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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123화 (123/149)

123화. 돼지 무리(4)

김동석 소령과 특공대가 내린 결정을 내리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짧게 의견을 주고받은 결과, 누군가 의도적으로 남긴 것이라면 왜 그랬는지 알아야 했고, 함정이라면, 함정이라는 확인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직접 확인한다. 1분대는 나를 따라오고, 2분대와 3분대는 나와 충분한 거리를 두고 만일에 사태에 대비하며 엄호한다.”

이 흔적은 지금까지 찾아 확인한 흔적들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김일성은 축지법이나 공중부양을 사용해 땅에 족적(足跡)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일개 중공군이나 북한군이 그럴 수는 없을 테니까.

이동, 채집같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흔적들과는 달리, 나뭇가지를 꺾어 피를 묻혀놓은 의도적인 흔적은 분명과 목적을 지니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금 특공대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감정은 하나였다.

위험.

이건 독이든 사과를 베어 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어쩌면 호랑이가 벌리고 있는 입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특공대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 없기에, 김동석 소령은 직접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제 출발하지.”

김동석 소령이 1분대장 김웅 상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지금부터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면서 이동한다. 뒤따르는 후발대는 선발대가 남기는 흔적들을 지우면서 따라올 수 있도록.”

김웅 상사가 1분대와 그 뒤에 있는 2분대와 3분대를 보며 말했다.

“예.”

굳이 위험한 모험을 해야만 하냐고 묻거나, 특공대장이 내린 명령에 딴지를 거는 대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들이 수행해온 수많은 침투, 정찰 임무 중 위험하지 않은 임무는 없었으니까.

목숨을 거는 건 일상에 가까웠다.

작은 실수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희천 깊은 산악지형으로 들어가는 김동석 소령의 발걸음은 그리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

희천 깊은 산속.

침투하기에 지랄 맞은 환경이었다.

겨울이 왔음에도 온 힘을 다해 나뭇가지에 붙어있던 소나무, 침엽수 잎들이 얼굴을 찌르고 긁어댔지만, 그 누구도 손을 얼굴로 가져가거나 작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두 눈동자는 먼지 하나라도 찾아내겠다는 듯 휠새 없이 움직였고, 손은 언제라도 즉시 사격이 가능하도록 방아쇠에 걸쳐 있었다.

[정지.]

선두에 선 김동석 소령이 자리에 멈춰섰다.

[이곳에서 흔적이 끊겼다. 주변을 탐색해보도록.]

특공대가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2인 1개 조를 만들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누군가 남긴 흔적을 따라오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처음에 쉽게 부러진 나뭇가지와 혈흔을 발견했던 것과 달리, 흔적을 쫓아 원인에 가까워질수록 흔적은 희미해졌다.

부러진 나뭇가지의 크기가 점차 작아지는 것은 물론, 혈흔도 처음과 달리 눈을 크게 뜨고 가까이서 봐야 보일 정도로 미량만 묻혀 있었다.

중요한 건, 그러면서도 그 미세한 흔적들이 사라지지 않을 곳에 적당히 고생해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놨다는 것이다.

마치 주변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게 있으니, 계속 따라오라는 듯이.

김동석 소령이 이끄는 숙련된 특공대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흔적을 놓쳤을 터.

농사짓다 강제 징집된 북한군이나 일개 중공군 졸개 따위가 남길 수 있는 흔적이 아니었다.

‘흔적이 완전히 끊겼어. 왜지?’

선발대가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확인했지만, 흔적이 끊겼습니다. 좀 전에 지나온 흔적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대원들이 보고를 해왔지만, 흔적이 없다는 같은 보고일 뿐이었다.

이토록 치밀하게 남긴 흔적에 의미나 이유가 없었다?

별일이야 없었지만 찝찝하고 불쾌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 깊숙이 들어가 길이 엇갈리기 전에, 이곳에서 후발대와 합류한 뒤 돌아간다. 그때까지 적당히 엄폐한 뒤에 휴식해.”

욕심을 내 흔적이 끊겼음에도 무리하게 이동한다면 뒤따라오고 있는 2분대, 3분대와 길이 엇갈릴 확률이 높았다.

김동석 소령이 명령을 내린 뒤, 한 번 더 놓친 게 없나 확인하려 주변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찰나.

“쉿. 이놈 머리통에 찬바람 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모두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싸늘하고 소름 돋는 목소리, 그보다 더 소름 끼치는 금속 물체가 김동석 소령 뒤통수에 닿았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뒤통수에 닿은 금속이 총구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대장님!”

대원 중 한 명이 김동석 소령을 발견하는 순간, 모든 총구가 일제히 김동석 소령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향했다.

“분명 입 다물라 했을 텐데.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 자 외에 그 누구라도 입을 열면, 이놈은 죽는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총구를 겨눈 상태 그대로 모두가 얼어붙었다.

“흔적을 남겨 놓은 사람이 당신인가?”

“···”

김동석 소령이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켜내며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질문에 대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질문은 내가 한다. 소속.”

“···”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김동석 소령이 똑같이 침묵으로 대응하자, 뒤통수에서 더 센 압박감이 느껴졌다.

“대답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텐데. 소속.”

“상황을 보니 나를 쏘면 당신 신상에도 그리 이롭진 않을 것 같은데?”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대원들이 겨누고 있는 총구의 방향은 단 한 곳, 그 말은 즉 뒤통수 뒤엔 다른 위험 요소가 없다는 뜻이고, 신원미상의 남자 혼자 배짱을 부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말도 잘 통할 것 같은데··· 서로 궁금한 게 있으면 하나씩 주고받는 게 어떤가.”

피식대는 헛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뒤통수에 총구가 닿아 있음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김동석 소령도 대단했지만, 홀로 특공대 앞에 나타나 그를 인질로 잡은 남자의 배짱도 보통은 아니었다.

“내 제안이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나도 다시 한번 묻지. 흔적을 남겨 놓은 게 당신인가?”

“그렇다.”

넓고 험한 산 안에서 오직 두 사람만의 말소리만이 오갔다.

다른 대원들은 처음 총구를 겨눴던 자세 그대로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소속.”

“대한민국 국군 특공여단 정찰대 소속 김동석 소령이다. 내 신분을 밝혔으니, 그쪽도 신분을 밝혀라. 남에서 북으로 전향한 자인가?”

북한 지역에서 사용하는 특유의 억양이나 말투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출생지가 남쪽 어딘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또다시 남자가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김동석 소령 또한 내심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이 남자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많았으니까.

왜 이런 흔적을 남겨 유인했는지, 자신의 쪽수가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도 왜 숨어있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는지.

그중 가장 궁금한 건 이 남자의 정체였다.

“지금까지 동료가 오지 않는 걸 보니 주변에 동료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보아하니 나를 죽이려는 게 목적은 아닌 것 같고, 조용히 대화를 원하는 것 아닌가? 곧 아군 후발대가 이곳에 도착하면 시끄러워질지도 모르는데 괜찮은가?”

후발대라는 말에 남자가 고민하는 듯 하자, 김동석 소령이 의외에 명령을 내렸다.

“다들 총 내려.”

미동도 없이 총구를 겨누고 있던 대원들이 머뭇거리자.

“괜찮으니 총 내려놔. 어서.”

두 번째 명령에 대원들이 총구를 내렸다.

“자, 나는 이 정도면 당신과 대화하기 위해 충분히 노력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질문을 던지고 조금 기다리자, 뒤통수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총구가 떨어지자 김동석 소령이 조심스레 뒤를 돌았다.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상. 김원봉이다.”

“김원봉이라면···”

김원봉이라는 이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상이라는 직책에.

모두가 흔적을 남긴 이가 김원봉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흔적을 남긴 거지?”

“그야 자네들이 좋아 할만한 꿀단지를 넘겨줄까 해서지. 이런 단순한 흔적도 못 쫓아오는 멍청한 놈들에게 꿀단지를 넘길 순 없는 노릇이지 않나. 쓸데없는 힘겨루기나 하느라 시간을 너무 지체했군. 자네들도 오늘 일을 상부에 보고해야 할 테니 내일 새벽 06시. 이곳에서 다시 보지.”

김원봉이 움직이자, 특공대가 일제히 총구를 겨눴다.

총구를 막아선 건, 김동석 소령이었다.

“놔 줘. 내일 새벽 06시, 이곳에 재집합한다.”

남자의 정체가 김원봉이라면, 모든 퍼즐이 맞아떨어진다.

일제가 당시 현상금 100만 원(현재 가치로 수백억 원)을 걸어서라도 잡고 싶었지만, 단 한 번도 잡히지 않은 신출귀몰함.

김원봉이라면 이 정도 흔적으로 누군가를 유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테니까.

“당장 여단장님께 보고해. 김원봉이 꿀단지를 넘기려 한다고. 내일 작전은 여단장님의 지시를 듣고 현장 상황에 맞게 수립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꿀단지를 발견했다면 모를까, 김원봉에 의해 넘어오는 꿀단지는 특공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 번 변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세 번은 더 쉬울 테고.

또 하나의 골치 아픈 문제가 무전을 통해 날아 들어갔다.

***

특공여단 지휘 막사.

결정은 쉽다.

책임과 죄책감이 쉽지 않아서 그렇지.

“내일 06시에 다시 김원봉을 만나기로 했단 말이지···”

얼핏 보면 고민할 시간이 넉넉하다고 착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은 늘 예상했던 것보다 촉박하게 흘러간다.

멀리 떨어진 지휘 막사에서 보고를 듣고 명령 내린 것을 토대로 현장 상황에 맞게 조율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몸소 다양한 작전을 겪어보지 않은 지휘관들이 가끔 사람 속 터지는 멍청한 명령을 내리는 이유기도 했다.

‘경우의 수는 두 개···’

첫째는 김원봉이 김일성을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경우.

특공대가 쫓았다는 흔적을 듣기만 했음에도, 나노봇이 알려준 그의 학술적 정보보다 훨씬 치밀하고 계획적인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일이 잘 풀려가고 있는 지금, 김원봉이라는 뜨거운 감자가 대한민국으로 망명하겠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는 건 내가 바라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아니, 사실 절대 그래선 안 된다.

이념의 늪에 빠져 잘못된 선택을 한 것에 대한 밍밍한 유감이 들긴 하지만, 애국회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 청산에 대한 흐름이 그 어느 때보다 매끄러운 지금, 북한에 제 발로 넘어간 독립운동가의 망명을 받아주는 건 갑론을박과 사회적 혼란을 불러올 테니까.

“만약 두 번째 경우의 수라면···”

그래, 차라리 이게 훨씬 낫겠다.

두 가지 경우의 수에 대한 대비를 머릿속에 넣은 채, 통신 장교를 불렀다.

“빨리 오게. 지금 한시가 급해.”

우리를 탈출한 돼지가 내 앞에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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