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145화 (145/149)

145화. 장진(6)

참으로 긴 하루였다.

고되고 처절한 전투 끝에 날이 밝아오는 것을 보는 게 말이다.

“왜 이렇게 굼떠? 빨리! 빨리 뜨거운 맛 좀 보여주란 말이야!”

“살았다! 드디어 공군이 왔어!”

누군가의 눈엔 전투기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연합군 소속 공군기들은 엔진을 최대 출력으로 높여 다가오고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전투기들을 유도하는 관제 장교를 고지 곳곳에 배치해 지상 폭격을 유도해야 하지만, 이 와중에 원칙?

공병이건, 의무지원병이건, 통신병이건.

계급과 임무를 떠나 살아남기 위해 방아쇠를 당길 뿐이었다.

“연대장님! 1연대에서 공군에 좌표를 찍어줬으니, 관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답니다.”

“알겠다고 해!”

어차피 신경 쓸 수도, 생각도 없었다.

우우우우웅.

겨우 형체만 알아볼 수 있었던 전투기들이 가까워지자 프로펠러 엔진음과 귀를 찢을듯한 제트 엔진음이 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많이도 왔군.’

아군이야 다다익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선두에 있던 전투기들이 급강하하며 기관포를 갈겼다.

눈으로 직접 피아식별을 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평소보다 훨씬 낮은 고도로 날았다.

과장을 좀 보탠다면, 지나가는 전투기들과 하이파이브라도 할 수 있을 정도.

낮은 하늘에서 쏘아대는 기관포는 진지 주변에 있던 중공군들을 모조리 휩쓸었다.

운이 좋게 살아남은 중공군은 지상에 있는 병력에 의해 쓰러져갔다.

“지금 와서 도망가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 안 하나?”

선두 전투기들이 굳이 급강하하며 기관포를 쏴댔던 건, 중공군을 향한 자비가 아니었다.

진지 안에 있는 아군이 폭격에 휘말릴 것을 우려했을 뿐이다.

[독수리 편대, 폭탄 투하. 지옥으로 꺼져버려.]

뒤이은 전투기들은 도망가는 중공군들을 향해 친히 무겁게 들고 온 폭탄을 모조리 땅으로 던졌다.

눈과 얼음이 점령한 산비탈, 능선, 협곡 할 것 없이 폭탄이 떨어지며 화마를 만들어냈다.

화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꺼졌지만, 그 짧은 새 많은 것을 집어삼킨 그을음을 남겼다.

“임 중령! 괜찮은가? 정신 차려봐, 정신.”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가자, 문기준 대령이 임부택 중령을 찾아 뺨을 두들겼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눈 감으면 안 돼! 지금 눈감으면 꼼짝없이 얼어 죽는다고! 이걸 여태 뭐 한다고···”

임부택 중령의 왼손에는 탄창이 들려있었다.

쥐고 있는 탄창을 손에서 빼내려 했지만, 손과 탄창이 붙어버렸는지 잘 떨어지지 않았다.

행여 힘을 더 줬다간 손가락이 부러질까, 품 안에 넣어뒀던 핫팩을 전부 꺼내 그의 손을 덮었다.

그야말로 최선이었다.

“죽지 마··· 죽지 말라고! 어? 살아남기만 하면 자네가 받을 훈장이 몇 갠데···”

우스꽝스럽지만 당장 생각나는 영예는 훈장이었다.

“···아직 안 죽었습니다. 저 훈장 받습니까?”

“야 이···”

수차례 선회비행을 통해 폭격을 마친 폭격기들이 작별 인사라도 하는 듯 배면 비행을 하며 기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옵니다! 본대가 오고 있습니다!”

실로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지난밤, 그토록 힘겹게 지켜낸 유담리의 중요성을 증명하듯, 전차와 차량 뒤로 6사단과 신속대응사단의 본대가 전진해왔다.

“문기준 대령님, 제가 할 이야기가 정말 많은데··· 다시 만나면 그때 말하겠습니다.”

장진호 동쪽위로 미 해군 소속 커세어, 헬캣 전투기가 더 할 일은 없는지 서성거렸다.

동쪽에서의 전투도 어느덧 마무리된 모양이다.

하늘을 바라보던 임부택 중령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

2군단 사령부. 고토리.

고토리 역시 중공군의 공세를 버텨냈다.

다른 곳보다 비전투 병력이 많았지만, 김종오 군단장이 미리 대비를 해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종오 군단장의 지시 아래 만들어진 임시 활주로를 통해 수송기 여러 대가 고토리에 착륙했다.

“춘천 방어만큼이나··· 어쩌면 춘천 방어보다 더 힘든 전투였네. 이 준장 자네가 선뜻 나서지 않았다면 2군단은 지금쯤 눈 아래 묻혀있겠지.”

“아닙니다. 2군단 전체의 용맹이 대단했을 뿐, 조금 거든 것뿐입니다.”

악수를 청해오는 김종오 군단장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정확한 집계는 아니지만 대략 중공군 7만 명 이상, 국군 5000명 이상이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국군은 그나마 덜했지만, 중공군은 추위로 인해 동사한 인원이 포격이나 총탄에 의해 사망한 인원과 견줘야 할 만큼이나 많았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 매서운 추위.

인간과 자연 모두를 상대해야 했던 힘겨운 전투였다.

“김홍일 총참모장님과 워커 사령관이 곧 도착하실 겁니다.”

“안이나 밖이나 별 차이는 없네만, 일단 안으로 들게.”

한미 양측을 대표하는 장성들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에 김종오 군단장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홍일 총참모장과 워커 중장이 도착했다.

“다들 이 추운 날씨에 욕봤네. 고생들 했어. 몸들은 괜찮은가?”

“한국군의 전투력과 강한 정신력에 깜짝 놀랐네. 뒤늦게 전선에 합류한 미 해병 1사단에서도 죽는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기습을 당했던 한국군은 오죽했을까 싶네.”

두 사람 모두 국군의 노고를 잘 알고 있었다.

하기야 직접 전투를 지휘하지 않았더라도, 전투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전후 처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장진호에서의 전투는 많은 깨달음과 교훈을 남겼다.

또한, 그만큼 많은 것을 앗아갔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야. 그 어떤 말이건 안될 것 있겠나.”

나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많은 것을 잃지 않도록, 얻은 깨달음과 교훈을 통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말 한마디로 그 시발점을 끊었다.

“말 그대로 모두가 죽기 살기로 싸워야 했습니다. 장진호에서의 전투를 통해 국군과 연합군의 취약했던 부분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전투에서 연이은 승리는 은연중에 자만을 불러왔다.

자만은 또 다른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수차례 갈려 나간 중공군이 다시 낭림산맥을 타고 은밀하게 들어와 기습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고, 추위로 인한 통신 두절 또한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전투 중 야간 피아식별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문제를 비롯해 다른 문제점 또한 차차 해결해 가야 할 과제로 남았습니다.”

“음··· 맞네. 강을 넘어 국경에 들어서게 되면 앞으로 이런 문제가 이곳저곳에서 생겨나겠지. 나도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상부에 강력하게 건의하도록 하겠네.”

곧바로 수긍하는 걸 보니, 워커 중장 역시 확실히 느낀 바가 있는 모양이다.

아무렴 나로 인해 전쟁의 판도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워커힐이라는 호텔 이름만을 남기고 돌아가셨을 양반인데.

잘해야지.

어느 정도 장진호 정리가 마무리되고 중공 국경을 넘어 영토를 수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에겐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숭고한 희생을 줄이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니까.

“다른 것보다··· 야간 식별이나 통신에 관련된 문제는 군용 장비의 성능이 아직 야전 전투에서 요구하는 요구치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크기에 걱정이 되긴 하는군.”

맞는 말이다.

문제점을 해결해줄 좋은 성능의 장비만 있으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웬만한 문제들은 다 해결된다.

“문제를 발견했으니, 그러한 부분들은 각국이 필요한 장비를 개발하는 방법뿐일 것입니다.”

그게 말만 하면 바로 되는 문제냐고?

아니, 당연히 아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장에서 사용되는 장비들은 충분한 신뢰도를 쌓기 위해 엄청난 개발비용과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내가 만들면 좀 다르고.’

줄 서세요. 줄.

돈을 가져오면 개발 시간과 비용을 줄여드릴 테니까.

***

찰칵.

격려를 가장한 회의를 마친 뒤 막사에서 나오자마자 셔터음이 들려왔다.

“오··· 역시 여기 다 모여계셨군요?”

찰칵.

그들은 모든 사건 사고가 벌어지는 장소엔 늘 자리 한다.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도 예외는 아니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서 나온 마거릿 히긴스라고 합니다. 혹시 잠깐만 시간 내주실 분 계신가요?”

짧은 단발에 자연스레 구부러진 머리, 작은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들어찬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였다.

뛰어난 미모와는 별개로 종군기자들도 꺼리는 위험한 지역을 취재하며 부대에 별명을 지어주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국군 해병대가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 불리게 된 것도 그녀가 지어준 별명 때문이었다.

‘아니, 근데 어떻게 벌써 들어 온 거지?’

인터뷰 요청에 옆에 있던 워커 중장이 슬그머니 뒤로 빠지며 나를 앞으로 밀어낸 뒤, 귓속말을 속삭였다.

“사실 내가 데려왔네.”

“예?”

“맥아더 사령관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모양이야. 난들 데려오고 싶어서 데려왔겠나? 나는 인터뷰 같은 건 딱 질색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네와의 인터뷰를 원한다고 전해달라더군. 그럼 잘해보게.”

잘해보라니, 대체 뭘?

“여기 한국군 신속대응사단장 이강산 준장의 시간이 잠깐 빈다고 하네요. 바쁜 사람이니 짧게 부탁드립니다.”

잘해보라는 게 인터뷰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이럴 때 짬 맞았다는 표현이 참 적절하지 싶다.

“어머 정말요?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미끄러집니다. 조심··· 어이구. 참.”

바닥이 빙판이라는 걸 까먹었는지, 신이나 달려오던 마거릿 히긴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는 괜··· 괜찮아요. 음··· 뭐부터 시작할까. 아! 이게 좋겠네요. 그간 전투에서 힘들었던 점, 아니면 특히 이번 전투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어떤 게 있을까요?”

그녀가 속한 트리뷴이 헤럴드지를 합병해 창간한 뉴욕 헤럴드 트리뷴은 온건한 공화당의 정책을 지지하는 축에 속한 꽤 유명한 잡지사다.

적절한 인터뷰는 공산권의 침략으로 인한 참상을 알리는데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음··· 힘든 점은 모두에게 물어도 비슷한 대답을 할 테고, 마무리를 빨리하려면 뭐라고 하지?’

처리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인터뷰에 길게 응할 시간은 없었다.

질문에 대답함과 동시에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지난 과거를 잊지 않고 그리워하며.

눈앞에 놓인 현재는 비극이지만 이겨낼 것이고.

두렵지 않은 미래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쯤으로 마무리 할까?

땅을 보며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인터뷰를 빨리 끝내기 위한 구상에 돌입했다.

“풉.”

마거릿 히긴스 기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십니까?”

“말로만 듣던 이강산 준장님께서 이렇게 유머러스하고 재치있을 줄은 몰랐어요. 이건 별책이나 부록에 작게 내보낼 테니 걱정말고 말씀하세요. 안 그래도 요즘 독자들은 능력과 유머를 고루 갖춘 사람을 좋아한답니다.”

“무슨 말씀을···”

“제가 여자라고 말을 가리거나 수줍어하실 필요는 없어요. 전 기자니까요.”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만···”

뭔가 단단히 착각한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뭘 착각했는지 모르겠다.

“에이, 시선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럼 충분히 이해했으니 제가 한 문장으로 축약해 볼까요? 잠시···”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하더니.

“좋아. 이게 좋을 것 같아요. 추운 겨울 전투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15cm나 껴입은 옷 안에서 내 그곳을 꺼내는 일이었다.”

예?

생각하려고 바닥을 봤을 뿐인데.

아무래도 과거 그녀와 장진호에서 인터뷰했던 해병대원도 이렇게 당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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