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장진(4)
들숨에 총탄이, 날숨에 포탄이 날아왔다.
장진호 전역이 시꺼먼 화약과 피로 물들어갔다.
아직도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중공군이 쏟아지고 있었다.
쾅!
포격이 산비탈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군, 아군 포격이다! 포병대가 포를 쏘기 시작했어!”
7연대 후방 유담리 최남단에서 쏘아지는 105mm 곡사포와 155mm 고사포였다.
포병대는 후방에서 화력지원 임무를 맡고 있지만, 공세 초기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중공군들이 포대 인근까지 몰려오는 바람에 포병대는 곡사포를 곡사가 아닌 직사로 쏴야 할 정도였으니까.
후방에 있는 포병대가 전방으로 포를 쏘는 건, 후방 지역에 아주 작은 여유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죽어! 좀 죽으라고! 이 빨갱이 새끼야!”
전방에 있는 소총수들은 이미 총구 끝에 대검을 착검하고 진지 근처에 온 중공군과 백병전을 펼치고 있었다.
분투(奮鬪), 사투(死鬪)
있는 힘껏, 죽을 각오로 방아쇠를 당기고 대검을 휘둘렀다.
그럴수록 찬바람도 더 열과 성을 다해 불어댔다.
말이 한반도지, 시베리아 특급 그 자체였다.
“끅··· 끄르륵···”
소총에 착검한 대검을 중공군 목에 박아넣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벌어진 입 사이로 핏물이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우득!
박아 넣은 대검을 비틀며 뽑았다.
살과 인대, 그리고 끝이 목뼈에 닿았었는지 대검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다.
“맨발? 대체 뭐 하는 새끼들이야, 씨발 진짜···”
자신이 쓰러트린 중공군은 맨발이었다.
이 차디찬 얼음 바닥을 맨발로 뛰어 내려온 것이다.
“김 하사 뭐해!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어?”
바로 옆에서 지른듯한 고함에 정신이 들었다.
조잡하게 만든 쇠붙이가 머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탕!
한눈을 팔거나, 힘들다고 쉴 시간은 없었다.
한 놈을 죽였으면, 바로 옆에 있는 또 다른 놈을 죽이는 것을 무수히 반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잠깐, 아주 잠깐이었다.
맨발을 본 김용선 하사가 잠깐 사색에 잠긴 사이, 중공군이 들어 올린 녹슨 손도끼에 머리통이 쪼개질 뻔했다.
“조금만 버텨! 그냥··· 조금만 버티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김 하사, 알겠나?”
“고맙네. 하마터면 머리에 도끼 꼽고 우리 어머니 만나러 갈 뻔했어.”
이 광경을 목격한 정 하사가 중공군을 쓰러트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정신을 차린 뒤 거리가 있으면 총알을, 가까우면 대검을 박아넣었다.
몇 놈 째지?
‘다섯··· 아니 여섯인가?’
몇 명이나 숨을 끊어 놨는지도 잘 모르겠다.
“씁.”
좀 전부터 오른팔이 생각대로 잘 움직여 주질 않았다.
신기하게도 느껴지는 통증은 없었다.
“놈들이 후퇴한다! 전 병력은 현 위치를 사수하라!”
뱃고동 비슷한 소리가 들린 것 같더니,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탈에서 쉴새 없이 내려오기만 했던 물결이, 비탈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현 위치 고수하라니까!”
지휘관들은 전쟁에 광기에 휘말려 명령을 듣지 않고 뛰쳐나가는 병사들을 말려가며 전열을 가다듬었고, 중공군이 비탈에서 모습을 감출 때까지 사격은 계속됐다.
“해냈다. 해냈어! 우리가 버텨냈다고!”
시야에서 중공군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탄식과 안도의 한숨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해냈다, 버텨냈다.
이겼다는 표현보다 훨씬 상황에 맞는 표현들이었다.
김용선 하사는 맨발이었던 중공군 시체를 찾아보려 했다.
이놈이었나? 아닌가, 저놈인가?
“뭐야··· 맨발인 놈들이 많잖아?”
워낙 전투가 격렬했던 터라 전투 중에 신발이 벗겨진 놈들도 있겠지만,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기 전까진 중공군들이 검은 신발을 신었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검은 신발이 아닌, 발이 얼다 못해 거멓게 괴사해버린 중공군의 발이 검게 보인 것이었다.
“정 일병···”
평소 자신을 잘 따랐던 정 일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중공군과 국군 시신을 겹겹이 쌓아 만든 인간 진지, 그 사이 어딘가에 몸 이곳저곳이 깨진 채로 껴 있었다.
정 일병이 자신의 몸으로 수십 발의 총탄을 막아줬다.
단단히 얼어붙어 빼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만, 눈이라도, 그저 눈이라도 감겨주려 손바닥을 가져다 댔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김용선 하사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얼떨결에 찢어진 군복 속 자신의 오른팔을 보니, 거멓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전체 주목! 연대는 적이 후퇴한 틈을 타 1426고지와 1475고지를 탈환하고, 무반동포와 박격포를 배치한다.”
기뻐할 새도, 살았다며 안도할 새도 없이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이 참모들과 의논을 거친 후, 명령을 하달했다.
“이번 전투에서 부연대장이 전사했다. 힘든 것도 안다. 지친 것도, 우리는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다. 반드시 1426고지와 1475고지를 탈환해야만! 우리 6사단이, 나아가 8연대와 1282고지가 무사히 후퇴할 수 있다.”
지금 두 고지를 탈환하지 않으면, 또다시 중공군이 유리한 산비탈을 점령한 뒤 쏟아져 내릴 것이 분명했다.
7연대가 입은 피해 역시 상당했지만, 중공군의 야간기습과 기습침투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다는 점.
주변 고지가 각개격파 당할 확률을 확연히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습은 전개되어야만 했다.
임부택 중령 역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자 명령이었다.
“가서 싸우자! 놈들의 귓구멍에 함성을 질러 주자!”
소총을 지지대 삼아 일어선 김용선 하사는 생각했다.
참, 오늘 하루가 더럽게 길다고.
***
낭림산맥. 린뱌오 임시 집무실.
“동지, 방금 첫 공세를 마치고 병력을 물렸습니다.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더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걷지 못하는 병사들이 속출해, 더 몰아붙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쑹스룬이 린뱌오에게 첫 공세 결과를 보고했다.
패했다거나, 실패했다는 말은 섞여 있지 않았다.
“놈들을 괴멸시켰나?”
“아직 완벽히 괴멸시키진 못했습니다만, 어차피 놈들은 독 안에 든 쥐 신세일 뿐입니다. 2차 공세, 늦어도 3차 공세면 포위망에 들어온 적들을 완전히 도륙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곧장 다음 공세를 준비시키게. 길게 끌 일이 아니야. 혹시 모를 역습 대비는 잘 해뒀겠지?”
린뱌오는 쑹스룬이 한 보고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독 안에 든 쥐는 맞다.
자신들에게는 없는 전차와 중화기, 곧 항공 지원까지 받을지도 모를 큰 쥐.
첫 공세에 쓸어버렸다면 좋았겠지만, 린뱌오 역시 2차, 3차 공세까지 구상을 마친 뒤였다.
“물론입니다. 지휘소 부근에 역 쐐기형 진지를 구축하고, 진지 후방에 가져온 포와 박격포를 배치해 뒀습니다. 놈들이 잔꾀를 내 기습을 해 온다면, 박살을 내버리겠습니다. 동지.”
린뱌오와 쑹스룬은 같은 생각을 했다.
지금껏 중공군이 당하기만 했던 이유는 사령관들이 멍청하게 병력의 머릿수만 믿고 들이댔기 때문이라고.
적당한 공세를 퍼부었으면, 전열을 가다듬고 후퇴할 줄도 알아야 함이 전술의 기본인데 말이다.
3만의 병력을 잃었어도, 적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줬다면 괜찮다.
27만의 아군이 남아있지만, 적은 고작 2만 남짓도 간당간당할 테니까.
“쑹스룬. 날이 밝기 전, 황혼을 틈타 2차 공세를 가해라.”
“예! 총관 동지.”
날이 밝아온다면, 기지에서 이를 갈고 있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대거 출격할지도 몰랐다.
하루 중에 가장 어둡다는 황혼, 그때를 틈타 2차 공세를 퍼부을 계획이었다.
황혼이 선사하는 어둠에 숨은 다른 그림자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
칠흑보다도 더 어두운 밤.
들리는 거라곤 M46 패튼 전차 궤도가 눈과 얼음을 짓뭉개는 소리, 그 뒤를 이어 달달거리는 군용 트럭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뿐이었다.
빛은 소리보다 더 멀리서도 노출될 가능성이 크기에, 헤드라이트는 모두 끈 상태였다.
부대원들은 비장한 침묵 속에, 언제 나타날지 모를 중공군과의 교전을 준비했다.
[정지, 선두 정지!]
선두 전차에 정지 명령이 떨어졌다.
전차는 서란다고 곧바로 설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야간에 종대 대형으로 이동할 때는, 선두 전차가 정지하기까지, 최소한 200M의 제동거리는 필요로 한다.
안 그랬다간 뒤따르는 전차의 포신이 뒤통수를 때려버릴지도 모르니까.
[전방 2KM 앞에서 최소 대대규모로 추정되는 부대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즉시 사격 대형으로 전환할 것.]
희미한 한줄기 달빛 아래, 전차들이 신속히 대형을 갖추기 위해 기동했다.
“연대장님, 움직이는 부대를 발견한 정찰대조차 피아식별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할 수 있는 최대한 피아식별을 시도하고, 유효 살상 반경 안에 들어오면··· 제기랄.”
1연대장 김상옥 대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곧 1차 작전 지역인 덕동 고개에 다다른다.
유담리와 하갈우리 정중앙에 위치한 덕동 고개는 고립된 6사단 예하 연대들을 모으는 구심점이 될 요지 중 요지였다.
“하여간 꼭 코앞에서···”
앞서 움직이는 부대는 적군일수도, 아군일 수도 있다.
문제는 야간에 피아를 식별할 방법이 마땅히 없다는 것.
날이 밝은 주간에야 군복과 팔에 두른 피아 식별 띠로 아군과 적군을 판단한다지만, 야간엔 현재 가장 발전한 군대인 미군조차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암구호나 합수어도 마찬가지.
실상 수하가능 거리까지 접근하면 피아 식별이 가능은 하겠다만, 수하 대상이 적이면 답어 대신 총알이나 포탄이 날아올 테니 별 의미 없는 짓이다.
쏘느냐 마느냐.
그것은 현장에 있는 김상옥 대령이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연대장님! 사단 지휘소로부터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뭔가 기발한 방법이 생겼다는 듯, 연대 통신 장교가 달려와 속삭였다.
“지시? 지시라니.”
“야간에 피아식별이 불가능한 경우, 현장 상황에 따라 방법을 응용해 사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정찰대를 가능한 접근 시킨 뒤···”
분명 이강산 사단장은 사단 지휘소에 있을 텐데, 마치 위에서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기라도 한 듯, 그럴싸한 해답을 보내왔다.
“역시··· 사단에서 내려온 지시에 따른다. 대신, 정찰대에 엄폐를 확실히 하고 혹여 답이 없거든··· 전투를 피하고 즉시 이탈해 본대에 합류하라고 전하게.”
피아 식별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 받은 정찰대는 신속하게 투입됐다.
만약 적군을 마주한다면 그곳이 무덤이 될지도 몰랐지만, 자원하는 이가 넘쳐났다.
[여기부턴 앞사람과의 간격을 10M로 조정한다. 상황이 발생할 경우, 후미는 즉시 현장을 이탈해 본대에 보고한다.]
모든 의사소통은 수신호로 이뤄졌다.
조용한 산속에서 2KM라면, 상대방 역시 전차 소리와 트럭 소리를 통해 아군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10명의 정예 정찰대원들이 어둠을 틈타 능선을 넘기 시작했다.
숨소리마저 죽인 채.
[정지. 정찰 2조, 3조는 1조와 거리를 벌린다. 명령이다.]
정찰대장의 수신호에 2조와 3조가 눈을 부릅떴지만, 반문할 수도, 명령을 어길 수도 없었다.
[1조 따라와.]
상대 역시 코앞에서 기척을 죽이고 있었다.
누구 하나라도 수가 틀린다면, 어디든 한곳은 벌집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준비됐나?]
구슬픈 휘파람이 적막 사이로 흘러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