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여자주인공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와버리고 말았다.
어머? 하며 동시에 고개를 빼꼼 들이밀며 쳐다보는 여자들과 눈이 딱 마주쳐버린 나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크게 들썩였다.
동시에 주륵, 뺨을 타고 뭔가 뜨뜻한 게 흘렀다.
침인 모양이었다. 아, 수치심.
“깨신지도 몰랐네. 무슨 아기가 이렇게 조용해. 주인님 닮으셨나 봐.”
“그러게, 어제 일 놀라지도 않으셨나.”
“흐음, 배고프지 않으세요, 아가씨?”
“그렇게 물으면 아가씨가 잘도 대답하겠네. 분유 가져와 봐.”
저걸 그렇다고 해줘야 돼, 아니면 응애응애 해줘야 돼.
아주 잠깐 심란하게 여자들을 바라보다가 꼬르륵 우렁차게 우는 소리를 듣고 입술을 달싹였다.
잠들기 전에도 찢어지게 배고팠었는데…….
그 순간, 분유로 추정되는 흰 액체가 가득 담긴 젖병이 시야에 불쑥 파고들었다.
‘으악!’
“응? 왜 안 드시지? 아기들은 꼬박꼬박 먹여야 한다고 했는데.”
저기요, 언니. 내가 아기가 된 건 맞지만 당장 젖꼭지 병이나 빨기에는 현대인의 의식이 너무 강한데요!
입술로 오물거리며 밀어보려고 했지만 성인 여성의 힘을 감당할 순 없었다.
방심하는 순간 젖꼭지 병을 가득 물어버렸고.
“거부하지 마세요. 배고프실 거예요, 아가씨. 계속 주무시기만 하셨는걸요.”
본능적으로 꿀꺽 삼키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포만감은 날 좌절하게 만들었다.
“많이 드세요. 아기는 원래 그래야 하는 거예요.”
꼴깍. 꼴깍.
내 속도 모르고 제법 다정하게 속삭이는 여자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여자들은 지독한 무표정이었다.
젖병을 쪽쪽 빨면서도 좀 의기소침해지는 광경이었다.
‘나 싫어하나 봐.’
보통 아기 보면 웃게 되지 않나.
어째 시선이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무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인상처럼 변해가는 것이 체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때만 해도 힐링턴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설마 그 소설에서 나오는 그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상태였다.
*
내가 죽기 전에 읽었던 그 소설 속에서 태어난 로제일 것이라 확신한 것은 분유 두둑하게 먹고, 트림도 하고, 기저귀 축축하게 만들고 수치심에 버둥거리다 잠들고 일어났을 때였다.
분유 먹을 때는 밝았는데 어느새 시야가 어둑해져 있었다.
“으브.”
찌부둥하게 기지개를 켜다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가, 입술을 움직이며 옹알이를 하다가, 옆에 있는 딸랑이 좀 흔들면 시간이 물처럼 흐르지…… 않았다.
‘와. 답답해. 아기 되니까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시한부였다가 생생한 아기의 몸으로 다시 눈뜨게 된 것은 분명 분에 넘치는 일이었지만.
‘지루해 죽겠네.’
하나 떼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화려한 천정의 보석들을 심란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빼꼼 문이 열린 틈으로 복도에서 조심성 없이 떠드는 시종들의 대화가 고스란히 들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탄신연 때문에 말들이 많아. 가주님께도 초대장이 왔는데 거절하셨잖아. 물론 지금 상황에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왜 불렀는지는 수도의 귀족 중 모르는 사람이 없는 화제 아닌가.”
“아, 그 약혼 사건 말하는 거야?”
“그래. 선대 가주님이 선황제 폐하와 나눴다는 가문간의 혼약 말이야. 힐링턴과 벨키우스에게 각각 여아와 남아가 태어나면 반드시 약혼을 치르도록 하겠다는 맹세.”
“지금 황제 폐하께선 정통성이 모자라시니 특히 선황제 폐하의 잔재들에 치를 떠시잖아. 그 혼담도 황제 폐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화제 중 하나이고.”
“그런데 벨키우스 공작가에서는 마침 남자아이가 태어났고, 우리 힐링턴 가에는 아가씨가 태어나셨고.”
“이러다 황궁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지?”
머리가 혼란해졌다.
벨키우스, 힐링턴, 그리고 황제가 만든 가문 간의 혼약.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같은데?’
귀가 쫑긋거렸다. 거기 시종 아저씨들, 더 이야기 좀 해봐요. 잘 안 들려!
바락 외치고 싶었지만 빠끔거리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간 것은 아브브, 아브, 같은 옹알이였다.
환장하게 무거운 이 머리통만 아니었다면 호떡 뒤집듯이 몸을 뒤집고, 귀신 같은 빠르기로 침대를 훌쩍 뛰어넘어 저 시종들에게 기어가서 물어봤을 텐데.
지금 힐링턴의 아가씨와 벨키우스 공작가의 남자아이라고 하셨나요? 라고.
‘그거 <영애는 달콤하다>의 줄거리잖아!’
정확히는 소설 속의 사랑스러운 여주 로제와 냉정한 심장을 가졌지만 여주에겐 그 누구보다 따뜻한 남주 가브리엘의 이야기였다!
‘서, 서, 설마?’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움직여 침대의 나무 기둥을 와락 움켜쥐며 앉았다.
포동포동하고 소시지 같은 손가락이 보였다.
얼마나 잘 먹고 잘 지냈는지 곱디고운 피부도 보였다.
따뜻한 방 안의 공기와 등불이 필요 없을 만큼 화려하여 번쩍번쩍한 집안 곳곳의 장식들도 보였다.
‘나 부자. 겁나게 부자.’
힐링턴이라면…….
내가 <영애는 달콤하다>의 힐링턴의 아가씨라면 가능한 풍경이었다.
‘내가 여주인공 인거야?’
헤실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어설픈 입꼬리는 움직일 듯 말듯 경련하다가 가라앉았다.
제대로 웃지 못하는 것처럼.
‘이것도 전생이랑 같아?’
몸뚱이는 새것으로 바뀌었는데 제대로 웃지 못하는 전생의 습관은 그대로인 듯해서 심란한 한숨이 툭 튀어나왔다.
걱정이 앞섰다. 웃지 않으면, 무표정하면 사람들은 싫어하는데.
‘로제는 외동딸이었으니까. 내가 힐링턴의 아기라면 분명 로제일 텐데.’
로제가 누구던가. 그 사랑스러운 줄거리 속의 여주인공이다.
누구든 로제를 사랑하고, 이 세상 사건 모두 그녀를 위해 흘러갈 것이다.
‘잠깐만?’
아주 잠깐의 기쁨도 잠시.
외울 정도로 읽었던 원작의 줄거리를 떠올리자 현실적인 걱정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로제.
아기 때에도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통통한 뺨의 매력으로 가주의 부인을 잃고 살벌해졌던 가문의 사람들을 사르르 녹여버렸던 사랑둥이.
그리고 로제의 아빠는.
난 부르르 떨었다.
‘헉. 오빠가 아니라 아빠였어?’
아기인 날 끌어안고 서늘한 명령을 내렸던 그 살벌하게 무서운 오빠가 누구인지 깨달은 것이다.
‘정말 내가 여주인공이라면.’
꿀처럼 사랑스럽고 벚꽃처럼 부드러운 로제가 되어, 딱딱하게 얼어붙었을 아빠와 아직 만나지도 않은 남주 가브리엘을 생각하니…….
행복하면서도 무서워졌다.
‘그 둘을 내가 녹여야 한다고? 제대로 웃지도 못해서 보기만 해도 재수 없다고 손가락질받던 내가? 그걸 어떻게 해?’
그러나 로제가 되었다는 충격과 행복한 고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이때의 나는 모르고 있었다.
인생이 그렇게 마냥 굴러들어온 꿀떡처럼 달콤하지 않다는 것.
지금의 고민이 우스워질 정도로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
아기는 곯아떨어져 있었다.
꼭 고단함을 느끼는 어른의 모습처럼, 푸우 소리를 내면서도 눈꼬리에 맺혀 있는 눈물방울이 안쓰럽다.
“왜 우는 거지?”
“모르겠습니다. 가끔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우실 때가 있는데, 소리 없이 우십니다.”
훈련받은 기사처럼 리라는 각이 잡힌 자세로 있었다.
그런 리라를 바라보며 시어스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이가 우는 것은 아이의 대화 방법이라지만, 입을 벌려 크게 우는 것도 아니고 저런 고요한 느낌은 이상하지 않나.
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미는 것처럼 애틋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의원은 나쁜 게 아니라 했습니다만. 아기들도 꿈을 꾼다고 합니다.”
“울 정도의 악몽을 꾼다고?”
“하지만 아기님은 평상시에 누구보다 조용하고, 순한 분인 데다 똑똑하십니다. 아픈 곳이 있었다면 분명 표현하셨을 겁니다.”
리라의 정 없는 말투와 차가운 표정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도 다정한 말투와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얼굴에 안심을 느끼지 않겠는가.
‘그래도.’
누구보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상대였다.
리라는 아이에게 다정한 상대는 못되더라도 확실히 지킬 수 있는 상대다.
그녀는 받은 의뢰만큼, 돈만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아이를 지킬 것이다.
겨우 아이를 데려올 수 있었던 신전으로부터.
그리고, 아이를 노렸던 배후로부터.
설령 그러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저들은 그런 자들이니까.
그래서 리라의 존재도 드러나지 않게 아이와 함께 특별히 이곳에서 지내게 했던 것이다.
리라 외 시녀들은 주기적으로 교체하면서까지.
“또 다른 것은?”
엄지에 맺힌 아이의 눈물을 매만지다가 시어스는 툭 이불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작은 발을 보았다.
너무 작다.
“이제 제법 걸음마를 익숙하게 떼셨습니다.”
“그리고.”
“벽을 잡고 먼 거리까지 이동도 가능하시고, 아직 단어를 말씀하시진 못하지만 옹알이도 더욱 구체적으로 변했습니다. 보통 아기 생후 12개월 정도의 발육 상태와 비교하면 우월하신 편인 듯합니다.”
익숙한 일과였다.
“엄마를 찾지는 않던가?”
그 단어에 목이 메었다.
아이를 신전에서 겨우 데려왔는데, 겨우 버티던 아내의 상태는 이제 아이를 볼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시어스는 눈을 깜빡였다. 리라는 무감정하게 대꾸했다.
“의아할 정도로 보채는 일이 없는 분이십니다.”
“…….”
“그게 좋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부모를 찾지 않는 아이.
시어스는 가슴이 지끈해졌다.
“꼭 무언가 참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리 없겠죠. 이제 태어나는지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아기님이니까요.”
참담하지만 시어스는 자신의 아내가 살날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의 곁에서 모든 일과를 처리하며 손과 발이 된 것처럼 함께 시간을 할애했다.
대신에 이 아이 곁에는 있어줄 수가 없었다.
그는 손을 떨며 오늘의 일을 회상했다.
오늘 거무죽죽하게 죽은 얼굴을 한 가문의 의원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각하.’
‘그러면.’
‘마님의 고통을 줄여드리는 것이 최선일 듯합니다. 그리고 그 치료 과정에서 쓴 독이 독했기 때문에…….’
끔찍했다.
아내는 그의 목숨이었다.
턱관절이 단단하게 맞물렸다.
아내가 죽는다.
‘나 죽어요?’
‘…….’
정신을 잃고 앓던 아내가 하필 그 순간에 깨어,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불렀다.
그때의 심정이란 낭떠러지에 밀쳐져 그가 살해당하는 것 같았다.
황망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숙이다 나간 의원을 바라보며, 아내는 다정하게 그를 위로하기까지 했다.
괜찮다고. 여태 사랑해주어 고맙다고. 다정한 시선이 지독하게 아파 왔다. 그리고 자신은 애원하다시피 했다.
누구보다 두렵고 아프고 괴로울 것은 그 사람이었는데, 바보처럼 매달렸다.
안 돼. 당신을 잃을 수 없다.
‘나는 당신을 이렇게 보낼 수 없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러니까.’
아내는 그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시어스, 정신 차려야 해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명심해요, 이 모든 일은 우리 아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눈먼 분노를 쏟아놓으면 하늘에서도 화내면서 당신 꿈에도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제발.’
‘살려요. 내가 아니라 우리 아이. 그리고 사랑해줘야 해. 누구보다. 알았죠? 그리고 지켜요. 내가 이렇게 된 것. 그리고…… 우리 딸의 축언. 그걸 이용하는 자들이 나올지 몰라. 힐링턴을 건드리는 정도면 앞으로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몰라요. 그리고, 그리고 또, 다시는, 신전에 우리 아이를 빼앗기지 말아요…….’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루하루가 두렵다.
다시 꿈처럼 잠든 그녀에게 되찾은 딸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했고, 아직 안전이 보장되지 않아 아이의 쌍둥이 동생과 만나게 해주지도 못했다.
“내 딸.”
미안하게도 고작 잠든 이 늦은 밤에나마 아이를 보러 올 수 있는 게 당분간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는 지친 듯 아기의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고 가 조용히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