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이가 빠진 칼(2)
험하고 높은 산들이 제멋대로 뻗은 중동부 전선에 비하면
청천강 방어선은 말그대로 평야다.
쾅!
항공 폭격, 곡사포와 야포, 구경이 크고 작은 화기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전력을 다해 다가오는 중공군을 향해 퍼부었다.
놈들의 공세가 시작된 지 벌써 3일 차였다.
“여단장님! 이 새끼들이··· 청천강 물이 따듯한 줄 알고 계속 몰려오는 건가, 끝이 없습니다! 끝이!”
때마침 인근에 있던 1대대장 김상옥 중령이 자세를 낮춘 채 다가와 말했다.
아무리 땅과 하늘에서 엄청난 화력을 퍼부어댄다고 한들, 인간이 만든 무기로 70만이 넘는 중공군을 단번에 주님 곁으로 보내는 것은 진짜 주님이 이 땅에 강림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끝이 없을 리가, 끝은 있다! 70만이건, 700만이건 끝은 나게 되어있어. 마지막 총성이 멎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마라!”
어린아이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생을 달리한다는 말이 있듯,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는 중공군이 쏘아내는 눈먼 박격포, 야포도 맞으면 죽는다.
눈 감고 쏜 총탄이 돌멩이를 맞고 궤적이 바뀐 도비탄도 머리에 맞으면 죽는 것이다.
그에 따라 방어선을 지키는 연합군의 피해 역시 차츰 누적되고 있음은 분명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비슷한 복장, 생김새로 끝없이 달려드는 걸 보고 있자면, 죽어도 무한으로 살아날 수 있는 게임이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통신장교, 현재 다른 전선 상황은?”
적을 향해 직접 포를 쏘거나,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고 해서 통신이나 보급지원부대가 안전하고 편하다는 착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마음을 고쳐먹어야 한다.
종일 딱딱한 수화기를 통해 들어야 하는 다급히 지직거리는 통신 노이즈, 힘껏 질러대는 고함이 주는 피로와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니까.
수화기를 가져다 댄 통신장교의 왼쪽 귀가 새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전선 상황에 대해 긴급하게 들어온 보고는 없습니다! 모두 잘 버텨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좋아. 알겠네.”
김종오 군단장 지휘 아래 국군 1군단은 역시나 고지 선점, 유리한 지형의 이점을 극대화 시키는 방법으로 방어선을 구축해 동부전선을 물샐틈없이 잘 틀어막고 있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이 주공로로 택했던 중서부 전선에도 이상은 없었다.
거의 70%에 달하는 강력한 연합군 전력이 중서부 전선에 밀집, 포진되어 있었으니까.
‘놈들의 공세 종말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공세 종말점은 방어군이 얼마나 완강하게 저항하는지, 또한 충분한 물자와 보급을 통해 전투를 벌이고 있는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운 좋게 철조망, 지뢰, 크레모아 지대를 넘어섰다 한들, 청천강을 넘어서기란 하늘에 뜬 별을 따오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완벽에 가까운 방어진지, 1분도 쉬지 않고 전투를 이어나가도 보름은 너끈히 버틸 식량과 탄약을 적재해 놓은 연합군.
연합군이 보유한 화력에 반의반도 못 미치는 화력, 풀뿌리라도 감사히 캐 먹어야 하는 영양 상태와 전사한 전우의 군복을 뒤져 탄을 찾아도 턱없이 모자란 탄약량.
중공군의 이번 공세는 길어야 하루에서 이틀이면 공세 종말점에 도착할 것이라고 연합군 수뇌부들은 판단하고 예상했다.
반면 내가 예상했던 중공군의 공세 종말점은 3일에서 4일.
‘역시 이를 제대로 악물었군.’
외부의 도움 없이 초월적인 격차를 줄여 볼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군인들의 전투 의지였다.
최악의 상황에 놓인 중공군이 이처럼 지독하게 3일 동안 달라붙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국과 당을 위해서? 명령이기 때문에?
그도 아니면 항미원조라는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저기 보이는 방금 머리통이 터져나간 중공군의 시간을 되돌려 물어본다면, 무슨 마오안잉 달걀 볶음밥 처먹는 소리냐며 씩씩댈 것이라고 확신한다.
살려고.
그저 살아보겠다고 발악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그대로 있다간 100% 굶거나 얼어 죽는다.
청천강 이남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도 죽는 건 매한가지겠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사, 부처, 알라, 세계 모든 종교의 신들이 은총을 내린다면 혹시나.
아, 쟤네 중에 종교를 믿는 놈들이 있긴 하려나?
“기도를 잘못했군.”
이 정도 예고 없이 찾아온 단체 손님이면 파리 날리는 식당도 부담된다고 손 휘둘러 가며 거절할 텐데 말이다.
“여단장님! 동부전선에서 포성이 잦아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지금 막 들어온 정찰 보고에 따르면 중공군 후방 포병대가 포를 버리고 도망치고 있다고 합니다!”
막다른 길에서 실오라기보다 얇은 희망의 끈을 놓았다는 건.
“방어선 일대에 떨어지는 적 포격이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드디어··· 놈들이 포기한 것 같습니다!”
“다들 수고 많았다.”
“여단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쾅!
귀를 때리는 마지막 포성을 끝으로, 포성이 완전히 멈췄다.
3일간 이어진 총성, 포성, 비명이 멈추자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 산속에 숨어들어 산신령이 되는 것으로 장래희망을 바꿨다던가, 어차피 죽을 거 힘 빼지 않고 편하게 죽기를 결심한 모양이다.
우우우우우우웅!
어디선가 들려오는 웅장한 소리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잘 가라.’
3일간 급유, 출격을 반복해 잔뜩 열이 받은 공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해를 가리며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출격 가능한 항공기란 항공기는 모조리 출격시켰는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아무리 그래도 70만인데, 최소한 절반은 살아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음··· 절대 그렇게는 안 될 것 같다.
쾅!
“주님, 아무튼 좀 더 갑니다.”
***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모스크바.
“펑더화이 사령관이 이끄는··· 아니 이끌었던 중공군들이 한반도 땅에 거름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사상자는 집계조차 불가능할 정도랍니다.”
보고를 들은 스탈린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음··· 그게 그리 호들갑 떨 문제인가?”
예상치 못한 스탈린의 답변에 보고한 정치국원이 움찔하면서도, 금방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스탈린은 스스로 1000만 명 이상의 농민을 학살했다고 밝혔다.
스스로 인정한 게 1000만 명이지, 그의 집권기를 통틀어 학살당한 사람을 합치면 2000만 명에 육박한다는 주장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살아있는 이는 없었지만.
강철의 대원수, 조지아의 인간 백정.
극도로 대비되는 두 가지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기도 했다.
“중공이 잃은 병력이 70만인지, 700만인지는 중요치 않소. 김일성 그 멍청한 놈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어. 자네는 이리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그의 물음에 정치국원이 있는 힘껏 뇌를 쥐어짰다.
스탈린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언제나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고 조용히 물어왔지만, 자칫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을 하거나, 말실수라도 하는 날엔 언제 총구를 내밀지 몰랐으니까.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무능한 탓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생각보다 강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미국이라··· 그렇지.”
대답을 들은 스탈린이 미국이라는 말을 혼자 곱씹으며 생각했다.
스탈린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다.
북한군을 괴멸시킨 연합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했을 때도, 연합군 공군이 국경을 넘어 만주 기지를 폭격했을 때도 말이다.
“동지.”
“예.”
둘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스탈린이 부르자, 정치국원이 총알처럼 빠르게 대답했다.
물론 대답한 뒤에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내가 한 가지 부탁을 하겠소.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정치국에 가던지, 서기국에 가서 묻던지 아무 상관 없으니,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 놈들이 우리 소련에 끼칠 영향을 하나도 빠짐없이 연구하고, 그에 따른 방안을 찾아오시오. 우리 소련이 가진 영향력이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동지는 총살이오. 연합군을 향해 무력을 과시하겠다는 동네 늙은이도 할 법한 소리를 한다면, 그때도 동지는 총살이오. 명심하시오.”
스탈린의 부탁을 들은 정치국원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디선가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어온다면, 눈에 맺히고 있는 물방울이 똑하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예. 알겠습니다.”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붙잡으며 말했다.
여기서 변명을 하면 일찍 총살될 뿐이니까.
“동지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고 약속했으니, 기대하고 있겠소. 이제 나가보시오.”
정치국원은 끝까지 표정관리에 성공했다.
그런 그가 나가자, 스탈린이 콧수염을 한차례 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흠···”
한숨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연합군과 중공군이 막대한 군수물자와 재화를 쏟아부으며 싸울 때까지만 해도 웃을 수 있었다.
연이은 전쟁으로 힘이 약해진 미국은 이전처럼 서유럽을 비롯한 우방국들을 지원할 수 없을 테니 좋고.
막대한 타격을 입은 중공은 기댈 곳이 소련밖에 없으니, 그를 이용해 중공 안에든 단물을 다 빨아먹으면 그만이었다.
북한?
미국의 힘이 기울어지고 중공에서 단물을 빨아먹는데, 그에 비하면 북한은 미국에 개 사료 주듯 넘겨줘 버려도 그만이다.
거기까지, 거기까지면 딱 좋았다.
“트루먼 그놈이 타이완까지 전쟁에 개입시키다니.”
미국이 타이완을 개입시키면서까지 전선을 확대했다는 건, 북한을 먹는 것만으론 배가 부르지 않다는 뜻이었다.
안 그래도 겁많은 동유럽의 다른 공산 국가들은 벌써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이 의견을 하나로 뭉쳐 반항이라도 하는 날엔, 소련 내부에서도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제 더는 호의로 포장해 중공에 전투기나 무기를 비싼 값에 팔아먹는 짓만 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김일성, 이 곰 발바닥에 대가리 맞아 죽을 놈···”
핵실험까지 성공해 미국이 소련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든 더없이 훌륭했던 판국에, 똥물을 끼얹은 것과 다름없었다.
-덜컥.
스탈린이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김일성과 그 졸개들을 찾아서 내 앞에 데려오시오. 시간을 얼마나 주면 되겠소?”
-최대한 빨리 찾아내겠습니다. 동지.
“딱 일주일 주겠소. 일주일 안에 못 찾아오면··· 각오하시오.”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평양에서 도망친 김일성은 중공 정부나 소련 정부에 망명하지 않고 있었다.
쥐새끼처럼 어디 숨어있는 게 분명했다.
벌집을 건드려 잔뜩 성이 난 벌들에게 벌집을 건드린 주동자를 던져줘 볼 참이었다.
혹시나 한껏 벌침을 쏘아낸 벌들이 마음을 진정시킬지도 모르니까.
“김일성 이 병신같은 놈!”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아이러니하게도 중공의 마오쩌둥, 소련의 스탈린, 전쟁을 도왔던 두 국가의 수장 모두가 김일성을 향해 쌍욕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참, 근래 보기 드문 화목하고 사이좋은 이웃처럼.
***
그 시각.
“이런 제기랄!”
한동안 웃음꽃이 떠날 줄 몰랐던 장제스가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