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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142화 (142/149)

142화. 장진(3)

개전 초기라면 모를까.

전쟁이 지속 되면서 잔혹하고 잔인한 전투를 수차례 겪을 때마다, 군인들의 뇌에는 저마다 내성이 쌓인다.

처음엔 온전한 시신만 봐도 기겁하며 구역질을 했던 신병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 조각난 시신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이··· 이게 다 뭐야···”

이진욱 소대장과 소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통신이라는 병과 특성상, 전투 병과에 비하면 적으로부터 한발 물러서 있다고는 해도 말이다.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얼어붙기 전에 취하고 있던 자세 그대로 동사한 것 같습니다···”

“여기! 여기에 있는 것만 해도 10구가 넘습니다. 소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얼어 죽은 중공군들의 시신이었다.

머리통이 깨져 뇌 속이 훤히 보인다거나, 뱃가죽이 찢어져 내장이 흘러나온 시신들이 아닌 곳곳에 작은 생채기만 보이는 깔끔한 시신.

금방이라도 눈을 깜빡일 듯 깔끔하게 얼어붙은 이질적인 모습이, 그간 봐온 다른 시신들보다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놀란 것뿐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빨리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자고.”

찝찝한 기분이 채 가시질 않았지만, 이진욱 소위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뒤 소대원들을 향해 태연하게 말했다.

“소대장님.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충만 병장이 이진욱 소위에게 건넨 의문에, 다른 소대원들도 저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유추해내기 시작했다.

“흠···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후퇴한 중공군이 이곳을 지났을 수도 있고, 이 추위에 산채로 얼어붙은 것까진 백번 이해한다 해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사격 자세로 얼어붙은 것도 그렇고, 청천강에서부터 도망쳐 온 중공군이라기엔 상태가 너무 깔끔합니다. 그렇다는 건···”

“후퇴해 도망쳐온 중공군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원초적인 본능이 말해줬다.

아, 뭔가 잘못됐다는 걸.

“소대 전원 차량 탑승! 본대로 돌아간다.”

통신선이고 나발이고, 이들이 후퇴한 중공군이 아니라면 새롭게 국경을 넘어 들어온 중공군이란 뜻인데, 자신과 소대원들의 추리가 맞았다면 이건 대참사나 다름없다.

통신 소대장 이진욱 소위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빠른 판단을 내렸다.

“빨리 타! 빨리··· 컥.”

소대원들을 닦달하던 이진욱 소위 목을 무언가가 관통했다.

목에 난 자그마한 구멍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내리는 피가 바닥에 쌓인 흰 눈을 적셔 들어갔다.

탕!

총성이 들려온 건 그가 구멍 난 목을 부여잡기도 전, 1초도 채 되질 않는 짧은 시간 뒤였다.

흰 눈 위에 뿌려진 소대장의 새빨간 피.

소대원들이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 주변을 가득 메우는 총성과 함께 사방에서 총알이 셀 수 없이 날아들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총알이 날아온 곳을 확인할 새도 없었다.

“으···”

소대원들에게서 뿜어져 나온 피가 눈 위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

국군 6사단 7연대 최북단 1403고지.

어둠이 내렸다.

그와 동시에 총성과 포성이 장진호를 집어삼킬 듯 쏟아졌다.

온 사방에서 쏟아지는 터라,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쾅!

“버텨! 어떻게든 버텨라! 우리가 후퇴하면 8연대도, 1282고지도 끝장이다!”

고토리에 있는 2군단 사령부가 그러했듯, 다른 국군 부대 지휘관들 역시 현 위치에 강력한 급편 방어진지를 구축하려고 했다.

통신 복구를 위해 보낸 통신병들이 올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돌아오질 않았으니까.

그러려고는 했는데.

“염병할··· 이 망할 곳만 아니었어도. 쏴라! 내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대로 갈겨!”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이 M-1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소리쳤다.

땅이 파져야 진지를 구축하든지 말든지 하지.

50cm가 넘게 얼어붙은 눈과 얼음은 야전용 삽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단한 바위를 뚫는 전동착암기쯤은 있어야 땅을 파낼 수 있을 정도였다.

악조건 속에서도 임부택 중령은 휘하 대대장들에게 연대본부 주변 고지를 장악하고, 부대를 방어에 유리한 대형으로 포진시키려 명령해둔 참이었다.

쾅!

근처에 떨어진 박격포탄이 단단한 얼음을 부쉈다.

포탄 파편과 함께 날카로운 얼음 파편이 공중에 날아다녔다.

‘이런 개 같은···’

함부로 후퇴명령을 내릴 수도 없었다.

후퇴로는 하나뿐이다.

후퇴할 방향인 남쪽이 포위되지 않은 건, 후방에 있는 8연대가 버텨주고 있기 때문일 터.

너무 빨리 후퇴하거나, 둘 중 한 곳이 완전히 전멸해버린다면 후퇴로 마저 막히는 형국이 된다.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은 이 상황에서 굳이 희망을 찾자면, 아니 찾아야만 했다.

쾅! 쾅! 쾅!

중공군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리는 곳을 향해 M4 셔먼 전차의 76mm 주포가 불을 뿜었다.

워낙 많은 수가 밀집해 쏟아지고 있는 터라, 순간 탄이 작렬한 곳엔 작은 구멍이 생기나 싶었지만 이내 채워졌다.

물을 퍼낸다고 물에 구멍이 생기는 것은 아니듯이.

“전차를 엄폐물로 활용해라! 소총수들은 최대한 전차를 이용해!”

7연대에 배속되어 있던 전차 중대가 보유한 전차는 총 24대.

지금까진 기름을 바닥에 뿌려대는 애물단지였지만, 지금부턴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임부택 중령이 내린 명령에, 아무런 엄폐물 없이 바닥에 엎드려 있던 소총수들이 전차 뒤로 재빨리 달려나가 자리를 잡았다.

“연대장님! 이대론 얼마 버티지 못하고 연대 전체가 괴멸되고 말 것입니다! 아직 대형을 유지하고 있을 때 후퇴명령을 내리시는 것이···”

임부택 중령을 발견한 5대대장이 자세를 낮춘 뒤, 한 손으로 철모를 누르며 다가와 말했다.

“아직 안돼! 아직은···”

“연대장님!”

쾅!

“윽!”

철모에서 손을 떼자마자 근처에 떨어진 포탄이 만들어낸 충격파에 철모가 벗겨질 뻔했다.

파편이 스쳤는지, 5대대장 뺨에서 진득한 피가 흘러내렸다.

“섣불리 병력을 후퇴시켰다가 8연대와 엉켜버리기라도 했다간! 그때는 진짜 여기를 무덤으로 삼아야 할 것이네. 5대대장! 버텨, 놈들의 첫 번째 공세를 반드시 버텨내야 하네. 전차 뒤에 엄폐할 곳이 없으면 차량 뒤에 엄폐시키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그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이미 양측에 많은 사상자가 생긴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눈대중으로도 중공군 측 사상자가 훨씬 많았지만, 애당초 데려온 머릿수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둑.

기관총 사수가 쓰고 있던 철모가 들썩이며 목이 꺾였다.

아무런 엄폐물을 찾지 못했음에도, 맨몸으로 바닥에 엎드려 당겨대던 방아쇠를 더는 당기지 못했다.

“위생병! 위생병!”

근처에 있던 부사수가 위생병을 불러대며 대신 방아쇠를 잡았지만, 위생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얼음조각에 막힌 수혈관을 사용하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지만, 붕대를 감거나 갈지도 못했다.

장갑을 벗으면 손이 바로 동상에 걸리고, 상처 부위를 살피기 위해 부상자의 옷이나 신체를 드러내는 순간 몸이 얼어버릴 테니까.

부상자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나은 경우가 대다수였다.

추위 때문에 따로 지혈할 필요도 없었고.

이를 본 임부택 중령이 무언가 결심한 듯, 명령을 내렸다.

“날씨가 날씨인 만큼, 시신이 금방 식은 후 단단히 얼어붙을 것이네. 시신을 쌓아서라도 진지를 구축한다! 그게··· 먼저 간 전우들의 시신이라 하더라도.”

5대대장이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뒤, 5대대를 향해 달려갔다.

어차피 공세를 버텨내지 못하면, 시신 수습은커녕 겨울 동안 눈에 파묻혀 있다 봄, 여름이 오면 질척거리는 땅과 함께 썩어 없어져 버리고 말 테지만.

이런 명령을 내려본 적도, 내리고 싶지도 않았지만, 최대한 많은 병력을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명령이었다.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이 명령에 대한 원한은 내가 죽으면, 죽어서 지옥에 가면 그때 원 없이들 갚게 해주마.”

8연대 역시 7연대처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버텨낼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결단이었다.

그때 그렇게.

함께 춘천을 지켜냈으니까.

***

이제 국군 2군단 전체가 포위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가까스로 띄운 정찰기가 장진 일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왔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아직 미 해병 1사단에서는 연락이 없나?”

“예. 아직···”

정찰기가 항공 정찰을 마친 뒤, 신속대응사단은 차량으로 이동이 가능한 한계선까지 차량을 통해 이동했다.

장진호 남서쪽에 있는 대흥.

그곳에 도착한 뒤, 태백산맥이 뻗어놓은 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놈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시간 부로 각 연대장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지정된 장소로 부대를 인솔한 뒤, 공격 명령에 따라 적을 격퇴하고 2군단을 돕는다. 질문 있나?”

“혹 만에 하나, 미 해병대가··· 아닙니다.”

1연대장 김상옥 대령 입에서 질문이 나오다 말았다.

작전 개시를 앞둔 지금, 괜히 초 치는 건 아닌지 걱정된 모양이다.

“그건 걱정할 것 없네. 그럴 일 없겠지만 미 해병 1사단이 더 시간을 잡아먹는다면, 나라도 병력을 보충받아 작전에 차질이 없도록 전선에 뛰어들 테니까.”

“사단장님··· 조금이라도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지금 여기서 취소하셔야 할 것입니다.”

뭐, 말이 그렇단 거지.

“그럼 다들 서둘러 출발하도록.”

“예!”

우렁찬 대답 소리와 함께 연대장들이 흩어졌다.

신속대응사단은 유일한 진입로인 고토리로 진입하지 않는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로는 명령을 받았을 당시 위치인 전천에서 고토리로 가려면 상당한 거리를 돌아가야 한다.

‘1분 1초가 중요한 마당에.’

두 번째로는, 신속대응사단은 적을 격멸해 2군단을 구하러 가는 것에 작전 목표가 있다.

뭐야, 너희가 우릴 구하러 온 거야?

그러려고 했는데, 사실 우리도 포위당했어.

이딴 그림을 만들어서는 당연히 안 된다.

그러려면 포위당한 2군단 병력이 포위망을 뚫고 고토리, 최소한 하갈우리까지 제 발로 나와야 한다는 소린데.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잘 버티고 있어 줘야 하는데···”

신속대응사단이 진입하는 진입로는 하갈우리로 연결되는 태백산맥 능선.

후방에는 사단 포병 연대를 배치해 적절한 순간에 화력 지원을 쏟아부음과 동시에, 하갈우리를 점령해 적의 허리를 끊어내고 장진호 동쪽에 있는 아군 부대를 연결해 반격할 계획이었다.

드드드드드···

M46 패튼 전차가 우렁찬 엔진음을 내며 궤도를 굴리기 시작했다.

항속거리가 130KM에 불과하고 연비가 지랄 맞지만, 810마력 신형 엔진을 장착한 덕에 눈길과 험한 산악 지형을 개척해나갈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다.

급하게 끌어모은 중공군 대부대가 벌써 장진호에 그물을 쳤다는 건, 야포는 집에 놔두고 기껏해야 박격포나 챙겨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놈들이 느낄 M46 패튼 전차는 마치 넘을 수 없는 산과 같이 느껴질 테고, 크고 단단함에서 나오는 웅장함에 오줌을 지리고 말겠지.

“사단장님! 사단장님. 미 해병 1사단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제야 다른 쪽으로 진격할 준비가 된 모양이다.

문제를 간단히 생각해보면 포위됐다는 건, 모든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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