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또 다시 북진(2)
이곳저곳을 참견하며 명분을 좋아하는 미국은 힘만 센 겁쟁이들의 나라다.
연합군 공군이 한반도와 중공의 국경지대와 만주 공군 기지를 폭격한 건 소련에 개입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일 뿐, 적당히 북한 영토를 얻는 것에 그칠 것이다.
이것이 스탈린의 생각이었다.
“미국과 한국이 동아시아에서 우리와 이웃을 맺도록 내버려 두라. 물론 우리 소련이 대한민국의 한반도 지배를 공식적으론 인정하지 않겠지만, 중공 동무들과 지지고 볶게 그냥 내버려 두면. 저들이 무슨 수가 더 있겠냔 말이야. 김일성 동무 소식은 아직인가?”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까지 연합군이 치고 올라오더라도, 거기서 모스크바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중공과 국경을 맞대게 두면, 불안감을 느낀 동유럽이나 일부 국가들이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겠습니까?”
“불만? 무슨 불만. 바실렙스키 동무, 우리가 어디 손 놓고 이 전쟁을 지켜봤던가? 탱크와 전투기 하나 없는 나라를 기습하는데 작전을 만들어 줘, 베테랑 군사고문단도 파견해 줘. 공군도 지원해줘. 여기에 불만을 가지는 것들은 스스로 멍청하다는 걸 반증하는 것인가? 아니면 소련이 자기들 대신 나서 땅따먹기라도 해달란 말인가?”
불만이라는 단어를 듣자, 스탈린의 속이 점점 끓어 올랐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정말로 지기가 힘든 전쟁이었다.
상황이 이따위로 흘러가고 있는 게 어디 소련 탓인가?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동지. 김일성 동무를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찾고는 있으나···”
말은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처럼 하고 있었지만, 표정과 말투를 보아하니 속은 절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럴 때 숙이지 않았다가 비참한 말년을 맛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바실렙스키 총참모장이 고개를 숙였다.
“꼭두각시 따위야 제 혼자 죽어버린 것이면 별 상관없네. 어차피 전쟁을 일으킨 악인의 무관심은 선행으로 포장되기 쉽지만, 그에 맞선 선인의 무관심은 악행이 되는 법이니. 김일성 그놈이 죽어버렸다면 선이 되기 위해 계속해서 심력을 쏟아야 하는 것은 저들일 뿐, 우리는 크게 신경 쓸 것 없네.”
그렇기에 본질을 따져보면 악인이 선인보다 더 선하다는 뜻이 되며, 스탈린은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선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날 수많은 숙청을 해온 그였지만, 일평생 후회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동지. 나중에라도 김일성 관련 보고가 들어온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실렙스키 총참모장이 김일성에 대해 말할 때 동지, 동무라는 호칭을 빼버렸다.
스탈린이 이미 그를 사람 취급하고 있지 않았기에, 그 역시 스탈린과 눈높이를 맞춘 것이었다.
“만약 그놈이 살아있다면···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군.”
어차피 김일성은 소련과 스탈린이 입맛대로 고른 한 파벌의 수장 자격으로 북한을 통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은, 패전을 거듭한 그에게 망명 정부라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세워주는 자비를 내리려던 것이 아니다.
불안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덕분에 완전히 상실하기 직전이고, 소련 역시 심각한 골머리를 앓게 되어 버렸다.
김일성을 시베리아 굴라크에 보내 살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노동과 추위로 교화시키거나, 연합군과의 협상 도구로 사용하려 했을 뿐이다.
그래야 화가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았다.
“중공에 있는 동무들에게 전하게. 국경선은 알아서들 잘 좀 지켜내 보라고 말이야. 신경을 많이 쓴 모양이야. 나가보게.”
“예! 동지.”
바실렙스키 총참모장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손가락 끝에 힘을 줘 머리를 꾹꾹 눌렀다.
조금 시원한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머리가 깨질듯한 고통이 밀려 왔다.
“이···”
몸 한쪽이 마비된 느낌이 들더니 이내 증상이 사라졌다.
스탈린이 숨을 거치게 몰아쉬었다.
***
평양시 신양리 교회 앞.
병력을 태운 군용 트럭 여러 대가 멈춰섰다.
바빠도 너무 바쁜 와중에, 정말 이것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가 있다.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렇다.
[바쁜 와중에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은 아네만, 연합군 측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자네가 적임자라 하도 우기는 바람에···]
‘돌아버리겠군.’
내가 이 작전에 적임자임을 알고 우길 사람은 맥아더 단 한 명뿐이다.
하긴, 이런 작전에 선지자가 빠지는 건 말이 안 되긴 하지.
그 덕에 잠시 평양에 내려왔다.
지금 국군과 연합군에 속해있는 공병 전 병력은 청천강 이북에 남아있는 철조망과 지뢰를 제거하는 데 한창이다.
전에야 중공군들 살갗을 잡아 뜯고 발목과 다리를 날려버린 훌륭한 장애물들이었다만.
추위에 땅까지 얼어붙어 버린 마당에.
아직 남아있는 것들이 설치한 주인을 알아보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해 시간이 조금 지체되는 중에 있었다.
“사단장님. 샅샅이 주변 수색을 마쳤습니다. 눈에 띄는 위험요소는 없었습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수색을 마쳤다며 보고해온 이는 내 휘하에 있는 지휘관이 아닌 육군본부에서 보내온 헌병대 지휘관이었다.
주저 없이 나오는 대답과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는 걸 보니, 최선을 다해 주변을 수색한 모양이다.
“그럼 데려오게.”
이번 작전은 UN과 연합군 사령부 측에서 고심 끝에 허가한 작전이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국군과 연합군 주력이 북진해 멀어지게 되면 후방에서 게릴라가 설침과 동시에 바퀴벌레처럼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긴 김일성 추종세력이 시민들을 선동할 것은 당연지사.
“내래··· 이 간악한 국방군 새끼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네.”
아직 발악할 힘이 남아있는 돼지를 이용해 최대한 민심을 다스리기로 했다.
“오면서도 생각해봤는데··· 너는 첫째,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 둘째, 입을 다문다. 당신은 이것 외엔 아무것도 할 게 없으니 구태여 명을 재촉하지 말라고.”
이제 첫 순회공연의 시작인데, 여기서 죽어버리면 다른 지역 사람들은 억울해서 못 살지.
[평양 시민 여러분!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중대한 발표가 있으니, 소중한 시간을 내주시어 교회 앞으로 모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확성기가 설치된 지프 여러 대가 평양 시내 곳곳을 누비며 시민들을 불러모았다.
김일성이 그토록 박해했던 기독교, 교회 앞으로.
평양 시민 중 상당수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리고 김일성 정권은 기독교를 박해했다.
일제가 억압하고 박해했던 그 어떤 것들보다도 더 지독하게.
“저런··· 저 지옥 불구덩이에 타버려야 할 놈이 여기에···”
“저건 인두겁을 쓴 사탄이야. 사탄.”
“국군이 김일성을 잡았다! 사탄을 잡았다!”
아직 김일성을 무대 중앙에 끌고 가지 않았음에도, 여기저기서 뜨거운 반응이 터져 나왔다.
승산이 없다고 느낀 북한 정권은 자신들이 그토록 박해하던 기독인들에게 총궐기해 줄 것을 호소했다.
[침략자 미 제국주의자들과 망국노 리승만 도당을 완전소탕하는 전승 기원의 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모자란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교인들에게 전보다 많은 기금을 헌납하도록 할 것을 결정, 아니 명령했다.
자신들을 지독하게 박해하고 학대했던 이들의 승리를 기원해 기도해라, 한술 더 떠 기금까지 내라는데.
평양 시민들과 교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차마 헤아릴 수조차 없다.
헌병들이 통제선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김일성은 이미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도록 맞아 죽었을 것이다.
딱!
“악! 내래 이 꼴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들은 모두 반동분자로 처리해 반드시 삼대를 멸하고··· 악!”
헌병들이 몰린 인파는 막아낼 수 있어도, 머리 위로 던져대는 돌멩이까지 막아낼 순 없는 노릇이다.
시민들이 바닥에 있는 어린아이 주먹보다 작은 돌을 주워 던지며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애미애비 발가락에 난 털끝만도 못한 호로새끼! 죽어! 죽으라고!”
심지어 김일성의 친부 김형직과 친모 강반석은 미국 선교사 넬슨 벨의 중매로 만난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인 부모를 둔 자식이 기독교 박해나 하고 앉아 있었으니, 분노가 가실 리가 없다.
‘알아서 매를 버네.’
분명 나는 말해줬다.
사죄하거나, 입 닥치고 있으라고.
반동분자나 삼대를 멸한다는 같잖은 소리는 선택지로 준 적이 없다.
“사단장님 얼굴에 생채기가···”
“나는 괜찮으니 조금만 더 내버려 두게. 어차피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은 헌병대가 사전에 골라내지 않았나. 얼마나 죽이고 싶겠나. 시민들이 조금이나마 응어리를 풀 수 있는 시간을 주게.”
여기 모인 시민들이 야구선수도 아니고, 아무리 작은 돌을 던진다지만 모든 돌이 김일성을 맞추진 않았다.
힘이 부족한 노인들이 던지는 돌은 김일성에게 채 미치지 못했고, 풍채 좋은 아주머니가 던지는 돌은 김일성이 있는 곳을 훌쩍 뛰어넘기도 했다.
조준에 실패한 적지 않은 수의 돌이 날아와 내 얼굴과 몸을 스치며 생채기를 만들었다.
헌병대 지휘관이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물어왔지만, 이들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 기회가 너무 짧아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을 좀 더 주기로 했다.
[아··· 아아. 평양 시민 여러분. 잠시 하시던 행동을 멈춰 주시기 바랍니다.]
지프에 설치된 확성기 마이크를 집어 들어 말했다.
살다 보면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목소리만큼은 절친한 친구처럼 익숙한 목소리가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 아니우?
-내래 라디오에서 들어봤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동무는 뭔 말이 그렇슴메?
평양 시민들에겐 내 목소리가 그런 목소리일 것이다.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퍼져나가자, 돌이 더는 날아오지 않았다.
[보셨다시피 대한민국 국군이 김일성을 생포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화가 먼저 치밀어 오르시는 분도, 안도의 한숨을 돌리는 시민 여러분도 계실 줄로 압니다. 안타깝게도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한 가지만 약속드리고 자리를 떠날까 합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민을 지키는 국군은 절대 여러분을 학대하거나 억압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 나아가 재산과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김일성은 민족의 원흉이자, 지금은 화풀이의 대상이 되어 이 자리에 있다.
물론 화풀이도 중요하지만, 화만 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억압과 박해 속에 응어리졌던 마음이 풀린 뒤 모두가 합심해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살아갈 것을 진심으로 바라며 시민들을 응시했다.
“목소리가 참말로 익숙한디··· 그 짝은 뉘쇼?”
이 순간.
맥아더는 이 짧은 순간을 위해 굳이 나를 평양에 보낸 것이다.
[저는··· 대한민국 군인 이강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