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장진(5)
정찰 1조 입에서 흘러나온 휘파람은 곧 노랫가락이 되었다.
중공군은 모르지만, 한국인들은 알 수밖에 없는 가락.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명실상부 한국 문화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
휘파람으로 부는 구슬픈 가락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휘파람이나 말로 소리치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것 없을 것 같지만, 이 휘파람은 지금 상황에선 암호나 다름없다.
중공군이라면 이 휘파람의 의미를 모를 테니 어영부영 시간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고, 그 틈을 타 현 위치를 이탈할 시간을 벌 수 있다.
국군이라면?
“잠깐. 혹시 국군입니까? 저희는 6사단 8연대 소속 장병들입니다!”
반응이 오게 된다.
“귀하의 신원과 이곳에 있는 목적을 밝혀라!”
반가운 목소리였지만, 정찰 조장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재차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혹여 중공군에게 잡혀가던 국군 포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으니까.
엄폐물을 사이에 두고, 긴장 섞인 대화만이 엄폐물을 넘을 수 있었다.
“북쪽에 있는 7연대와 통신선을 구축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유담리로 향하던 중, 전차와 차량이 이동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정말 국군이 맞습니까?”
“우리는 신속대응사단 소속 정찰대다. 신원을 확인할 수 있도록, 두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올 수 있겠나?”
“알겠으니··· 쏘지 마십쇼.”
상대를 믿지 못하는 건 8연대 병력 역시 마찬가지지만, 먼저 휘파람으로 존재를 알린 뒤 신호를 보낸 건 신속대응 사단 정찰대.
이번엔 8연대가 존재를 드러낼 순서였다.
이윽고 뽀드득거리며 눈을 밟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8연대 2대대 소속 김용필 중사입니다.”
신원이 확인되자, 정찰대원들 역시 모습을 드러내 두 손을 들고 있는 김용필 상사에게 다가갔다.
“신원을 확인했으니, 손 내리게. 신속대응사단 정명석 중위일세.”
“후··· 이 망할 곳에서 저희를 구하기 위해 신속대응사단이 움직인 겁니까?”
김용필 중사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신속대응사단이라는 부대명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그래, 고생 많았네. 연대장님이 계신 곳으로 나를 데려가 줄 수 있겠는가?”
“문제없습니다.”
무심결에 한 행동 하나, 새어나간 아주 작은 소음이 언제든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전쟁터에서 휘파람 하나로 수백 명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작은 기지 하나 덕분에.
***
투입된 병력의 규모나 시간의 차이만 조금씩 있었을 뿐, 거의 모든 전선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풍전등화에 놓인 2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국군 최정예 신속대응사단이 투입됐다는 소식이 몇몇 부대에 알려지자 6사단 병력은 살아 나갈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가슴 깊이 품었다.
“서둘러라! 언제 놈들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신속대응사단 1연대가 6사단 8연대와 접선에 성공했듯, 유담리 일대를 지원하기 위해 나선 2연대 역시 6사단 7연대와 접선에 성공했다.
“이거 받게. 쓸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부적처럼 지니고 있기에 썩 나쁘진 않을걸세.”
문기준 대령이 임부택 중령에게 품 안에 있던 모르핀 주사기를 꺼내 넘겨 주었다.
이곳에서 부상을 치료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부상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은 모르핀으로 통증을 감하는 방법이 전부였다.
“항시 품에 지니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돕기 위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내끼리 남사스럽게. 뭐, 내가 오고 싶어서 온 줄 아는가? 명령이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이 온 거지.”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받은 문기준 대령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6사단, 특히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위기 속에서 탈출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중공군이 후퇴하는 찰나의 틈을 노려 1426고지와 1475고지를 점령해둔 참이었다.
“그렇습니까?”
임부택 중령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현재 중공군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보낸 정찰대가 보내온 보고로는 유담리 일대에만 3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아군을 포위하고 있으며, 장진 전체를 놓고 보면 최소 20개 사단이 장진 전체를 둘러싸고 있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최소 20개 사단, 최소 20만 명.
지난번 전투에서 손실된 병력과 자연스레 동사해 죽어 나갈 병력을 제외한다 해도 엄청난 규모였다.
“이것들은 벌레도 아니고, 대체 어디서 이렇게 계속 기어 나오는지 모르겠군.”
“또한, 지난번 전투에서 사살된 중공군의 시신을 살펴본 바로는 제대로 된 동계피복과 물자가 보급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맨발인 시신도 상당수였던 것으로 보아···”
중공군은 애초에 전투를 오랫동안 지속할 생각이 없다.
앞으로 2~3차례 대공세를 막아낸다면, 자연스레 힘을 잃은 중공군은 이전처럼 후퇴하기 급급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이 밤이 고비란 소리군.”
문기준 대령이 단번에 임부택 중령이 하는 말에 요지를 파악했다.
이 밤만 넘기면 후퇴할지, 도망가는 적을 잡아 족칠지 선택지의 여유가 생긴다.
날이 밝자마자 저공비행이 가능한 전투기가 날아와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쏴댈 테니까.
“그렇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펑!
두 연대장이 상황을 판단하고 있는 사이, 박격포가 쏘아 올린 조명탄이 터지며 전장을 밝혔다.
새벽 3시.
공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중공군! 중공군이다! 소총수들은 진지 안으로!”
쾅!
연대 본부가 있는 진지에서 쏘아낸 박격포와 야포가 전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준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많은 중공군에 더욱이 바빠지는 건, 탄약을 들고 나르는 병사들이었다.
“당장 사단에 연락해서 포격 요청해! 당장!”
문기준 대령이 무전기를 메고 있는 통신병에게 소리쳤다.
“예! 연대장님!”
신속대응사단 1연대가 투입됐음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적 열세임은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나 신속대응사단 전차 전력의 대부분은 덕동 고개에 배치됐다.
7연대 진지가 있는 유담리 일대 지형은 그야말로 산에서는 산신령이라는 심마니들도 울고 갈 정도로 지랄 맞은 탓에 전차의 진입이 극도로 제한됐기 때문이었다.
“이 개새끼들··· 역시 끝이 없군. 1연대에도 지원 요청해!”
탕! 탕! 탕! 탕! 탕!
팅!
문기준 대령이 연거푸 방아쇠를 당기자, 탄 클립이 튀어 올랐다.
“탄, 탄 여깄습니다.”
누군가 옆에서 탄창을 건넸다.
오른팔이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는 부상병이었다.
당연히 한 손으로는 총을 쏠 수 없다.
오른팔이 절단되는 큰 부상이었음에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남은 한쪽 팔로 탄통을 열어 탄을 건네준 것이었다.
다른 부상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대장님! 1연대, 3연대 모두 적과 교전 중이라고 합니다! 최대한 빨리···”
“염병할, 거긴 그래도···”
든든한 M46 전차가 있지 않냐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지금 이곳에 전차가 없는 건 순전히 지형 탓이지, 특정 개인이나 부대의 안전이나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놈들이 진지 가까이 오지 못하게 싹 쓸어버려!”
모든 지휘관이 전사자와 부상병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진지 앞 수류탄!”
식량도, 동계피복도, 인원수에 맞는 충분한 탄약조차 없는 중공군이 유일하게 다량 보유한 무기가 수류탄이었다.
오죽하면 총도 없이 수류탄만 수십 발을 몸에 지닌 채 던지고 다니는 투척병이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까.
“안 들려? 숙여! 당장 숙이라고!”
두두두두두두.
기관총 사수가 진지 바로 앞에 수류탄이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총알을 중공군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기관총의 엄청난 총성으로 인해 고함치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길어야 3초 후면, 기관총과 사수는 수류탄에 의해 폭사할 것이 뻔해 보였다.
“안돼! 연대장님. 안됩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임부택 중령이 튀어나갔다.
몸을 날려 기관총 사수의 철모를 진지 안으로 밀어 넣음과 동시에 한 손으로는 수류탄을 집어 던지려던 찰나.
“젠장.”
한 손으로 기관총 사수를 밀어 넣느라 무게 중심이 쏠렸는지, 뻗은 손이 조금 모자랐다.
진지 밖에 있는 손을 안으로 넣기도 전에 수류탄 속 공이가 뇌관을 때렸다.
펑!
“끄아아아아악!”
사라진 손과 너덜너덜해진 팔이 보이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임 중령! 임 중령!”
상황을 목격한 문기준 대령이 달려와 품 안에 있던 모르핀을 주사했다.
시간이 지나자 약발이 듣기 시작했는지, 비명을 지르던 임부택 중령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후··· 후··· 괜, 괜찮습니다. 사내가 이깟 팔 하나 없는 게 뭐 대수는 아니지 않습니까?”
“시끄러워. 헛소리하는 걸 보니 죽진 않을 모양이군. 어서 진지 후방으로 가게. 위생병! 위생병!”
문기준 대령이 위생병을 부르자, 임부택 중령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대령님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여기선 싸워야 하는 군인만 있을 뿐, 부상자는 없습니다. 만약 대령님이셨다면··· 이 상황에 부하들을 놓고 진지 후방으로 피하시겠습니까?”
곧바로 자신에게 탄창을 건네준 부상병이 떠올랐다.
“아니, 그러지 않았을 거네. 내가 존경하는 그분도 그러셨겠지.”
“제가 옆에서 탄을 드릴 테니 한 놈이라도 더 죽여 주십쇼. 자네··· 자네도 말이야. 알겠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기관총 사수는 떨고 있었다.
한낱 병사인 자신 때문에 연대장이 이렇게 됐다는 죄책감에.
손목이 아니라 머리통이 그대로 날아갈 뻔했다는 두려움과 공포감에.
“괜찮아. 정말로 자네 탓이 아니야.”
임부택 중령이 남은 한 손으로 기관총 사수의 목덜미를 두들기자, 수류탄에 의해 망가져 버린 기관총 대신, 임부택 중령이 들고 있던 M-1 소총을 손에 들었다.
“죽어! 죽어, 이 개새끼들아!”
탕! 탕! 탕!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겨댔다.
동상으로 인해 새빨갛게 부어오른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1연대! 1연대는 중앙을, 7연대는 좌측을 맡는다!”
문기준 대령은 임부택 중령 대신, 어제 전사한 부연대장 대신 7연대를 지휘해나갔다.
바라는 것은 딱 두 가지.
바라건데 1연대와 7연대가 최대한 전투력을 보존한 채 이곳을 지켜내는 것과 이 기나긴 밤이 끝나고 날이 밝아오기만을 바랐다.
간절하고도 처절한 소망이었다.
“후퇴는 없다! 전원 착검!”
포격과 총격을 뚫고 진지에 도달하는 중공군이 보이자, 그는 착검을 외치며 가장 먼저 자신의 소총에 대검을 쑤셔 넣었다.
작전상 후퇴란 말도 있건만, 후퇴는 없다고 못을 박으면서.
무식하게 용맹하거나, 광기라는 유혹에 휩쓸려서가 아니었다.
‘날이 밝아온다.‘
이 모든 처절한 흔적들이.
검기만 했던 하늘에 파란빛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