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무력시위(4)
사람들은 확률에 쉽게 열광한다.
이 시대의 복권은 로또 같은 복권의 개념이 아닌 후원권의 느낌이긴 하지만, 대다수 국민이 1등 당첨확률 1/8,145,060.
퍼센트로는 0.0000122773804%라는 희박한 확률에 빠져들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고된 일과의 끝, 매주 토요일마다 찾아오는 로또 방송을 기다리던 사람들보다.
번호 하나하나가 나올 때 희비가 엇갈리던 사람들 보다.
내가 말한 정보의 진위가 가려지는 이틀은, 평소 맥아더 사령관의 이틀보다 훨씬 길었을 것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진도 3.8 규모의 지진 발생. 인위적인 지진파로 보아 소련의 핵 실험 가능성 농후.]
정확히 이틀 뒤.
소련은 카자흐스탄 세미팔라틴스크 핵 실험장에서 RDS-2를 기반으로 2차 핵 실험을 강행하며 무력을 과시했다.
이 소식은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주 강하게.
***
미국 NSC. 국가안보회의.
소련이 핵 실험을 강행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NSC를 소집했다.
그간 트루먼 행정부는 정책 분석이나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보다 국무부, 국방부를 대통령이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것을 주된 목적으로 NSC를 이용해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자리에는 국가 안보법에 따른 트루먼 대통령과 바클리 부통령, 애치슨 국무장관과 마셜 국방장관이 참석했다.
대통령의 권한으로 차관이나 참모들을 동석시킬 수 있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다른 이들의 참석은 허용하지 않았다.
“지금 시점에 소련이 핵 실험을 강행한 이유야 여럿이 있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미국에 대한 도발이자, 민주주의 국가들을 향한 도발이라고.”
트루먼은 소련이 첫 핵 실험에 성공했을 때 소집된 국가안보회의에서는 다소 어안이 벙벙하고 놀란 표정이었다.
지금은 내뱉는 첫마디, 비장한 표정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국방장관, 어찌 생각하시오.”
“우선 소련의 핵 문제와 관련해 대통령님께서 고민하셔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저를 비롯한 다른 이의 입장이나 의사가 아니라 국가의 이익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마셜 국방장관이 회의 방향을 제시한 뒤,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소련이 불을 지핀 것은 맞지만, 지금의 우리는 반드시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소련이 다시는 함부로 불을 지피지 못하도록 맞불을 놓는 방법도 있겠지만, 때로는 내키지 않아도 한 발짝 물러서야 할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님께서 어떤 길을 택하시느냐에 따라 전 세계가 요동칠 테니 말입니다.”
“저 또한 국방장관 말에 동의합니다.”
바클리 부통령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의 부통령은 어떠한 권한이나 결정권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트루먼 대통령이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번 회의 또한, 트루먼이 감정에 사로잡힌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소련이 재래식 무기만 보유하고 있다면 화끈하게 맞불을 놓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핵을 보유한 소련에 맞불을 놓기 위해선 말씀드렸다시피 소련 핵에 대한 확실하고 정확한 데이터가 필요합니다만, 아직 부족한 실정입니다.”
틀린 말이 없었기에, 회의 방향은 조금씩 한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보고서에 올라가 있지 않은 내용이긴 한데···”
“말해보게.”
애치슨 국무장관이 옆에 놓인 서류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트루먼에게 건넸다.
“사실 맥아더 사령관이 핵 실험 실행일로 추정되는 일자를 이틀 전 보고해왔습니다만, 근거가 아예 없어 보고드리진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땐 보고할 필요가 없었겠지. 됐네.”
트루먼 대통령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넘어갔다.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정보까지 전부 보고한다면, 백악관은 지나다닐 통로까지 서류 더미에 묻혀 버릴 것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핵 실험이 임박한 징후가 보였다지만, 우리 정보국은 핵 실험까지 최소 일주일은 걸리리라고 판단했네. 맥아더 사령관이 어떻게 정확한 날짜를 맞출 수 있었지?”
의문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오로지 소련과 관련된 정보에만 매달리고 있는 정보국보다 어떻게 도쿄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이 더 정확한 예측을 해냈는지.
“정확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맥아더 사령관은 지금 한반도에 있습니다.”
그에 대한 애치슨 국무장관의 답은 모호하고, 의미심장했다.
“역시··· 그렇군.”
“아···”
재밌는 건, 모호하고 의미심장한 답에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수긍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셜.”
“예. 대통령님.”
트루먼 대통령이 직책이 아닌 마셜 장관의 이름을 불렀다.
가끔, 아주 가끔 진지할 때만 나오는 그만의 습관이었다.
“미국을 위해 새로운 두 가지 계획을 세워줄 수 있겠나?”
“결심이 서셨다면, 대통령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만 저에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것을 반드시 수행해 낼 것입니다.”
말투에서 당당함이 느껴졌다.
그 당당함은 은연중에, 조용히 모두에게 스며 들어갔다.
마셜은 승리의 설계자이자 뛰어난 행정가로 불리며 군사 지식마저 풍부했기에, 트루먼 대통령은 그런 마셜 국방장관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는 마셜 플랜을 동북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계획으로 확장 시키는 것. 두 번째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소련과 공산세력들에 우리의 강력한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네.”
“대통령님···”
이미 타고 있는 불보다 더 뜨거운 맞불을 놓겠다는 의미였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바클리 부통령이 중심을 잡으려 애쓸 차례였다.
“좀 전에 말했듯, 확실한 근거가 뒷받침되어야만···”
“근거가 필요하다는 건 매우 잘 알고 있네. 어디까지나 계획 아니겠나. 그래서 말인데 국무장관, 자네는 어떻게든 이강산 그자를 포섭하게. 한국 정부를 설득하든, 그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줘서라도 말이야. 이쯤 되면 알아야 하지 않겠나. 애치슨 자네가 건넨 보고서에 적힌 정보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범상치 않은 것을 떠나, 이제는 완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편, 같은 진영에 서 있다는 게 다행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자, 그럼 서두르도록 하지. 모두에게 중요한 할 일이 생겼으니 말이야.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회의는 기울어지다 못해 한쪽이 바닥에 닿고 나서야 끝났다.
모두의 어깨에 한가득 올려진 책임의 무게는 덤이었다.
회의를 마친 마셜 국방장관이 회의장에서 나오자마자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나일세. 지금 바로 폭격기 사령부 연결해주게.”
승리의 설계를 위해서.
***
중공. 베이징.
모든 게 개판 5분 전, 아니 개판이었다.
그럼 에도 마오쩌둥은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다.
“동지, 다녀왔습니다.”
저우언라이는 무사히 베이징에 도착했다.
목숨이 얼마나 이어질진 모르겠지만, 모스크바에서 무사히 베이징에 도착한 걸 보면 살아야 할 명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아직 까지는.
“수고 많았네. 간을 배 밖으로 꺼내놓고 다닌 것이나 다름없었을 텐데. 동무가 말한 계획대로 잘 흘러가겠는가?”
“이제 막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에 불과하니, 결과는 조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저우언라이는 거의 평생을 마오쩌둥 옆에서 함께했다.
그러다 보니 눈빛, 표정, 말투만으로도 그가 어떤 생각이나 기분인지 점쟁이보다 더 용하게 맞출 자신이 있었다.
“동지, 홍위병들은 그대로 놔두실 생각이신지··· 지금 해산시키지 않으면 장차 더 큰 골칫거리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으니, 개판인 내부를 정리하는 게 순서이자 순리였다.
“동무 눈에는 저들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가?”
“예?”
“동무는 모를 수도 있겠군. 오로지 나를 위해 나에게 반대되는 것들을 집어삼키는 붉은 물결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모르겠다.
마오쩌둥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기분이 어떤지.
“나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 끝에 대륙을 통일하면 적이 없을 줄 알았네. 그런데 아니더군. 섬 구석에 처박힌 장제스 놈과는 둘 중 하나가 죽기 전까지 그러려니 한다지만, 벗이라 생각했던 북조선, 소련도 지금 와서 보니 벗이 아니라 적이었더군.”
“하기야 이 중공 안에서도 나를 위해 갈아둔 날을 감춘 자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홍위병들은 확실한 내 편이거늘, 어찌 저들을 제지하겠는가. 그보다 저우언라이. 동무는 여전히 나의 벗인가?”
벗이냐는 질문에 저우언라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오쩌둥에 대한 동정심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동지···”
회의감.
지난날에 대한 회의감과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말해보게. 동무는 여전히 나의 벗이냐 물었네.”
저우언라이를 향해 재차 물어왔다.
회의감은 저우언라이의 눈빛을 흔들었다.
그다음으로는 억울함이 그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마오쩌둥은 어떤 곳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반대파를 힘으로 누르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신은 달랐다.
반대파를 설득하고 이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오쩌둥이 냉소적이었지만 자신은 냉철했으니까.
정반대에 가까운 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권력을 쥐며 하나가 되어왔다.
“동지. 아마도 저는 동지의 벗이었을 겁니다.”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마침내 붉어진 눈시울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회의감 때문도, 억울함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청렴결백하며, 그저 일신의 안녕과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다.
그런데 왜.
대체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저우언라이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지독한 위선자일 뿐이었다.’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막을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
한반도. 평양 어딘가.
“아니, 그러면 지금 제가 설계한 소총이 제식 소총으로서 부족하지만 억지로 선정해주시겠다. 이런 말씀이신 겁니까?”
“아니··· 당연히 그런 뜻이 아니고···”
평양이 춥다던 맥아더 사령관이 어째 식은땀을 줄줄 흘려댔다.
이젠 더워진 모양이다.
“설계자인 저는 그렇게 들립니다만.”
“아니, 아니라니까···”
아니라는 말을 몇 번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상했던 대로 이틀 전과 오늘의 맥아더가 짓는 표정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정말 위에서 저를 포섭하라는 명령이 내려온 것이 아닙니까? 만약 나중에 다른 말이 나온다면···”
“후··· 자네 원래 이렇게 고집이··· 그래. 자네 말이 맞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운 빼기 전에 말할 걸 그랬군.”
뻔하지.
정확한 날에 소련이 핵 실험을 했고, 그 즉시 미국은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했을 것이고?
나를 통해 정보를 얻고 싶겠지.
그보다 당연히 선정되어야 할 제식 소총 사업으로 선심 쓴다는 듯한 태도가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다.
“사령관님, 그럼 이제 그 부분과는 별개로 하는 겁니다?”
“알겠네. 알겠어. 내 꼭 못 박아 주겠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그럼 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