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장진(2)
하필, 하필이면.
육군 본부에서 신속대응사단 지휘소까지 가는 내내 거센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뜻은 곧 개마고원 일대에는 더 많은 눈이 내리고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기랄, 하필이면 말이다.
지휘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주요 지휘관들을 불러들여 긴급회의를 열었고, 그들은 각자 지프를 타고 지휘소에 도착해있었다.
“사단장님, 오셨습니까.”
자리에 앉아있던 지휘관들이 일어섰다.
1연대장 김상옥 대령이 무거운 목소리로 반기는 걸 보니, 이미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웨이크섬이 어땠냐고 웃으며 물어오는 게 먼저였을 테니까.
나 역시 웃으며 대답해줬을 테고.
“현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들 있나? 바로 시작하지.”
북한 지역을 확대해놓은 커다란 지도가 작전 현황판에 붙어있었다.
그중 한 곳을 지휘봉으로 찍은 뒤 말했다.
당연히 장진이었다.
“현재 국군 2군단이 고토리에 지휘소를 세우고 예하 6사단, 9사단, 11사단이 오늘 새벽 고토리를 지나 하갈우리에 도착했을 것으로 예측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호수인 장진호 주변은 다소 특이한 지형이다.
장진호를 기준으로 좌측은 유담리, 우측은 풍유리로 갈라지며, 이 두 곳이 합쳐지는 곳이 하갈우리라 불리는 곳이다.
장진의 초입이라 볼 수 있는 고토리부터 대규모 병력과 전차, 차량이 지나갈 수 있는 진입로는 단 하나.
진입로의 좌측과 우측 지형은 진입로보다 월등히 높게 솟은 고지가 대부분이었기에, 진입로는 자연스레 계곡의 형태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진입로가 하나라는 건, 퇴각로 역시 하나라는 뜻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찰기와 중공군 포로의 증언대로 만약 이곳 유담리, 풍유리, 하갈우리와 고토리까지. 놈들이 대규모 병력을 매복시킨 채 기다리고 있다면··· 2군단은 전멸이다.”
동부전선을 크게 나눠보면 청진으로 향하는 김석원 군단장의 1군단, 장진을 통해 혜산으로 진격하던 김종오 군단장의 2군단.
그 사이에 미 해병 1사단이 북진하는 중에 있었다.
“지금 당장 2군단에 연락을 취해 예하 사단들을 물리게 하는 것이 최우선 아닙니까? 대규모 병력이 두 갈래로 갈라진 뒤 포위당한다면··· 퇴각로도 없이 사방에서 적을 맞이하는 형국이 되고 말 텐데···”
“2연대장.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문기준 대령의 말대로 예하 사단을 물리는 게 최선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이곳이 개마고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추위와 폭설로 인해 각 부대 간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모양이야. 가까스로 통신선을 복구해 고토리에 있는 군단 본부와는 통신이 가능해졌지만, 이미 예하 사단들은··· 하갈우리, 어쩌면 그보다 더 깊숙이 들어갔을 것으로 판단 될 뿐이다.”
고산지대에 강추위와 폭설이 내리면 무선 통신 장비들은 먹통이 되곤 했는데, 하필 지금이 그랬다.
“이런 씨발···”
문기준 대령이 나지막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자리에 모인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 욕이기에, 나를 포함한 누구도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진 않았다.
“현재로서 2군단이 괴멸되기 전,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부대는 우리 신속대응사단과 미 해병 1사단뿐이다. 미 해병 1사단이 작전에 투입될 수 있도록 미군 측에 요청은 했지만··· 아직 답변은 오지 않은 상태다.”
1군단은 시간 내 도착하기엔 먼 거리에 있었다.
설사 가깝다 한들, 군단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쪼개고 나눠 작전을 하달하는 데만 한 세월이 걸릴 거고.
독자적으로 작전 운용이 가능하면서도 장진 근방에 있는 2개 사단은 국군 신속대응 사단과 미 해병 1사단밖에 없다.
가늠조차 되지 않는 추위와 적군이 사방에 매복해있을지도 모를, 나조차도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했던 함정과도 같은 곳에 들어가야 하는 위험을 미 해병 1사단이 감수한다면 말이다.
‘후···’
이럴 시간이 없다고, 서둘러 작전을 구상한 다음 장진호를 향해 부대를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 쉽게 나오진 않았다.
나 혼자의 목숨만 달렸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지프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겠지만, 만 명에 육박하는 병력의 목숨이 내게 달려있으니까.
“더럽게 추운 건 기본에, 중공군 놈들은 바퀴벌레처럼 우글거리면서 숨어 있을 테고. 또 어디 보자··· 폭설이 내리고 산악지형이니 항공 지원과 포격 지원도 제때 받지 못할 확률이 매우 큰 그런 작전에 투입되어야 한다. 사단장님, 혹시 이것들 말고 특이사항이 더 있습니까?”
문기준 대령 입에서 나온 하나하나 전부가 엄청난 특이사항들이긴 한데.
더 큰 특이사항은 없는 것 같았다.
“뭐, 그쯤 해두면 될 것 같은데.”
“그럼 빨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2군단 자식들이 총알도 튕겨내는 냉동 인간으로 변해버리기 전에.”
무겁기만 하던 분위기를 깨고 싶었는지, 2연대장 문기준 대령이 너스레를 떨었다.
“고맙네. 2연대장.”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라고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서, 상관으로서의 위엄 같은 것 때문에 너스레를 떨지 못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의 노력으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혹 구상해두신 작전 계획이 있으십니까? 진입로가 고토리를 통해 들어가는 방법으로 한정되어 있다 보니···”
“아니, 우리는 고토리로 진입하지 않는다.”
꼭 길이라고 이름 붙여둔 곳만 길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
장진 고토리. 2군단 사령부.
“통신 복구는 아직··· 아직인가?”
김종오 군단장 얼굴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육군 본부로부터 중공군이 매복해있을 가능성을 전달받았을 땐 이미 예하 사단들이 하갈우리로 진격한 이후였고, 그들과 통신이 제대로 되질 않았으니까.
“눈보라와 주변 지형지물 때문에 전파가 제대로 송수신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통신선을 연결하기 위해 나갔던 통신 소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시간상 이미 돌아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
“돌아버리겠군.”
김종오 군단장과 보고를 하는 참모 장교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눈보라에 길을 잃어 선행 부대를 찾지 못하고 얼어 죽었거나, 매복하고 있는 중공군에 의해 사살됐거나.
둘 다 가히 최악이라 할만하다.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인원들을 제외한 전 병력을 투입해 야전 활주로를 만든다. 이미··· 괜한 설레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
“예. 알겠습니다.”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불안해하며 날씨가 좋아지기만을, 통신이 복구되기만을 가만히 기다릴 순 없었다.
땅을 파거나 모래를 쌓아 진지를 만들 순 없었지만, 기름이 들어있던 빈 드럼통과 빈 나무 상자를 활용해 기관총 진지를 만들고 진입로를 제외한 곳에 철조망을 둘렀다.
임시로 만든 야전 활주로에서 큰 수송기나 전투기가 이륙하거나 착륙할 순 없겠지만, 헬기나 소형 수송기를 이용한 물자 보급과 부상병 수송 정도는 가능할 테니까.
그 외에도 사령부가 대비할 수 있는 비전투적 요인을 하나하나 꼼꼼히 체크 했다.
“더 들어온 보고는 없나?”
김종오 군단장은 개전 초기 6사단을 맡아 춘천 지구에서 북한군을 완벽하게 저지해낸 훌륭한 지휘관이다.
지금껏 군을 지휘하면서 한 번도 추위와 눈보라에 통신이 마비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정찰기 역시 눈 때문에···”
“이런 제기랄. 알겠네. 그 어디서든 보고가 들어오면 즉시 내게 알리도록 하게.”
어쩌면 자신이 부하들을 사지로 밀어 넣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와 가슴이 저렸다.
할 수 있는 모든 지시를 마친 김종오 군단장이 머리를 감싸 쥐며 눈을 감았다.
“제발···”
어서 눈보라가 그치고, 그친 뒤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
국군 6사단 7연대.
가장 먼저 하갈우리의 갈림길에서 유동리를 향해 진격한 부대는 임부택 중령이 이끄는 국군 6사단 7연대였다.
병사 대부분이 군복 안 주머니에 넣어둔 핫팩 2개에 의지해 눈보라와 맞서 싸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니미. 지독하고만. 지독해. 안 그렇냐?”
“이런 날엔 입도 함부로 열면 안 됩니다. 입으로 열기 빠져나갑니다. 얼른 통신선이나 뒤따라오는 놈들에게 넘겨 버리고 본대에 복귀하는 게 상책입니다.”
통신 소대장 이진욱 소위와 소대원들이 통신을 복구하라는 명령을 받고 하갈우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숱한 실전을 통해 경험을 쌓은 국군은 개전 초기의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부대 간 통신의 중요성을 알고 통신선 복구에 박차를 가하는 건, 군단 사령부를 포함한 2군단 거의 모든 예하 부대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려면 너도 빨리 내려서 앞에 쌓인 눈이나 쓸어. 어?”
“소대장님. 왜 그러십니까. 어차피 제가 쓰나 안 쓰나 별 차이 없습니다. 들고 온 핫팩이나 하나 더 드립니까?”
통신 소대장 이진욱 소위와 소대원 이충만 병장은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이충만 병장이 조용히 이진욱 소위 주머니에 여분의 핫팩을 찔러넣자, 이진욱 소위가 넘어가 주겠다는 듯 고개를 돌린 뒤 눈을 감았다.
무릎을 넘어 허벅지까지 쌓인 눈이 통신 소대가 탄 트럭의 앞길을 막아댔다.
심한 곳은 대강이라도 눈을 치우지 않으면, 도저히 트럭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할 정도였다.
“어? 소대장님. 혹시 들으셨습니까?”
“듣긴 뭘 들어? 아 진짜, 추워 죽겠으니까 쓸데없이 장난치지 마라.”
이진욱 소위가 짜증을 내며 이마를 찌푸렸다.
“분명 총소리 비슷한 게 들린 것 같은데··· 못 들으셨습니까?”
탕! 타-당!
“또!”
아주 멀리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총성이 들려왔다.
그제서야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기라도 한 듯, 이진욱 소위가 트럭에서 내렸다.
“다들 총소리 못 들었나?”
“잘 모르겠습니다? 잘못 들으신 것 아닙니까?”
눈을 치우던 소대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고원지대에선 강풍이 산 위와 아래의 공기층을 나눠놓는다.
더 높거나 낮은 고지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전달되지 않도록.
이들이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쯧··· 그렇다면야 뭐···”
“혹시 저희 뒤를 따라오는 부대가 위치를 알리기 위해 쏜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럴싸했다.
개마고원에 접어들기까지 적과 전투가 벌어진 일은 손에 꼽았으니까.
자신들과 같이 통신선을 연결하려는 처지에 있는 불쌍한 통신 소대의 발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흡. 에잇! 뭐야 이거.”
트럭으로 돌아가던 이진욱 소위가 무언가에 발이 걸려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
쪽팔리게 넘어지기까지 하다니, 되는 일이 없었다.
염병할 고철 덩어리인 통신 장비들만 제대로 작동했어도 이런 개고생을 할 필요 없었을 텐데.
“소··· 소대장님.”
넘어진 채로 자리에 드러누워 버린 이진욱 소위를 본 소대원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못 볼 것이라도 봤다는 듯.
“뭔···”
소대원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못 볼 것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