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
1화. 눈 떠보니 아기가 된 상황에 대하여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 반짝이는 금색의 머리카락이 마치 흘러내리는 꿀 같았다.
그때 조각같이 아름다운 미남자의 입술에서 음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얼굴을 굳혔다.
뒤에 나올 말을 안다.
‘오늘 이 자리에 와주신 여러분께…….’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이 장면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되새겼는지 모른다.
“오늘 이 자리에 와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익숙한 대사를 내뱉는 남자의 모습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내게는 단 한 번도 향한 적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와 눈빛이 좌중을 훑었다.
한 번이라도, 별 의미 없이도 스칠 수 있는 시선이었는데, 그는 끝내 나를 보지 않았다.
정말 몰랐을까?
그의 앞에서만 한없이 바보처럼 긴장하고 굳어버렸던 내가 조금은 안쓰럽진 않았을까?
끝의 끝까지 그에게 나는 엑스트라일 뿐이었을까.
“오늘 이 자리를 빌려 한 가지 고백을 하고자 합니다.”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나 미련하게 붙잡고 있던 짝사랑인지.
저 남자의 정해진 운명을 알면서도 미련한 감정을 놓지 못했었다.
드디어 마음속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끈을 놓을 순간이다.
“나는 힐링턴 가의 영애께 청혼합니다.”
쿠웅.
돌덩이가 심장을 후려쳤다.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곳으로 갈라졌다.
한쪽은 기둥처럼 굳어 서 있는 나에게, 그리고 다른 한쪽은 누가 봐도 사랑스럽고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에게.
바짝 굳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나와 두 뺨에 복숭아 같은 홍조를 드리우며 행복하게 웃고 있는 소녀 중 누가 청혼을 받을 상대 같았을까.
곧 모두의 시선이 아름다운 여자애, 바로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로 흘러갔다.
거기까지였다.
내가 참을 수 있던 것은.
‘이제 그만하자.’
나는 풍성한 치맛자락을 잡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순간 소란스러운 기색이 일었으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돌아보지 않아.’
인파 속으로 파고들며 나는 그 연회장을 나왔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 <영애는 달콤하다>에서 남주가 여주에게 청혼하는 절정에서 나는 도망쳤다.
아무리 원작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라고 해도 나처럼 불쌍한 엑스트라라면 도망 정도는 쳐도 될 테니까.
그랬다. 내가 사랑한 남자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
내 동생은 이 소설 속 세계의 사랑 받는 여주인공이었고, 그는 바로 여주인공의 유리구두를 가져올 운명의 남주인공이다.
그 영광된 자리에 내 자리는 없었다.
‘이제 놓을 수 있겠어. 다 내려놓고…… 사라지자.’
과분한 욕심을 품은 것은 나였다.
그러니 엑스트라는 사라져야지.
*
난 꽤 운이 좋았다.
초보 사장님에게도 상냥한 마을 사람들을 만나, 가게를 연 지 한 달 만에 내 꽃집은 꽤 잘 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로 잘 나갔냐 하면 평민들의 삶에는 개미 똥구멍만큼이나 관심 없는 미엘르 제국 귀족 놈들에게 내 꽃집 이야기가 흘러갔을 정도로.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남자가 나를 찾아올 리가 없었겠지.
“……잘 지내셨어요?”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차마 볼 용기가 없어 도망쳤지만 마주한 이상 어쩔 수 없다.
그는 내 여동생의 남편일 테니, 내게도 가족이었다.
하지만 저 남자를 두 눈 멀쩡히 뜨고 제부라고 부를 자신은 없는데…….
그런데.
“내가 잘 지냈을 것 같습니까?”
응?
어디서 짐승 우는 소리가 나지.
‘뭐, 뭐야?’
나는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의 박력에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나무 쟁반을 놓치고 말았다.
땡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것이 핑그르르 돌다가 멈췄다.
눈을 끔뻑거리며 그것을 바라보다가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남자를 올려보았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훨씬 큰 남자가 내게 바짝 붙어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저기요?’
제국을 떠난 지 겨우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람이 왜 이렇게 변한 것 같지.
착각인가?
“내가, 내가 그렇게 싫었습니까?”
방금 처연하게 떨리는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아, 나 낮술 마셨었나?
이거 꿈이야?
환상인 거야?
“네?”
“내 청혼을 그렇게 짓밟고 기껏 도망간 곳이 여기입니까.”
하마터면 남자의 뽀얀 뺨을 꼬집을 뻔했다.
환상 주제에 뭘 이렇게 생생하게 말하고 그래.
다 내려놓은 짝사랑에 새삼 심장 벌렁거리게.
희미하게 웃어버렸는데 그게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어떻게 웃을 수 있습니까.”
선명했던 보라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핏발 선 흰자위가 점점 촉촉…….
‘뭐? 촉촉?’
핏발 선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리 봐도 눈물 같았다.
설마 울어? 왜?
아내의 언니가 사라진 게 그렇게 충격이었던가?
그리고 청혼을 짓밟고 도망갔다니,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내 동생이 도망갔어?
“잠깐만요. 청혼이요? 지금 무슨 소리를…….”
“또 도망가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이 낯설었다.
어느새 나는 뒷걸음질도 가로막힌 차가운 벽에 등이 닿은 상태였다.
그가 내게 더 바짝 다가왔다.
이제는 숨결까지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절로 숨이 가빠졌다.
“나만 보게 할 겁니다.”
지금 뭐라고요?
“내가 당신 없인 숨 쉴 수 없듯 그렇게 만들 거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한 가지는 알겠다.
얘가 미쳤구나.
돌았구나?
“그거……. 지금 저한테 하는 소리세요?”
나는 냉정한 이성을 찾고자 했다.
미친놈이 눈앞에 있다고 같이 돌아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미친놈과 얘기가 통할 리가 없었다.
“그날. 당신은 답하지 않았습니다.”
이쯤 되니 꿈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눈에 띄게 날 혐오하고 냉담하게 여기던 남자가 눈 돌아 내게 청혼할 리는 없고.
술에 취해 여동생과 닮은 날 보며 뭔가 심각한 착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겨우 벗어났나 했더니 이렇게 엮이게 된다니.
‘정말 지긋지긋한 악연이야.’
어릴 때부터 그랬다.
눈을 뜨면, 항상 그가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상상해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동생에게 이혼이라도 당했나 보다.
흔한 후회남의 클리셰 아닌가.
여주와 남주는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품은 채 여주는 도망가고, 남주는 그 뒤를 눈이 벌게져서 찾고. 급기야 이성을 잃고 내가 동생으로 보이나 보지.
그렇지 않고서야 날 혐오하던 남주가 나한테…….
“결혼합시다.”
이렇게 찾아와 청혼할 리가 없잖아?
난 눈을 질끈 감으며 부글부글 치솟아 오르는 화를 삼켰다.
그래, 악연이다. 악연이야.
‘난 왜 하필 여주인공 언니로 태어나서.’
그랬다.
모든 것의 시작은 내가 이 빌어먹을 소설 세계에 조연으로 태어난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가야 했다.
*
강렬하고 기이한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옆방에서 들려오는 환자의 외침도, ‘띠띠띠’ 소리를 내는 의료기계의 신호음도 아닌 뱃가죽을 뒤흔드는 강렬한 허기와 꼬르륵 소리였다.
‘배고파!’
꾸르르르륵.
천둥같이 울리는 그 소리가 내 배에서 난 소리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눈꺼풀을 열심히 깜빡였다.
‘나 죽었는데?’
모든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숨이 넘어가며 모든 것이 정지한 그 섬뜩한 느낌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데.
말도 안 돼. 설마 요단강 건넜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것일까?
팔다리를 움직이며 일어나려고 했는데, 꼭 온몸이 묶인 것처럼 거동이 불편했다.
‘윽!’
바로 그때였다.
“시끄러워 죽겠네! 애한테 뭐라도 먹여 봐!”
생각이 뚝 끊겼다.
말투가 참 저렴한 누군가의 거친 목소리가 귀를 찔렀기 때문이다.
‘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심장이 쿵덕거리고 초조해졌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잖아.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오물거리며 열심히 쪽쪽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빨았…… 뭐, 쪽쪽?
“이거 웃기네. 왜 나한테 시켜? 나라고 뭘 알아? 애초에 일을 계획한 건 너잖아!”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꽤 카랑카랑 째진 목소리가 울려 미간을 찌푸렸다.
‘계획? 설마, 납치? 다 죽어가는 날? 왜? 뭘 노리고?’
다시 한번 격렬하게 입안에 든 것을 쪽쪽 소리를 내며 빨았고, 그제야 난 내 상태가 확실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해서 입 쪽으로 더듬거리며 손을 뻗었다. 뭔가가 손가락에 걸렸다.
입안에 이게 뭐지?
그리고 왜…… 머리통이 이렇게 무겁지?
“들키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알아? 그리고 우리만 죽겠냐? 그 미친놈이 뿌리까지 다 찾아내서 박멸하고 말텐데!”
“닥쳐, 신전에서 애 납치해서 돈 넉넉히 뜯어보자고 한 건 너였어. 냉큼 이 애를 데려오자고 한 것도 너였고! 근데 하필 데려와도 힐링턴을 데려와? 너 돌았냐?”
“야. 말조심해. 너도 공범이야!”
“데려온 건 너야! 난 마차만 몰았을 뿐이라고!”
난 눈알을 굴리며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납치. 마차. 공범?
그 외에도 이상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그들이 외국인인 것 같은 점.
목청 터져라, 외치고 있는 언어가 생판 처음 들어보는 것 같다는 점.
저 처음 듣는 언어를 기가 막히게 찰떡같이 알아듣고 있는 내 상태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 잊을 만큼 가장 충격적인 것은…….
‘헉. 이게 웬 소시지?’
골이 띵하게 울려 이마를 만지려다 보인 손.
바로 내 손. 눈앞을 스치는 조막만 하고 오동통한 손가락이었다!
관절 마디마디마다 살이 올라 통통한 것이 꼭 어린아이의 손가락 같은…….
움찔거리며 손을 쥐자 그 경악스러운 손가락도 같이 움직였다.
잼잼.
‘이거 내 손가락이야? 상태가 왜 이래? 부었나?’
통통한 소시지 다섯 개를 박아넣은 것 같은 모습에 충격을 받아 굳어 있을 때였다.
뭔가가 박살 나는 소리가 굉음처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옆에서 신나게 떠들던 남자들의 비명도.
‘또, 또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