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군수 공장(5)
관등성명을 묻자, 짧은 침묵 이후 수화기가 다시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가 미쳐 소개를 깜빡했군. 알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근래까지 3사단을 지휘했던 나 이종찬이요.
“예. 알고 있습니다. 어쩐 일로 제게 이리 연락을 주셨습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두뇌는 빠르게 가속하기 시작했다.
이종찬.
개전 당시엔 수도경비 사령관, 이후 3사단장으로 보직을 옮겼다는 것까진 알고 있었다.
일제강점 시절 일본군에 자원입대해 장교로 참전,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와 금치 훈장까지 하사받은 현재 국군 내부에서 나름 대표적인 일본군 출신 장성이기도 했고.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는 아주 드물게 친일 행적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가 일부 대중은 그에게 면죄부를 하사해주긴 했다만, 아직까진 그런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휘하는 부대 간 작전구역이 겹친 적도, 그렇다 보니 당연히 개인적인 친분도 없었다.
-염치없지만··· 자네에게 부탁도 하고, 조언도 받고 싶은 마음에 시간을 빼앗게 되었네.
염치없는 걸 아는 양반이 왜 초면부터 반말인진 모르겠지만, 나보다 나이도 많고, 준장으로 진급도 빨랐으니 대강 넘어가 주기로 했다.
‘부탁과 조언? 골치 아프게 됐네.’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시점에서 이종찬과 엮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내가 그간 행해온 행적으로 말미암아 미뤄볼 때, 친일한 이력이 있는 자들은 나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정치판이 가장 극심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군 수뇌부 중 일본군 출신도 상당하니까.
광복 이후에도 잘 빠져나가나 싶었는데, 친일을 청산하려는 작금의 역사적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제가 도움 드릴 만한 것이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언도 모르겠지만, 부탁이라면 더더욱이.
-사람들이 자네를 말할 때 꾸밈이 없고 솔직하다는 말을 가장 먼저 하던데, 정말 그런 것 같군. 그럼 들어나 주겠나? 자네가 충분히 관심을 가질만한 부분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네.
“쭉 이어서 말씀하시면, 듣고 있겠습니다.”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 확신까지 하는데, 들어는 봐야지.
-고맙네.
감사를 필두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이종찬의 목소리가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쟁이 터진 초기에 나는 빨갱이 놈들이 탱크를 앞세워 서울로 밀고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강 이북에서 결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네. 충분한 기동력을 갖추지 못한 국군이 피난민과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다는 것이 그저 망상에 가깝다고 느꼈으니까.
경험이 풍부한 김홍일, 김석원 등의 군 원로들이 지연전을 주장했음에도 결전을 외친 이들이 몇 있었지.
채병덕이랑 신성모라고, 지금은 둘 다··· 여기까지.
-한강 방어선에서 수도경비사령부를 지휘하며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느꼈네. 특히 놈들 탱크가 한강 다리를 넘어오려는 순간, 병사들이 폭발물을 몸에 두르고 탱크 밑으로 파고들어 막아냈다는 보고를 듣는 순간 일본군 장교였던 과거와 나 자신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네.
목소리만 들어도 뭔가 굉장히 반성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긴 한데,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내 관심사이기는커녕 잡설에 가깝게 느껴졌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건 본론.
이러고 나서 친일 행적을 반성하는 이들이 많으니 그들을 감싸주는 발언을 부탁하거나, 본인의 이득을 위한 그 어떤 것을 부탁하더라도 수화기를 내려놔 버릴 예정이다.
-이야기를 꺼내려다 보니 잡설이 길었군.
염치는 모르겠고, 확실히 눈치는 있는 모양이다.
-내일부로 부산에 내려가 병기 행정 본부장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네. 지난날의 수치를 어떻게 하면 씻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내가 직접 자원했지. 얼마 전 부산에 지어진 부산 조병창이 만들어지고 일본 기술자들을 데려오는데 자네 역할이 주요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말을 전하게 된 것이네.
아무래도 수화기를 좀 더 오래 들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가 늘어놓는 잡설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병기 행정 본부와 군수 공장(조병창)을 책임지게 될 사람과의 통화 연결이라고 생각하면 말이다.
안 그래도 조병창이 가동되고 있다는 보고는 받았지만, 병기 행정 본부장 자리에 누가 인사발령이 났는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하던 참이었다.
“말을 번복해서 죄송합니다만, 조언 아닌 조언과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종찬 본부장이 무슨 조언을 원하고, 무슨 부탁을 하려 했는지 이젠 알 것 같다.
-원하던 바네.
“지금 부산을 비롯해 각지에 지어지고 있는 군수 공장들은 자주국방의 초석이자 산실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중대한 역할을 하는 만큼 앞으로 병기 행정 본부에 막대한 예산이 배정될 테고, 그 과정에서 각종 비리가 일어나지 않게 심사숙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행정, 의회, 국방.
사람과 돈이 엮이는 곳이기에, 곁가지부터 뿌리까지 썩어들어가는 비리가 끊이지 않는 곳들이다.
그중 방산비리는 하나 같이 최악의 문제들을 불러온다.
물품의 질이 저하되고 개수가 부족한 것은 기본, 그로 인한 병력의 사기 저하는 곧 전투력 저하로 이어지고 가장 최악으로 치닫는다면 내전이나 쿠데타 결말까지 볼 수 있으니까.
혹시나 이종찬 본부장이 방산비리로 쿠데타, 내전을 상상하는 건 너무 비약이지 않냐고 묻는다면, 멀리 볼 필요도 없다.
국민당군이 국공내전에서 패한 원인 중 하나가 군과 관련된 비리들의 만연이었으니까.
-그야 물론이지. 나라를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반드시 그렇게 할 걸세.
“손원일 해참총장께서는 좋은 군함을 최대한 저렴하게 구하기 위해 국민이 모은 기금을 들고 직접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혹여 지금의 결단이 흔들리는 순간이 오거든 지금까지 국군이 겪어야 했던 간절함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환경과 상황이 바뀌면 그렇게 간절했던 시절은 기억에서 잊혀 생각조차 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모든 일은 초석을 잘 닦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고대에는 군수품에 장난질을 치다 걸리면 곧바로 목을 잘라버렸다.
‘지금은 고대가 아니니 그렇게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만.’
방산비리는 곧 국군의 전투력을 떨어트리는 행위이자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와 다르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 놓고 강력하게 처벌한다면 밑창이 떨어지는 전투화를 만들어 놓고 살살 신으면 된다는 멍청한 소리나, 물이 비 오듯 새는 군용 막사, 밥 같지도 않은 배식을 주면서 감사히 먹으라는 개소리는 듣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지만··· 자네는 내가 그 자리에서 있으면서 죄를 조금이라도 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예수님도, 부처님도, 성모 마리아도 아닌 나에게 자꾸 자신의 죄를 고하는 걸 보면, 진심으로 친일 행적을 수치스럽게 느끼는 모양이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부분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앞으로 본부장님께 맡겨질 임무들을 충실히 해내신다면 기록될 역사가, 하늘이 그 모든 판단을 할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다.
과거와 미래를 알았기에 현재를 바꿔 낼 수 있었듯이.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바뀐 과거는 바뀐 현재를 만들어내고, 바뀐 현재는 바뀐 미래를 만들어낸다.
내가 신속대응사단장이라는 위치에 올라 이종찬 본부장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그 일부고.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하늘이 판단한다니 앞으로는 한 점 부끄럽지 않은 생을 살아갈 것이네. 고맙네. 자네 덕에 사명감을 가지면서도 편히 부산에 내려갈 수 있겠어.
“도움이 됐다면 다행입니다.”
-이만 끊겠네.
정말 그런진 모르겠지만, 들려오는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 보였다.
아, 잠깐.
“부산 공장에서 이미 제가 보낸 설계도대로 소총이 만들어지고 있을 텐데···”
-첫 작품이니만큼 온 신경을 쏟겠네. 설계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만 끊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기까지,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같은 물건, 같은 사람을 보더라도 관점에 따라, 시기에 따라 평가나 평판은 천차만별로 변한다.
과연 바뀌어 가는 역사에 나는 어떻게 적힐까?
“에라. 모르겠다.”
어려운 문제였다.
그야 내가 답을 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이런 철학적인 생각은 나중에 은퇴하고, 시간이 남아돌 때나 해봐야겠다.
지금 순간에 확신할 수 있는 건, 설계도엔 그 어떤 문제도 없다는 것이다.
***
괜한 기분 탓인가?
기분 탓이라고 하기엔 장성으로 진급한 뒤 나를 찾는 사람이 부쩍 많아진 것이 사실이었다.
높은 계급에 오를수록, 영향력이 커질수록 찾아오는 사람들이나 주변 역시 지위나 사회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한 자들로 변해갔다.
‘앞으로 문단속을 더 철저히 해야겠군.’
앞으로도 나를 흔들고 유혹하는 달콤한 제안, 거센 바람을 일으켜 꺾어 버리려는 수많은 시도가 주변을 서성일 테니까.
[6.25 전쟁에서 막대한 공을 세우며 대중 사이에서 전쟁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전후에는··· 권력욕과 자기애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사는 망나니가 되었다. 전형적인 후천적 개새끼이자 기회주의자]
역사에 이렇게 기록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종찬 본부장은 부산에 내려간 뒤에도 적지 않은 연락을 해왔다.
반드시 내가 받아야 한다는 조건부는 붙이지 않은 채로.
“이걸 공적이라고 해야 하나··· 사적이라고 해야 하나.”
나 역시 그의 연락이 싫진 않았다.
연락이 올 때마다 새로운 소총 제작이 어느 단계에 들어섰는지, 첫 시제품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은지를 알려왔으니까.
아마 굳이 따지자면 공적인 연락에 가까웠지만, 나 또한 첫 시제품을 볼 생각에 애정과 사심을 가득 포함 시키고 있었다.
“사단장님. 이번에도 사단장님과 직접 대화하겠답니다.”
“어딘가?”
“이번에도 육본···입니다.”
근래 들어 빈도가 잦아서 그런지, 솔직히 이 정도로 찾아 댈 거면 육본을 내 옆으로 이전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연락에 익숙해져 가는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럴 때면 굳이 말을 하거나 턱을 두 번 치켜들지 않아도 통신장교가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강산입니다.”
-그래. 나일세.
수화기를 넘어 자주 듣진 않았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총참모장님. 별일 없으십니까?”
내 입으로 안부를 묻고도 왜 어딘가 어색한가 했더니, 지구상에서 별일이 생길 확률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게 나였다.
-그래. 그곳에서 내 목소리가 들리면 살아있다는 뜻일 테니 인사치레는 접어두고, 바로 본론부터 말하겠네.
어디서나 흔한 인사치레도 생략한 채, 김홍일 총참모장이 시원시원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뭐, 목소리가 들리면 살아있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니까.
-워싱턴에서 연락이 왔는데, 트루먼 대통령이 자네와 자네가 설계한 소총을 직접 보고 싶은 모양이네. 더 추운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여유가 되겠는가?
세상 그 어디에도 낭만은 없는 곳이 없다더니, 데이트 신청을 받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