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140화 (140/149)

140화. 장진(1)

모든 인생이 저마다 생각대로만 흘러간다면, 세상의 갈등은 많이 줄어들지도 모른다.

빈부의 격차 없이 모두가 부자일 것이며, 모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겠지.

‘꿈같은 이야기다. 아니, 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북한의 침략은 물론,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까지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전공을 올리며 막아냈다.

북진하고 있는 연합군의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건 북한군도, 중공군도 아닌 동장군이었다.

방한 물품과 핫팩, 보온병의 보급이 충분히 됐다고 생각했음에도, 자연이 주는 시련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시련보다 잔혹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려는 듯했다.

괜히 자연재해가 천재지변이라 불리냐는 듯이.

적당한 온기를 담은 바람이 불어오던 웨이크섬에서의 일정은 짧았다.

트루먼 대통령도 나도, 적당한 온기 따위의 낭만을 만끽하고 있기엔 너무 바쁜 몸이었다.

신형 소총 외에도 소기의 성과를 얻은 내가 한반도에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들려야 했던 곳은 김홍일 총참모장이 있는 육군 본부였다.

“그래. 트루먼 대통령과의 만남은 좀 어땠나.”

“미국 역시 이전보다 한반도에 대한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대면 중에 따로 보고드리지 않은 것은, 제 선에서 대답하기 어려운 난처한 질문은 없었기에 그랬습니다.”

만고의 법칙 중 하나인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에 김홍일 총참모장이 보고서를 쓱 훑기만 한 채 내려놨다.

“신형 소총과 관련된 부분은 아마도··· 조만간 백악관에서 좋은 소식을 알려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건은···”

로얄티 중 일부를 조병창에 투자하는 것을 시작으로 선진화된 군수 시스템을 이룩하겠다는 말에 김홍일 총참모장이 크게 반색했다.

그야 혼자 열심히 죽 쒀서 나누겠다는데, 당연히 나와야 할 반응이긴 하지만.

“훌륭해. 군의 미래를 위해 이리도 힘쓰다니··· 아주 훌륭해!”

백악관에서 긍정적인 연락이 오는 순간, 극히 보수적으로 잡아도 최소 수백만 달러의 로얄티가 손에 쥐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오늘 자네를 불러들인 것은 공을 치하하기 위함도 있지만, 얼마 전 들어온 중요한 첩보 하나를 알리기 위함이네.”

그럼 그렇지.

이 첩보는 곧 닥칠 위기거나,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거나.

둘 중 하나에 수렴할 확률이 100%에 가깝다.

“중요한 첩보라 하심은···”

“국군 2군단이 함흥을 지나면서 중공군 포로 열댓 명을 생포했는데, 목적지를 캐내고 보니 하나같이 장진으로 향하고 있었다는군. 미 정찰기 또한 수차례에 나눠 중공군 대부대가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게 관측되었다는 보고를 보내왔네.”

치명적인 보고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장진이라면··· 제기랄.’

국군 1군단과 2군단, 미 해병대가 진격하고 있는 개마고원 일대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개마고원 내 대부분 지역이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지대이며 밤이면 영하 30도, 낮에도 영하 20도는 기본적으로 넘나든다.

이는 포와 전차, 화력 장비들의 윤활유를 얼어붙게 하고, 배터리를 방전시켜 통신이 끊기게 할 정도의 추위다.

그중에서도 장진은 동부전선과 중서부 전선을 갈라놓는 지형적인 요지.

중공군이 한반도에서의 마지막 대공세를 준비했다면, 장진을 향한 공세가 가장 위협적인 공세가 될 것이다.

“만약 놈들이 오로지 장진 한 곳을 노리고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1군단과 2군단을 포위 섬멸하는 그림이 나오게 된다면··· 그야말로 재앙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특히 장진호 일대 도로는 매우 좁은 데다가 얼어붙어 미끄럽기까지 할 테니 전차와 차량이 가지는 이점이 무의미해지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1군단과 2군단이 개마고원에 들어선 뒤 각개격파 당하면 동부전선 전체가 흔들리며 와해 된다.

그렇게 되면 북쪽과 동쪽을 모두 적에게 노출 시킨 채 진격할 순 없는 노릇이니, 북진을 멈춰야 하는 건 물론이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만, 중공 놈들이 지금껏 제대로 된 병참 보급선 없이 공세를 펼쳤다가 호되게 당한 게 몇 번인데. 게다가 이 추위에, 그것도 개마고원에서 그런 무모한 수를 사용하겠나?”

김홍일 총참모장 말대로, 대규모 부대가 제대로 된 병참 보급선도 없이 작전을 수행한다는 건 아주 멍청하고 미개한 짓이 맞다.

미개한 게 맞긴 하지만, 중공군도 보급선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제공권을 장악한 전투기, 폭격기들 앞에 장사가 없었을 뿐이지.

“모든 전쟁에서 쓰이는 전략 전술의 기본이 적의 허를 찌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거의 모든 전선에 있는 부대들이 평화롭게 진격하고 있고, 연합군 역시 전황을 낙관적으로만 생각하는 기류가 만연합니다.”

개전 초기를 제외하고 보자면, 모든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호재만이 가득할 때 모두의 가슴속에 꿈틀거리며 피어나는 또 다른 적.

방심.

어쩌면 지금까지 방심은 금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방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일었다.

“총참모장님, 만약 놈들이 애초에 보급선 따윈 구축할 계획 없이 군장에 며칠을 버틸 식량만 갖춘 채 내려오고 있는 것이라면··· 최악의 경우 1군단과 2군단이 놈들의 보급이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제공권 없이 보급로를 구축하는 건 불가능하다.

현재로서 중공이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는 경우의 수 역시 없다고 해도 무방하고.

두 경우의 수를 합치면 나오는 답은 하나, 보급로를 구축하지 않는다.

대신 빠른 속도로 적을 포위, 섬멸해 적들이 가진 군수품을 노획한다.

추위로 인한 동사자?

배고픔으로 인한 아사자?

만약 격전지를 장진으로 정했다면, 지금껏 중공이 해온 선택 중 가장 위협적인 선택이 될 확률이 높다.

또 한 번의 무모한 명령?

저 새끼들이 어떤 새끼들인데.

한반도에 내려와 있는 사령관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애초에 인명을 그리 소중히 여기는 놈들이 아니기에 더더욱이 가능한 작전이다.

“흠··· 큰일이군. 자네 말대로 1군단과 2군단이 맡은 동부전선이 무너져 버린다면, 중. 서부전선 역시 그 영향을 피해갈 수 없을 텐데 말이야.”

지금 보니, 이 대화에 말려든 사람은 나인 것 같다.

이미 시작 전부터 어떤 말이 나와야 이 대화가 끝날지 정해져 있던 것 같은 느낌이 지워지질 않았다.

“총참모장님?”

“말하게.”

어딘가 모를 미안함이 느껴지는 눈빛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신속대응사단이 장진으로 이동해 1군단과 2군단을 도와 놈들의 공세를 막아내겠습니다.”

“정말, 정말 그래 줄 수 있겠는가?”

이미 풀어야 할 사람이 정해져 있는 문제를 받아들었다면, 나다 싶으면 손드는 편이 낫다.

“물론입니다. 총참모장님.”

아무래도 그게 나다.

과거에 끔찍했던 장진호 전투가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장진으로가 놈들을 막아야 한다.

***

낭림산맥. 작은 목조건물.

“쑹스룬. 놈들이 깊숙이 빨려 들어올 때까지 절대 공격 명령을 내려선 안 되네. 알겠나?”

목조건물 안에 있었지만, 불을 지필 수 없어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는 것은 밖이나 마찬가지였다.

가까스로 강을 건너 한반도에 내려온 중공군을 지휘하고 있는 사령관은 린뱌오.

스탈린은 장군 15명을 합쳐도 린뱌오 한 사람보다 못하며, 장제스 역시 린뱌오를 전쟁의 마귀라고 평했을 정도로 뛰어난 평을 받는 장군이었다.

“최대한 빨리 놈들이 아가리 속에 들어오길 바랄 뿐입니다.”

“이번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 우리 중공의 앞날을 점치기 힘들어질지도 모르네. 반드시···”

“절대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목소리 자체에서 단단함이 밖으로 뿜어나오는 쑹스룬과 달리, 목 안으로 기는 듯한 목소리가 린뱌오의 성격이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라는 것을 알려왔다.

퍽!

나무로 된 문에 무언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동지, 어서 자세를 숙이십시오!”

린뱌오가 자세를 숙이는 것을 확인 한 쑹스룬이 자신도 몸을 숙인 채 재빨리 창문으로 가 바깥 동태를 살폈다.

“동지. 아무것도 아니니 일어나셔도 됩니다. 문 앞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가 쓰러지면서 문에 부딪힌 것 같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무언가를 끌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낭림산맥에 뻗친 산들을 이용해 한반도에 내려와 포위망을 펼쳐 놓은지 단 하루, 오늘 하루에만 벌써 200명에 가까운 병력이 동사해 얼어 죽었다.

경계병이 선 채로 얼어붙어 쓰러지는 건, 종종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가져온 간단한 식량으로는 병사들이 추위를 그리 오래 이겨내진 못할 것이야. 간간이 소부대를 적군 쪽으로 보내 놈들이 불을 켜고 달려들 수 있도록 유인하게.”

유적심입(誘敵深入)

패전을 거듭하는 척하며 적군을 더 깊은 늪으로 초대하는 전략.

이미 2개 병단이 한반도에서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고, 지금은 수백 명씩 동태가 되어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지만, 린뱌오와 쑹스룬은 어딘가 자신에 차 있었다.

그렇다고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온 것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고작해야 이전의 절반 수준인 1개 병단이 채 되질 않았다.

가만있어도 하루에 수백 명씩 병력이 줄어드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리 자신만만 할만한 전력은 아니었다.

“동지··· 동지!”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무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눈썹과 입 주변에 얼음이 내려앉은 병사 한 명이 들어왔다.

“말하라.”

“그것이 하가··· 하갈··· 쓰읍. 하갈우···”

추위에 입 주변 근육이 얼어붙었는지, 발음이 뭉개져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온 힘을 다해 입 근육을 풀어보려는 병사에게 쑹스룬의 매서운 눈총이 쏘아졌다.

“동지. 죄··· 죄송합니다!”

그의 눈총을 맞은 병사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쑹스룬의 심기에 한 번 불이 붙으면 좀처럼 말리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심기에 불이 꺼지거나, 심기에 불을 붙인 사람이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바닥에 엎드려 그와 눈 마주치기를 피하는 한편, 그가 분노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천천히··· 천천히 몸을 녹이고 말해보게. 놈들의 선봉이 하갈우리에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불호령보다 빠르게 린뱌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남조선 군대가 틀림없었습니다!”

하갈우리는 중공군이 매복해 있는 위치에서 15km 남짓 떨어진 곳이었다.

하루, 이틀.

인심을 한껏 써도 3일이면 자신들의 포위망에 들어올 것이다.

“쑹스룬! 각 군장과 상급 군관들을 소집해 결전에 만반의 준비를 마쳐라.”

“예! 동지.”

그간 패배의 치욕을 모조리 씻어낼 생각에, 열린 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때,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건 바람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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