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또 다시 북진(1)
매서운 추위가 오거나 말거나.
중공이 일평생 농사만 지어오던 인민들을 강제로 징집해 군인으로 만들거나 말거나.
마지막으로 저우언라이가 물밑에서 접촉을 해오거나 말거나.
어차피 저우언라이가 접촉을 해왔다 한들 마오쩌둥이 베이징에서 커다란 백기를 흔들어 대며 연합군을 반기거나, 대국민 연설을 통해 ‘연합군이 내놓을 모든 조건을 무조건 수용한다.’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지 않는 이상 변하는 건 없다.
저우언라이 역시 자신의 접촉이 작은 숨구멍은 만들어낼지 몰라도, 전세를 바꿀 무언가가 되진 않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국군과 연합군은 기존 계획대로 북진을 택했다.
모든 전선에서 대대적으로 북을 향해 진격하기 하루 전.
“사단장님. 이제 곧 올라가실 차례입니다.”
“알겠네. 음. 음. 아, 아아.”
살갗을 찢는 추위와 맞서 싸우며 진격해야 할 군 장병들의 사기를 고취 시켜줄 연설문이자 혼란스러운 전쟁터가 된 한반도에서 제 역할을 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국민 여러분께 담화문을 전하기 위해서.
어쩌면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순간인데, 볼멘소리가 나오거나 목이 가라앉지 않도록 목을 가다듬었다.
“다음이 이강산 준장이 나와 연설할 차례 맞지?”
“그래. 카메라에 이 순간을 선명하게 담으려고 새벽 댓바람부터 와서 기다렸단 말이지.”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되는군. 내가 내부 소식통을 통해 들었는데, 군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장난이 아니라는군.”
맨 끝줄에선 단상에 오른 사람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기자와 군중이 모여있었다.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앞선 차례에는 이시영 부통령의 담화문 발표가 있었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선 전 국민의 노력과 참여, 국가는 그런 노력과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게 주된 요지였다.
만세 삼창을 끝으로 이시영 부통령의 담화문이 끝나자, 대중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미국에 박혀있어서 그렇지, 지금 대한민국엔 임기를 수행하는 대통령이 있다.
승만 리.
미 공군 화물기, 그것도 화물칸에 몰래 몸을 실어 반공 바람을 일으켜 미국 의원들을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직 대한민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못이 아니라 안 돌아오고 있다고 해야 정확하겠지.
누군가에 의해 억류되거나 감금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근현대 한국사를 떠올려 보자면 가슴이 콱 막힘과 동시에 울분이 토해지는 게 현실이었다.
좀 잘살아보려 하면 외세의 침략에, 일제 강점에.
광복 후 과거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즈음엔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는 각종 수도 없이 많은 이유가 튀어나와 과거 청산에 실패했다.
그러기를 5년, 지금의 6.25 전쟁이 터졌다.
이 염병하고도 빌어먹을 역사의 흐름을 답답해하지 않고 버텨?
한국인이 맞는지 유전자 검사를 다시 해 봐야 한다.
“사단장님··· 사단장님? 이제 올라가셔야 합니다.”
“어, 그래. 알겠네. 가지.”
답답하기만 했던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느라 단상에 늦게 오를뻔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한민국 군인 이강산입니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 대한민국에 그런 가슴 답답한 역사는 없을 테니까.
순간 정적이 흐르는 장내를 향해 연설문을 읽어 내렸다.
***
1950년 12월 5일. 개전 164일 차.
“방송을 통해 제 목소리를 듣고 있을 모든 나라에 계신 국민 여러분께.”
“적이 쏜 총알과 포탄 파편이 좀 전까지 내가 있었던 곳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몇 날 며칠을 함께해온 전우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오로지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전쟁터에서 지내다 보면 이런 조용하고 적막한 단상에서의 시간이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나는 군인일 뿐이지, 대통령도 정치인도 아니다.
전국,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도 들을 수 있을 연설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런 제가 이 단상에 올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만, 아주 간단하고 일상적인 말들을 여러분께 전해볼까 합니다.”
“제 휘하에 있는 부대원들은 잠들었다 깨어나면 자신의 팔과 다리를 더듬어 제대로 된 위치에 팔과 다리가 붙어 있는지 확인합니다. 비교적 전선이 안정화된 상태라면 막사에서, 그렇지 않다면 딱딱하기 그지없는 진지 안에서 말이죠.
잠에서 깼을 때 팔다리가 제대로 붙어 있는 건, 누군가에겐 너무 당연하고도 일상적인 일이지만 전쟁터에 나온 군인들은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주변을 살피고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막사라면 이부자리를 깨끗이 정리하고, 진지였다면 진지가 무너진 곳은 없는지, 보완할 곳은 없는지 찾아 보완합니다. 그렇게 우리 군인들은 하루의 첫 과업을 완수합니다. 여기까지 내 힘으로 해낼 수 있다면, 그날은 행운이 깃들었다고 뿌듯해하면서.”
단상에 올라 대한민국 만세, 반공 선전과 친일 척결에 대한 뉘앙스만 적당히 풍기다 돌아가도 사람들은 열렬히 환호할 것이다.
진격을 앞두고 이런 자극적인 문구들을 연설에 넣지 않은 건, 지금 이 시점이 아니라면 앞으로 시민들의 마음속에 새겨 넣기 힘든 무언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완수한 작은 과업들이 완료된 수많은 일로 바뀌어 있습니다. 가끔은 기적적으로 맨몸으로 북한군의 탱크를 막아낸다거나, 수백 명의 병력으로 수만 명의 적군을 막아내기도 합니다. 태생부터 크고 장대한 무언가만이 기적을 만들어내는 게 아닙니다. 사소한 것들이 모여 큰 기적을 만들어 낼 때도 있는 법입니다.”
작은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큰일은 절대 해내지 못할 테니까.
“행여 제 말이 와닿지 않으신다면, 전쟁터에 사랑하는 남편과 자기 자식을 보낸 군인 가족에게 물어보십시오. 사명을 다하기 위해 한번, 두 번, 세 번씩 파병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함께 짐을 짊어지는 가족들 말입니다.
조국을 위해, 명예와 개개인의 사명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군인들에게 국민은 감사를 가슴속 깊이 새기고, 국가는 그들이 흘린 피땀 어린 노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북진을 앞둔 지금!
누구나 살면서 두려움과 부딪히듯 우리 군인들 역시 북진하며 두려움과 마주하고, 그 두려움은 전진하려는 우리들의 마음을 후퇴로 바꾸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겠지만, 그 두려움이란 것들은 우리보다 이성적이지도, 정당하지도, 훌륭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두렵지 아니하며,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전쟁에 참전한 국군과 연합군들을 낳아주신 모든 어머니, 이름도 알지 못하는 나라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대한민국 국민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신 모든 분께 이 부족한 연설을 바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연설이 끝났다.
누군가는 군인이 이부자리나 신경 쓰는 게 무슨 군인다운 것이냐며 엉망인 연설이라 비난할 수도, 누군가는 진격을 앞둔 군인의 심정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잘 그려낸 연설이었다며 칭찬할지도 모르겠지만.
비록 엉망이라 할지라도, 내가 내뱉은 연설문은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발버둥 친 증거로 남을 것이다.
나아가 군 지휘관으로서 정답에 가까운 판단을 내리게 하는 좋은 밑거름으로 여길 생각이었다.
마이크가 꺼지고 허공에 가벼운 눈인사를 마친 뒤 단상에서 내려가려던 찰나.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할 정도로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장내를 휩쓸며 지나가고 있었다.
툭.
대중들과 기자들 사이에서 누군가 지팡이를 떨어트렸다.
흰 두루마기와 굽은 허리.
얼굴과 손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그가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영감님. 여기 지팡이···”
옆에 있던 시민들이 지팡이를 주워 노인에게 전하려 했지만, 노인은 지팡이를 손에 쥐는 대신 단상을 향해 힘겹게 두 손바닥을 쳐대며 작은 박수 소리를 만들어냈다.
노인에게서 시작된 박수는 지팡이를 주워든 누군가에게.
누군가의 박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환호성으로.
바람이 채 지나가기에도 짧은 시간, 그 짧은 새 장내는 온통 박수와 환호성으로 전염되었다.
손에 카메라를 든 기자들은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지지 않겠다는 듯, 최대한 빠른 속도로 손에 쥔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내가 단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분명 차갑고 매섭기 그지없는 동장군의 입바람이었건만, 그 안에서 다가올 봄 내음이 느껴졌다.
***
같은 시각. 소련 모스크바.
혹시 방탄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군복 상의에 많은 훈장이 붙은 남자가 스탈린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소련군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독소전쟁에서 가장 빛나는 공훈을 세웠다는 평을 들었지만, 지금은 후방 군관구 사령관으로 떠밀려 내려간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과 더불어 소련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동지께서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듣자마자 화장실에서 뛰쳐나와 곧장 이리로 달려왔습니다.”
“어서 오게. 내 동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누가 군인 아니랄까 딱딱하고 권위적인 성격을 가졌던 게오르기 주코프 사령관과 달리 바실렙스키 총참모장은 부드럽고 유한 느낌으로 스탈린을 대했다.
스탈린 역시 바실렙스키에게 충분한 신뢰를 보였다.
“지시하신 부분에 대한 자료들과 상황을 기반으로, 현재 군에서 판단하고 있는 방향이 간략하게 요약되어있는 서류입니다. 보시기에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지.”
바실렙스키는 스탈린의 기분을 잘 파악하고, 달래기에 능했다.
주코프 장군과 스탈린이 빈번하게 충돌할 때마다 늘 부드러움으로 스탈린을 달랬던 게 바실렙스키였으니까.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탈린이 원하는 것을 넘겨줬다.
“흠···”
서류를 보며 스탈린이 한숨을 내쉬자, 바실렙스키가 재빨리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혹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날마다 조금씩 상황이 변해가기에, 그 안에 적힌 군의 판단도 충분히 바뀔 여지가···”
바실렙스키 총참모장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가 가진 단점 중 하나를 꼽자면 주코프 사령관보다 기가 약해 스탈린의 눈치를 지나치게 봤다는 점.
그로 인해 스탈린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도 쉽사리 제지하지 못한 적이 종종 있곤 했다.
“아니? 불편하고 말고 그런 게 아니야. 몸을 맞댄 오랜 이웃이 바뀔지도 모르는데, 심란하지 않으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그야···”
바실렙스키 총참모장이 스탈린의 말뜻을 이해하려 식은땀을 흘려댔다.
“그래서 말인데, 바실렙스키 동무. 나는 말이지···”
스탈린이 천천히 본인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