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이가 빠진 칼(4)
한가지 문제를 푸는 데는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을 전제로 그 상황에 가장 먹힐만한 방법을 들이미는 게 중요하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어떤 말이라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강산 대령 부디···”
정말 샤오위린이 들을 준비가 됐는지 봐야겠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
내가 내리는 처방전은 꽤 아마 꽤 쓸텐데.
“가령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타이완 국민 정부는 대륙을 장악하고 있는 공산당에 맞서 싸울 군사를 모집해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국민들이 국민 정부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모병에 응해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야···”
답은 정해져 있다.
너무나도 쉬운 답이기도 하고.
이미 모집된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만큼 조국의 대륙 진출을 가슴속 깊은 열망으로 품은 사람들 일 것이다.
5억 명이라는 인구 중 단 10만명만이 국민 정부의 부름, 호소에 응했다는 건 분명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0만 명, 그것도 많은 것 아니냐고?
복잡한 것 다 빼고, 간단한 수식으로 계산해보자면 0.0002%에 불과하다.
“지금 타이완의 국민 정부는 이전과 무엇이 다릅니까? 5대 방침, 5종, 3대 요목이 국민의 삶에 잘 녹아 들어가 국민들 삶의 만족도가 높은 정부라고 생각하시는 지 궁금합니다.”
다시 한 번 물어야겠다.
‘그래서 뭐가 다르냐고.’
사실 대사 신분에 대한 예를 갖춰 말을 순화해서 그렇지 단도직입적으로 독하게 말하자면 이야기가 더 편해지긴 한다.
중일 전쟁 당시 일본군 진격을 저지한다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장제스 정부는 1938년 6월 황하강 제방을 파괴했고, 공식적으론 80만, 비공식적으론 50만의 무고한 인명이 사망했다.
의도는 좋았으나 일본군이 자행한 난징 대학살에 몇 배 나 되는 학살을 정부가 저지른 셈이다.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1938년 황하강 사건은 오래전 대륙 본토에서 있었던 가슴아픈 전쟁의 비극 중 일부분이라고 치자.
1947년 국민 정부가 반정부 봉기를 제압하기 위해 비무장 시민들을 학살한 2.28사건은 아직 타이완 시민들 기억에서 절대 사라질 수 없는 일이다.
국민 정부 역시 공산당 못지 않은 큰 악명을 떨쳤는데, 대충 반공 가자! 대륙 진출 가자! 하면 아, 예. 갑시다, 가야죠. 하면서 도와 주겠냐고.
“말씀하셨다시피,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없이 부족하고, 또 부족했던 정부였지요. 하지만.”
샤오위린이 입술을 한차례 굳게 다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 다른 건 몰라도, 이것 만은 확신한다는 듯이.
“정부 관료들과 장제스 총통 각하께서 인민들을 신경 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행해져 왔던 체계를 단번에 바꾸기엔···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체계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주 솔직하십니다. 대사님 같은 분이 계속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신다면, 나아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샤오위린 대사와 그가 하는 대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중국인 답지 않게 예를 알고, 정세를 잘 파악하며 잘못을 인정할 줄도 알지만 대책이 아닌 변명을 늘어놓는 바람직한 모습이 말이다.
“대령님 앞에 있으니 입고 있는 옷이 홀딱 벗겨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드는군요. 겉치레를 모두 벗었으니, 대령께서 생각하는 방법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자, 그럼 제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샤오위린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난 정부에서 있었던 일들과 이번 정부에서 겹친 악재를 국가가 나서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건,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큰 틀에서 정부의 의견을 개진했으니 타이완에 건너오기 전, 아직 유대가 남아있는 세력들부터 차근차근 끌어 모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한발 더 다가간다면, 공식 의견 발표보다 조금 더 진심을 느낄 것입니다.”
국민 정부가 타이완에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이라면, 아직 강남과 서북 지역 일대에 국민당 추종 세력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 된 마음입니다. 대사님.”
“···”
샤오위린 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수긍했다.
내 말이 다 끝났음에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끝입니다.”
“강남과 서북 지역에 남아 있는 세력들에게 진실 된 마음을 보인 그 다음, 다음이 없이 끝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끝.”
“아···”
입이 천천히 벌어지는 걸 보니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다.
소련 참전이나 세계 3차 대전 같은 앞뒤를 가리지만 않는다면, 타이완 국민 정부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방법이야 무궁무진하다.
대륙 안에서 살아가는 소수 민족을 독립 국가로 인정해주겠다는 선언 하나로도 수백만.
기존에 득세했던 군벌과 호족들의 기득권을 인정 해주기만 해도 수백만.
이 모두를 합치면 백만이 아니라 천만 군대 양성도 가능할걸?
“모쪼록 국민 정부가 상륙에 성공해 잃어버린 대륙 영토를 수복하기를 간곡히 기도하고 바라겠습니다.”
말을 마치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그만 나가달라는 신호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시간 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연합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연전연승을 기원하겠습니다.”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받아치는 걸 보니, 속이 적잖이 쓰렸던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사실 미안하지도 않지만···’
타이완이 남쪽 해안에 상륙함으로서 중공의 전력을 분산 시키고 압박하는 것은 좋지만, 타이완이 중국을 전부 집어삼키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는 만주를 포함한 대륙 전체를 당연한 중화민국의 영토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역사를 통틀어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 중 한사람이지만, 나는 이렇게 정의 내리기로 했다.
지금 대륙에 있는 미친놈보단 덜 미친놈.
“대륙을 지저분하게 찢어놓을 이가 빠진 무딘 칼.”
원래 예리한 칼보다 무딘 칼이 더 치명적이고 깊은 상처를 남기는 법이니까.
***
중공군의 대공세를 막아낸 기념으로 한반도에 따듯한 봄이 왔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만은, 현실은 곧 더럽게 추운 겨울.
내가 없었다면 핫팩이나 보온병 같은 발열 용품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나왔을 텐데.
심지어 아직 본격적인 추위는 오지도 않았다.
대체 선조들은 제대로 된 방한 용품도 없이 어떻게 이 겨울을 보냈을지 한없이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다들 모여보시겠습니까! 제가 지금 엄청난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문기준 중령이 추위도 잊은 채, 이곳 저곳에 소리를 질러가며 사람을 모았다.
밟은 표정을 보아하니 그동안 들어왔던 소식과는 달리 좋은 소식인 듯했다.
“다들 모이셨습니까? 무슨 소식이냐면··· 그게 바로바로···”
모두의 궁금증을 증폭 시키려는 듯, 한참 뜸을 들인 뒤 내게 시선을 보냈다.
“지금 막 육군 본부로부터 들어온 따끈따끈한 소식입니다. 영원히 우리들의 여단장으로 남아계셔야 할 이강산 대령님이··· 드디어 장군으로 진급하신답니다! 이 소식을 제가 전하게 되다니 영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내가 진급한다는 소식에, 자리에 모인 이들 사방에서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쏟아졌다.
-축하드립니다. 여단장님!
-별을 다셨으니 이제 여단장님이 아니라···
-특공여단 만세! 여단장님 만세!
진급을 예상하고 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갑작스러운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여단장님. 진급 소감 한 말씀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흠흠.”
멍석이 깔렸으니, 한 마디 할 수밖에 없기에 목을 가다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멋진 미리 진급 소감을 미리 준비해 두는건데.
“모두 고맙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지 못했다면 내가 진급을 축하 받는 이 시간도, 어쩌면 살아있을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조국과 국민, 사랑 받아 마땅할 모든 것들을 지키기 위해 군복을 입고 있다. 우리는 지키고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존경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반드시 올바른 품행을 하는 훌륭한 군인이 되어야만 한다.”
예전부터 들던 생각이다.
국민들이 군인을 집 지키는 개 정도로 생각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금부터 바로잡아 나갈 것이다.
군인이 지키는 국민의 가치는, 군인이 받는 대우와 비례할 테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어느 위치에 있건간에, 여러분을 전선으로 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 여러분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하지. 이 전쟁이 끝나더라도.”
소란을 떨며 축하하던 이들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적막이 주변을 감돌았다.
‘너무 길었나?’
예의 상 ‘마지막으로’라는 말은 딱 한번만 했는데 말이다.
모두가 미리 짜놓기라도 한 듯, 입을 다문 채 내가 있는 곳으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또또, 여단장님 혼자 멋 있고 능력 있고 다 하신다. 모두 달려들어!”
누가 내렸는지 모를 명령에, 사방을 완벽하게 포위한 병력들이 두 팔과 다리를 잡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하나에 던지고 둘에 받는다. 하나!”
으쌰!
얼마나 힘껏 던졌으면 체감 상 3초 이상은 공중에서 멈춘 것 같았다.
“둘! 다시 하나!”
족히 열 번은 하늘로 솟구친 것 같다.
그제 서야 두 발이 다시 땅에 닿았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앞 줄에 있는 지휘관들과 악수를 주고 받는 것을 마지막으로, 집급 전 소소한 진급 축하 파티가 마무리 되고 있었다.
“자네, 내게 할 말 있나?”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 주변을 맴돌고 있는 통신 장교가 눈에 들어왔다.
축하 받는 분위기에 산통을 깨고 싶지 않아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아··· 아닙니다. 별 것 아닐 지도 모르는 일인지라···”
“다 축하 파티는 끝났으니 말해보게. 무슨 일이지?”
어차피 진급했다는 기쁨의 환희는 잠깐이다.
준장으로 진급했으니 부대를 재편성하라는 명령이 곧 떨어질 것이고, 내가 지휘하는 병력의 규모도 커질 것이다.
무엇보다 북진 통일이 코앞에 와 있기도 했고.
“요 며칠 사이 신의주, 만포, 회령과 같은 국경 인근에서 전투기보다 정찰기가 자주 포착되고 있다고 합니다. 특별한 일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정찰기를 계속 띄우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통신 장교 말대로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교전을 위한 전투기가 아니라 정찰기를 계속 출격 시킨다는 건 소련이나 중공이 뭔가 찾고 있다는 뜻인데···’
마오안잉이 사라졌을 때도 없었던 일이다.
도망가다 떨어트린 지갑이나 찾자고 정찰기를 출격 시키진 않을 터.
“돼지 무리가 아직 이 안에 있는 모양이군.”
아무리 생각해도 정찰기가 국경을 돌며 찾을 만한 건, 그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