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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146화 (146/149)

146화. 무력 시위(1)

잘 굴러가기만 했던 톱니바퀴 중 하나가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이걸 뭐라 해야 할까.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제도 안에서 숨죽이며 살아온 여성들과 눈물 한 방울로 모든 일을 만사형통으로 해결해버리는 여성들 모두를 봐온 나로선 주춤거릴 수밖에.

“사단장님?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친밀감이 취재에 많은 도움이 되다 보니 농담이 지나쳤던 모양이에요.”

마거릿 히긴스 기자가 양손을 모아 사과의 뜻을 전하며 어색해진 분위기를 전환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번 장진호 최전방에서 직접 병력을 지휘한 문기준 대령이 인터뷰하기엔 더 적절한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원하신다면 불러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녀의 빼어난 미모에 더해 활달하고 털털한 성격은 남자가 대다수인 군인들 사이에서 스스럼없이 살아남는데 좋은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오죽 거기에 빠져드는 군인이 많았으면 들어선 안 될 기밀까지 들었다는 죄로 전쟁터에서 추방된 적도 있을 정도니까.

“아···네. 알겠습니다. 그 대신 다음에 만나면 인터뷰 시간을 좀 더 내주시기에요?”

“알겠습니다.”

다소 딱딱한 말투에 마거릿 히긴스 기자가 아쉽다는 듯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그런 그녀를 뒤로한 채 조용히 문기준 대령에게 다가갔다.

“2연대장. 저기 있는 기자가 자네와 인터뷰를 좀 하고 싶다는군.”

“저 말씀입니까?”

“그래. 꼭 자네가 아니면 안 된다던데?”

문기준 대령이 은근슬쩍 고개를 내밀어 마거릿 히긴스 기자를 확인한 뒤.

“오··· 잠깐, 지금 모양새가···”

감탄을 내뱉었다.

이 와중에 철모를 벗고 머리를 쓱쓱 넘기는 것 하며, 손바닥에 침을 발라 옆머리와 앞머리를 정리정돈하는 걸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법했다.

“충성! 사단장님.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게.”

나도 그렇고, 문기준 대령도 그렇고.

이성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신속대응사단 지휘관은 미혼이 많았다.

‘눈빛을 보니 벌써 애는 몇이나 낳을지 고민하는 것 같던데··· 상상은 죄가 아니니까.’

상상은 자유다.

그 뒤에 따라올 허탈과 허무는 상상한 자의 몫이고.

마거릿 히긴스 기자는 남자친구가 있다.

별일이 없다면, 앞날이 창창한 미 공군 장교인 윌리엄 에반스와 곧 결혼할 예정이고, 즉 약혼은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유부녀가 될 예비 유부녀라는 소리다.

“문기준 대령··· 잘 이겨내야 해.”

뭐가 그리 좋은지, 인터뷰 내내 히죽히죽 웃는 문기준 대령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혹시 모르지?

역사도 바뀌는 마당에, 결혼 상대 쯤이야.

언제 바뀌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

중공 베이징.

한번 퍼져나간 붉은 물결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홍위병들은 자신들의 앞길을 막는 걸림돌을 가차 없이 파괴하고 부숴나갔다.

종교, 지주, 지식인에 대해 폭발한 분노는 곧 광기로 번졌고, 개인의 광기는 곧 집단광기로 번져나갔다.

마오쩌둥 정권이 청년들로 빚어 만들어낸 괴물이었다.

“동지, 린뱌오 총관과 쑹쓰룬이 장진에서 패한 뒤 후퇴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젠 정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현 상황을 반전시킬 회심의 일격이 될 줄 알았던 린뱌오 총관이 장진호 전투에서 패배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수준을 넘어 발등에 불이 붙은 것이다.

“시간? 그래서. 그 잘난 당 위원들도, 자네도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데 나를 닦달한다고 될 일인가? 그보다 홍위병. 홍위병들은 잘하고 있는가?”

“길에 보이는 선생, 교수, 예술가, 학자를 가리지 않고 길거리에서 두들겨 패는 것은 기본, 정부 기관을 쳐들어가거나 심한 경우 강간, 살인, 약탈과 같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동지! 지금이라도 정상적인 대책을···”

마오쩌둥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홍위병들은 물불 가리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은 부르주아적이기에 음식점 사장을 두들겨 패 속없는 찐빵이나 죽만 쑤도록 강요했고, 심지어는 개와 고양이 같은 교감이 가능한 짐승들은 부르주아들의 짐승이라며 학살을 일삼았다.

사람도 죽이는 마당에, 이런 것쯤은 홍위병에게 아무런 죄책감을 주지 못 했다.

“새파랗게 어린 청년들도 시키는 일은 이리 잘 처리하는데, 그간 높은 자리에 앉아 배때기만 불려온 우리 동무들은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으니··· 주석으로서 참으로 속상할 따름이오.”

타들어 가는 저우언라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오쩌둥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지! 지금 나라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패망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도 어찌···”

저우언라이가 그간 꾹 참아왔던 설움을 터트렸다.

애초에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도, 북조선을 도우라 중공의 등을 떠민 소련의 스탈린도 역겹기 그지없었지만, 자신의 평생 벗이자 동반자였던 마오쩌둥이 보이는 행태에 치가 떨렸다.

더 역겨운 건, 이렇게 말한 자신조차 달라질 게 없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것.

저우언라이를 등지고 있던 마오쩌둥이 초연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저우언라이. 동무는 지금까지 뭘 했지?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될 때까지 뭘 했냐는 말이야!”

마오쩌둥의 호통에 저우언라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기분이 더럽고, 모욕적이며 치욕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철석같이 믿었던 군 전력이 박살 나자, 아무리 머리를 맞댄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으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를 수도 없이 생각해봤지만, 늘 나오는 결론은 같았다.

“소련이 우릴 버렸습니다.”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저우언라이가 상상만 해왔던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공군과 군수물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직접 갔을 때도, 스탈린 동지는 이런저런 핑계만 대며 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태껏 동지라고 생각했던 소련이, 먼저 우리 중공을 배반한 것입니다. 동지, 저에게 방법을 물으셨습니까?”

애매한 분노를 가진 사람은 광기에 물들어 보이지만, 넘어설 곳 없이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오른 사람은 오히려 초연하고 태연해 보인다.

지금의 저우언라이가 그러했다.

“그래. 누구 하나 방법, 그 방법을 가져온 동무하나가 없지 않았나.”

“소련이 우리 중공을 이용해 득을 봤으니, 우리도 소련을 이용해 득을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낸 득을 저들에게 넘겨준 뒤에 훗날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들이··· 어렵게 이뤄낸 중공을 통째로 집어삼킬지도 모릅니다.”

스탈린에게 보낸 지원 요청 서신은 모두 기계적이고 상투적인 답변으로만 돌아올 뿐이었다.

저우언라이의 말은 소련이 중공을 먼저 등졌으니, 중공 또한 소련을 등지고 그를 통해 얻어지는 무언가를 연합군에 넘기자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이 광기를 잊고 생각에 잠기자, 저우언라이가 쉴새 없이 말을 이었다.

“훗날을 도모할 시간을 벌기 위해선, 지금 저들의 중심이 되는 미국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미국을 잠잠하게 만들만한 것이라··· 뭘 내주면 미국을 적당한 곳에서 한발 물러서게 할 수 말인가?”

후···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이어온 저우언라이가 호흡을 깊게 마신 뒤 내뱉었다.

“소련이 보유한 핵과 관련된 기밀들을 입수해 협상에 나선다면, 저들도 충분히 협상에 응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미 정보국을 포함한 자유 진영의 각 정보국은 소련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막대한 자원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있다.

핵 관련 기밀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특급 중에서도 특급 기밀.

아무리 중공이라 해도 쉽게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공식적으로 중공은 아직 노골적으로 소련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적이 없고, 군사교류가 끊어지진 않았다는 사실일 터.

“동무, 핵 기밀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려고 지금까지···”

“동지는 이 상황에 허무맹랑한 소리를 꺼내놓을 만큼 제가 무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우언라이는 중공 내에서 능력 있는 편에 속했다.

그러니 외무부 장관을 겸하는 총리라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아니, 그렇다는 건 아닐세.”

“소련에 일을 도와줄 사람이 있습니다. 다만,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려면 제가 직접 소련에 가야만 합니다.”

냉전 중인 미국과 소련은 서로 많은 첩자를 내부에 심었다.

그들은 자신의 본래 신분과 임무를 숨긴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국인인 척, 소련인인 척하며 살아가고 있다.

양측에서 심어진 첩자 모두 아직 핵 기밀에는 닿지 못했지만.

저우언라이는 확신에 차 있었다.

“동지께서는 지금 당장 국경 일대에 거주하는 인민들에게 피난하라는 지시를 내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제가 소련에 가서 반드시··· 반드시 핵 관련 기밀을 입수해 오겠습니다.”

평생 우방국일 것만 같던 소련과 중공의 사이 역시,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

소련 모스크바. 서기국.

린뱌오가 패했다는 소식은 스탈린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의 심기 역시 썩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현상 유지··· 딱 현상 유지만 하면 되는 것을, 그 많은 인민을 갈아 넣고도 그게 그리 어렵단 말인가? 그 정도로 무능력한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군.”

스탈린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자리에 있는 의원 그 누구도 숨을 크게 쉬지 못했다.

“미국놈들이 감히 소련을 넘보진 못하겠지만, 만약에 대비해 중공과 접경지역에 기갑부대를 비롯한 병력을 추가 배치하라 지시해뒀습니다.”

선을 넘으면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부족해. 고작 탱크 몇 대 더 가져다 놓는 것으로는 부족하단 말이지···”

공식적인 의논이나 발표는 없었지만, 스탈린 서기장이 무너져 내리는 중공을 도울 생각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동유럽 국가들이 언제 자신들이 중공 신세가 될지 모른다고 옹알댔다.

그렇다 해서 중공을 살리기 위해 투입되어야 할 군사력, 재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인 지경에 이르렀기에 잠정적 포기를 선택한 것이다.

접경지역에 병력을 추가 배치함으로서 옹알이를 잠재우고자 했다.

“쿠르차토프 동무는 모스크바에 도착했나?”

“조금 있으면 쿠르차토프 동무가 탄 열차가 모스크바에 도착할 것입니다.”

이고리 쿠르차토프.

소련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핵물리학자였다.

소련 최초의 플로토늄 내폭형 핵 실험인 RDS-1을 성공적으로 진행 시킨 핵심 인물이자, 스탈린의 고민을 덜어줄 인물이기도 했다.

“열차가 모스크바에 멈춰서는 즉시, 쿠르차토프 동무를 내 눈앞에 데려오게.”

재래식 전력으로는 다소 부족한 무력시위.

스탈린은 RDS-2 실험을 서둘러 진행해 미국을 비롯해 불만을 가진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할 생각이었다.

그 실험이 가져올 파장은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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