전면전을 이번 전쟁에 옵션으로 넣었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명령이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면 되겠습니까?”
“굳이 시간 아깝게 그럴 필요 없네.”
사회와 군 전반에 걸친 최고 엘리트들이 연구와 분석을 거쳐 만들어낸 옵션이라는 사실을 알몬드 소장은 모르지 않았다.
그가 할 일은 명령을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10군단을 재편하고 상륙함을 타이완해협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 참모 전원을 소집해 명령을 수행한다!”
군함들은 10군단이 안주에 상륙한 이후로 꽤 오랜 시간 동안 바다를 가르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이었다면 온몸이 찌뿌둥해 견딜 수 없었을 터.
이젠 바다와 중공을 가를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