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돼지 무리(2)
짝!
경계조가 동굴에 들어온 뒤에도, 뺨을 갈기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험한 욕설은 덤이었다.
“다시 한번 지껄여 보라. 계획? 동무들이 멍청해서 지금 이 꼴이 났는데, 나한테 계획이 있냐고? 이런 간나새끼가!”
뺨을 수차례 갈기고도 김일성의 화가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뺨으론 부족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발길질까지 해대기 시작했다.
“동··· 동지. 이럴 땐 어캐 해야 하는 겁네까?”
“하··· 우선은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 같으니.”
경계병 사이에서 귓속말이 오갔다.
두 사람 중 선임병으로 보이는 경계병의 대처는 훌륭했다.
애초에 김일성에게 맞고 있는 사람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걱정도 안 했을 테지만, 김일성의 발길질 세례를 신음 한번 흘리지 않은 채 맞고 있는 사람은 김두봉.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위원장 동지, 이미 기절했습니다. 그만하면 모두에게 좋은 본보기가 됐을 것입니다.”
새파랗게 어린 김일성이 62세의 노쇠한 김두봉에게 행사하던 폭력을 멈춘 것은, 뒤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제지를 듣고 나서였다.
극도로 흥분한 김일성을 말리는 건,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들려온 목소리에 김일성이 뒤를 돌아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발길질과 욕설이 더 이어지지는 않았다.
“김두봉 동무를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라.”
“예! 동지!”
김일성이 경계병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자, 전전긍긍하고 있던 경계병들이 드디어 제 할 일을 찾았다는 듯 달려들어 김두봉을 챙겼다.
한 명이 김두봉을 들쳐 맨 뒤, 드디어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동굴 밖으로 나왔다.
“동지, 질문하나 해도 되겠습네까?”
“뭐이네? 해보라.”
경계병들은 동굴 밖으로 나오자 꽉 막혀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찬바람에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동굴 안에서 느껴졌던 서슬 퍼런 분위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숨통이 트이자 궁금증이 돌기 시작했다.
“저 동지가 누구길래 위원장 동지가 화를 한 풀 꺾은 겁네까?”
“아니 여태 그것도 몰랐단 말이네? 저 동지가 바로 그 밀양 출신···”
[겉보기엔 우유부단한 것 같지만 성질이 극히 사납고 치밀하다. 오안부적(傲岸不敵)의 기백과 신출귀몰하는 특기를 지녔다.]
일제강점 당시, 일제가 밀양 출신인 그를 평가한 기록이었다.
“아···”
이름 석 자를 들은 경계병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평안북도와 자강도의 경계. 향산.
소나무들이 모여 울창한 숲을 이룬 곳.
“여기서부턴 분대 단위로 걸어서 이동한다. 청천강 전투에서 도망친 패잔병들이 어디 숨어있을지 모르니 다들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예. 알겠습니다.”
꼭꼭 숨어버린 돼지를 잡기 위해 김동석 소령이 이끌고 온 1개 소대 규모의 특공대가 트럭에서 내리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특공대 투입 전 정찰기가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청천강에서 희천 사이에 대규모로 밀집된 공산군은 관측되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경로상에 위험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산과 골짜기 사이사이 숨어있는 공산군 패잔병들과 전투가 벌어질 것에 대비해, 탄약 역시 부족함 없이 챙겨왔다.
신속한 작전 개시와 특공대의 체력 안배를 위해 희천과 가까운 향산까지는 차량 이동을, 향산부터 희천까지는 도보 이동이 결정되었다.
“현 시간부로 지형적 요인으로 의해 내가 시야에서 사라진다면, 각 분대 분대장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실시하도록. 투입!”
김동석 소령의 투입 명령에, 특공대가 대답 대신 자세를 낮추며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기 시작했다.
희천은 청천강 상류 유역에 위치 해있다.
따라서 김일성 일당을 잡고 난 뒤, 미리 준비된 선박을 이용해 강을 탈출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지.”
김동석 소령이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며 정지 수신호를 보내 특공대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슥
그가 이끄는 특공대는 가히 정예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어 보였다.
수신호가 전파된 지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특공대 전원이 가까운 곳에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겼다.
30명으로 만들어진 대열이 사라지는 건, 아주 순식간이었다.
‘아직 흙에 수분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땅을 판 흔적이다.’
목표물을 찾아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곳에 침투해야 한다면, 작은 단서도 놓쳐선 안 된다.
무심코 흘려버린 작은 흔적이나 단서 하나가 작전의 성공과 실패,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지을지도 모르니까.
김동석 소령이 발견한 것은 나무뿌리나 풀뿌리를 캐기 위해 땅을 판 흔적이었다.
바닥에 잔뜩 떨어진 낙엽들을 살짝 걷어내자, 또 다른 흔적이 보였다.
추위에 땅이 단단해진 탓인지 또렷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한 사람 발자국이었다.
-분대장 집합.
수신호를 보내자, 그의 수신호만 기다리고 있던 분대장들이 김동석 소령이 발견한 흔적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사람이 땅을 판 흔적이네. 아직 흙을 파낸 곳에 물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문제는 이 흔적이 우리가 가야 하는 경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네. 경로를 바꿔 우회해야 할지, 기존 경로 그대로 침투해야 할지를 정해야 해.”
김동석 소령이 최대한 작은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임무가 숨어있는 적을 찾아내 사살하는 것이었다면 당연히 흔적을 쫓아야겠지만, 특공대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로지 김일성 일가를 생포한 뒤, 살아서 복귀하는 것.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김일성의 은신처를 찾아내기 전까진, 교전을 되도록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현재 경로를 우회하게 되면 최소한 5시간의 손해를 입게 됩니다. 발자국으로 보면 많아야 다섯 정도로 보입니다. 기존 경로대로 침투하되, 적 규모가 예상보다 많다면 최대한 은밀하고 신속하게 지역을 벗어나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1분대를 맡은 김웅 상사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다른 두 명의 분대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좋아. 이동한다.”
김웅 상사를 포함한 3명의 분대장들 모두, 지금까지 수많은 침투와 정찰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낸 베테랑들이었다.
김동석 소령은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작전에 잘 투영할 줄 아는 훌륭한 지휘관이었고.
-이동.
김동석 소령이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 수신호를 보내자, 순식간에 특공대원들이 침투 대형을 갖춘 뒤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침투는 생각보다 체력에 상당한 부담을 주는 작전이다.
최대한 빠르게 임무를 수행해내는 것이 좋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기도비닉(企圖秘匿)을 유지하는 것이다.
30분쯤 지났을까?
김동석 소령의 시야에 중공군 군복이 들어왔다.
그들은 몸을 나무에 기댄 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특공대가 위치한 곳이 상대적으로 높은 고지대였기에, 중공군은 아직 특공대를 발견하지 못한듯했다.
[주변에 다른 인기척은 없습니다.]
중공군 뒤로 우회했던 특공대원이 팔을 x자로 교차시키며 수신호를 보내왔다.
수신호를 확인한 김동석 소령이 품 안에 있던 대검을 꺼내 보이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다른 이들도 대검으로 처리하자는 그의 몸짓을 이해했는지, 대검을 꺼내 들었다.
-스르릉.
예리하게 날이 선 대검이 군복 상의와 부드러운 마찰을 일으키며 품 밖으로 꺼내져 나왔다.
놈들은 셋.
김동석 소령이 능숙하게 2인 1개 3개 조, 총 6명을 나무 뒤로 우회시켰다.
말을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음에도, 눈짓과 몸짓만으로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박자를 만들어냈다.
대원들이 은밀히 적에게 근접하는 것에 성공하자, 김동석 소령이 손으로 목을 그었다.
근접한 대원 중 최고 선임자가 손가락 세 개를 편 뒤 하나씩 접어 내리기 시작했다.
3
2
1
지금.
두 명의 조원 중 한 명은 비명이 새어나갈 것에 대비해 중공군의 입을, 다른 한 명은 조금의 주저함 없이 대검을 중공군의 목, 가슴 순서로 박아넣었다.
대검이 살가죽을 찢고 목을 베어내는 도중 목뼈와 부딪히며 소름 돋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워낙 눈 깜짝할 새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눈을 감고 소리만 들었다면, 처리한 중공군이 한 명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압했습니다.]
조금의 소음도 세어나가지 않았다.
중공군들은 앉아 쉬던 자세 그대로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목과 가슴 부근에서 쏟아져 나온 피가 군복을 잔뜩 적셔 내려갔다.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한 모양입니다. 힘이 없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입을 틀어막을 때 어떠한 저항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놈들만 그런 건 아닐걸세. 지금 한반도 안에 흩어져있는 놈들 전부 비슷한 처지겠지. 곧 총탄이나 폭격에 맞아 죽는 숫자보다,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쓰러져 죽는 놈들이 많아질 시기지.”
대원들이 중공군 옆에 놓여 있던 총기를 확인하고는 보고를 해왔다.
“대장님, 이놈들이 가지고 있던 총을 확인해보니 빈 총입니다. 탄이 단 한발도 없었습니다.”
탄이 한 발도 없었다는 보고를 들으니, 사람을 본 따 만든 허수아비를 상대로 싸운 기분이 들었다.
“알겠네. 다시 이동한다.”
김동석 소령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는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상황에서도 제 배를 남산만 하게 불릴 생각만 하고 있을 김일성을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특공여단 지휘 막사.
휘하 대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새로운 편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함이었지만, 회의 시작 전 관심사는 역시나 돼지를 잡기 위해 보낸 특공대에 쏠려있었다.
“김동석 소령이라면 희천에 있는 산이란 산은 다 뒤져서라도 김일성을 잡아 올 겁니다.”
얼마 전 대령으로 진급한 김상옥 대대장의 말투를 보아하니, 김동석 소령이 김일성을 잡아 올 것이라고 꽤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특공대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단순히 김일성을 잡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야. 놈의 식솔들과 주변에 있는 놈들도 북한에서 다 한 가닥 하는 놈들일 테니.”
제 몸을 끔찍이 아끼는 김일성이 아무나 데리고 도망쳤을 리 없다.
평소에 그가 가까이 해왔던 인물, 또는 자신에게 우호적 성향을 내 비췄던 인물들과 함께 있을 테니까.
“아무리 권력이 좋다 한들 김일성 그놈이 있는 곳도 곧 지옥으로 변할 것이네.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는 데다 식량까지 부족해지면 한 놈씩 눈깔이 돌기 시작할 거고,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폭력성과 앙심이 튀어나오겠지. 그 단계가 오면, 김일성이 아니라 김일성 조상님들이 와도 어쩔 도리가 있기야 하겠나?”
김일성이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는 것엔 백번 천번도 더 동의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그가 살아있어야 한다.
왜냐면 그 지옥은 내가 보여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