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무력 시위(3)
“왜 하필 모스크바로 나를 불러낸 거지? 저기 한적한 시골 동네에서 만났어도 괜찮았을 텐데.”
“그야, 지금 동무가 있는 곳보다야 차라리 모스크바가 안전하기 때문 아니겠소. 내무 인민 위원 놈들이라면 아직 이를 갈지 않소?”
“내 앞에서··· 그 이름은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내무인민위원부(NKVD).
현재는 국가보안부로 기능을 넘기고 1946년 해체되었지만, 존재하는 동안 치안과 관련된 거의 모든 업무를 맡았고 기소권까지 가진 완전한 검경 통합 부서였다.
무고한 시민 열 명이 처형될지라도, 한 명의 스파이를 놓쳐선 안 된다는 유명한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어록을 남긴 니콜라이 예조프 본인도 무고한 시민에 속해 처형되긴 했지만.
그림자 속에 숨은 남자는 NKVD라는 말만 들어도 아직 치가 떨리는 듯했다.
“오붓한 대화는 나중에 하고, 요청한 자료부터 넘겨주시게.”
저우언라이가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내밀었다.
상대방 역시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지만,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핵 실험 예상 일자에, 소련 핵 관련 기밀, 공군력에 대한 기밀까지. 내가 이걸 동무한테 넘겼다는 걸 알면 라브렌티 베리야 그놈이 아주 좋아 죽으려 하겠군. 약속은 꼭 지키게. 어차피 내가 넘겨준 정보의 신뢰도는 핵 실험 일자에 핵 실험을 하는지만 봐도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을 수 있을 테니.”
핵무기와 공군력은 소련, 그 어떤 다른 국가에 대입해보더라도 군사력의 핵심이다.
그가 가져온 기밀이 그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했다.
“고맙네. 주코프 동지. 설사 내가 소련 정보국에 잡힌들, 절대로 자네 이름은 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야.”
그림자의 정체는 게오르기 주코프.
저우언라이와는 만주와 몽골 일대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해 그가 소련군 57군단장으로 만주에 부임해왔을 때 우연히 연을 맺었다.
“동무가 약속을 지키기 전까진, 볼일이 없어야겠지. 여기 있네.”
주춤거리던 주코프가 서류를 꺼내 저우언라이에게 건넸다.
독소전쟁이 끝난 직후만 해도, 주코프는 이미 소련 영웅 칭호를 3번이나 수상한 유일한 3중 영웅이었다.
인민들은 그를 영웅으로 칭송했으며, 그를 위한 찬가를 만들기까지 하며 영웅으로 받들었다.
영원한 소련의 영웅, 명장으로서 명예를 누릴 것만 같았다.
자기과시가 지나쳤던 탓에 공식 석상에서 스탈린의 능력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고, NKVD가 그를 기소하기 전까지.
‘다행히도 때가 좋았어.’
주코프가 건넨 서류 봉투를 받아들자, 절대 풀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던 실타래의 끝부분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영웅으로 칭송받던 주코프는 후방 군관구 사령관으로 밀려난 찬밥신세나 다름없었다.
자신과 함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공군 원수 노비코프와 해군 원수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역시 스탈린의 의심, NKVD의 총수인 라브렌티 베리야의 화려한 혀 놀림에 놀아나 각각 징역 15년, 계급 강등의 불명예를 떠안았다.
소련군 원수였던 그리고리 쿨리크는 처형까지 되었으나, 그럴만한 놈이었으니 예외.
스탈린은 주코프의 참모장이었던 바실렙스키를 자주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군과 관련된 논의를 자주 했던 것에 반해 자신은 찾지도 않았으니, 스탈린과 라브렌티 베리야에 대한 배신감과 적대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이만 가보겠네. 몸조심하게. 주코프 동무.”
“동무가 지금 내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들키지나 말고 잘 가게.”
아무런 일도, 서로 간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뒤돌아섰다.
주코프는 기밀을 건네는 것으로 모스크바에서 할 일이 끝났지만, 저우언라이는 그렇지 않았다.
어쩌면 기밀을 확보한 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일.
이 기밀을 어디에 넘겨야 할지를 고민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생각해둔 곳이 있긴 했지만, 기밀을 넘기기 단 1초 전까지는 생각을 바꿀 기회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미국··· 남조선··· 둘 다 아니면 영국이나 서유럽 중에···”
여기까지 와버린 이상,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곧바로 미국이나 남조선에 넘긴다면,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피드백이 올 것이다.
틈만 나면 대영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영국이 기밀을 갖게 되면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미국을 살살 긁느라 시간을 허비할 게 불 보듯 뻔했다.
“동지, 열차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약속 장소를 지나치며 걷는 저우언라이 옆으로 수행원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미국, 남조선, 영국.
어차피 셋 다 적국일진데.
역시 어디에 넘기냐보다, 누구에게 넘기냐가 중요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해야겠군. 어? 자네. 언제부터 내 옆에 있었지?”
“그보다 열차 시간이···”
저우언라이가 발걸음을 서둘렀다.
***
한반도. 평양.
헬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평양은 생각보다 평온해 보였다.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내비치긴 했지만, 무자비한 폭격을 퍼부어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평양에서 배다른 형을 만날 수 있었다.
워낙 주변 시선이 따갑기에, 독대해서 우애를 나눌 시간이 그리 길진 않겠지만.
“이봐! 이강산 준장, 이게 얼마만 인가. 한반도가 겨울에 춥다더니, 정말 말도 아니군. 그간 잘 지냈나?”
평양이 춥다고?
진짜 추위를 못 느껴봐서 그렇지, 모쪼록 일본에서 배부르고 등 따듯하게 지낸 모양이다.
“며칠 전까지 오줌발도 얼어붙는 개마고원에 있었던 것만 빼고는, 잘 지냈습니다. 사령관님.”
“장진호 전투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 들었네. 고생 많았어.”
손은 어느새 올렸는지, 맥아더 사령관이 오른쪽 어깨를 주물러줬다.
고생, 더 고생, 또 고생.
하루라도 빨리 고생 끝에 낙이 와야 할 텐데, 어째 산 넘어 더 높은 산이다.
“전방에서 진격을 멈춘 탓에 평소보다 주어진 시간이 많으니, 남은 대화는 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따듯하게 불을 피워뒀습니다.”
따듯하다는 말을 들은 맥아더 사령관이 반색하며 안으로 성큼 다리를 찢었다.
필리핀과 일본에 오래 머문 탓인지, 그에겐 평양의 추위도 개마고원의 추위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사령관님, 미국 수뇌부의 반응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오늘은 잡설을 빼기로 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미 잡은 물고기라 봐도 무방하다.
뭐, 이 자리를 이끌 확실한 패를 쥐고 있기도 하고.
“뭣 모르고 펜대나 굴리는 양반들의 반응이야, 늘 그렇듯 가지각색이네. 소련이 더 날뛰기 전에 전쟁을 당장 끝내야 한다는 이도 있고, 일각에선 이참에 소련까지 짖지 못하게 몽둥이를 휘둘러야 한다는 이도 있지. 나머지는 애매한 그 중간 어디쯤? 일 거네.”
미국 수뇌부라 해서 여느 나라들과 별반 다를 건 없다.
전쟁을 당장 끝낸다?
이건 인류 역사상 가장 멍청하고 무능한 종전 사례가 될 것이 분명하고.
몽둥이로 소련을 팬다?
모스크바와 크렘린에 핵을 퍼부어 통째로 날려버리지 않는 한 3차대전을 해보자는 말이나 다름없다.
일부는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려있고, 나머지는 자신에게 맞는 입맛에 따라 조금씩 치우치는 게 별다를 것 없다는 뜻이다.
“핵 기밀을 소련에 넘긴 스파이들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골치 썩을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스파이? 그건 누구에게 들었지? 대중들에게 공개된 적 없을 텐데.”
아차.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스파이들의 혐의는 대중의 혼란을 막기 위해 다소 뭉뚱그려져 알려진다.
정확히 이놈이 원자탄 설계도를 빼돌렸고, 이놈이 원자로 기술을 배워 소련으로 튀었다는 등 세부적 내용은 수십 년 뒤에나 공개될 것이고.
“누구에게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앞뒤 상황만 맞춰보면 뻔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세계 최고의 자본력과 기술력, 뛰어난 과학자들을 보유한 미국도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낸 걸작을 고작 소련이 무슨 수로 이토록 빠르게 만들어냈을지를 생각하면야··· 기술이나 설계도를 훔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흠··· 그렇군.”
인정한다는 듯, 맥아더 사령관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제는 누가 같은 질문을 한다면··· 맥아더 사령관님께 들었다고 해도 되겠습니까?”
“자네가 그렇게 말하고 다니겠다면야 어쩔 수 없지. 본국에 돌아가는 대로 사령관을 그만두고 나서 지낼 주말농장이나 알아봐야겠군.”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들어온 맥아더의 예리했던 질문을, 능청스러움 하나로 빗겨냈다.
“핵 실험 징후 외에, 정보국에선 별 소득이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은밀한 사이인데.
이 정도 질문이 오가는 건 대수도 아니었다.
“모든 정보가 내게 공유되는 것은 아니다 보니,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정보도 있겠지만 연합군을 제자리에 멈춰 세운 것을 보면···”
미 정보국이 알아낸 추가 정보는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들이 소련 정보국보다 무능해서라기보다, 일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인권을 중요시하는 민주주의 국가 미국에선 누가 스파이로 의심되면 그를 입증할 증거를 제시해 재판대에 올려야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선 그딴 절차 따위?
절차는 사치다. 사치.
스파이로 의심되면 당장 잡아다 굴라그로 보내버리거나, 이마에 총알을 박아버리니 스파이 노릇을 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어린아이가 보더라도 소련에 잠입한 미국 스파이가 더 극한직업이라고 생각할걸?
“소련이 가진 핵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모두가 핵폭탄이 가진 위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 진전이 쉽지 않은 게 당연하다고 봐야 하는 게 맞긴 합니다.”
나는 저들이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만한 패를 쥐고 있지만, 함부로 보여줄 순 없었다.
그게 설령 완벽하게 세뇌된 맥아더 사령관일지라도.
내가 가진 패를 몇 개만 보여줘도, 다시 연합군이 중공을 향해 나아갈 원동력을 얻기엔 충분할 것이다.
‘그보다 중공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더 중요해.’
중공은 대륙이라 불릴 만큼 큰 땅덩어리와 동시에 엄청난 인구수를 보유하고 있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한 백만 정도는 줄어들었겠지만, 전체 인구로 보면 줄어든 인구는 티끌에 불과하다.
중공 영토를 점령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중공을 어디까지 점령할지와 점령지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처리 문제.
마음에 들진 않지만, 히틀러가 유대인 씨를 말리기 위해 모든 유대인을 학살했듯 모조리 하늘나라로 보내버릴 순 없으니까.
영토를 점령할 능력이 있더라도, 그 점령한 영토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선까지만 영토를 점령해야 한다.
애초에 사이좋게 교화? 꿈도 꾸지 말아야지.
그딴 게 먹히는 종자들이 아니니까.
일단 이 자리에서 해야 하는 건, 내가 가진 패가 얼마나 좋은 패인지 맛만 보여주는 것이다.
“사령관님.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우연히 제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소련의 핵 실험은 이틀 뒤. 카자흐스탄에서 진행된다는 정보입니다.”
이틀 뒤, 맥아더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