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1)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응?’
푹 잠에 빠져 있던 나는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 바르르 몸을 떨며 눈을 번쩍 떴다.
‘기분이 이상한데.’
그리고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낮이 아니라, 아직 푸른 기운으로 동이 터오는 새벽이라는 것을 알았다.
꼬르륵 울리는 소리에 입을 짭짭 다시며 항상 대기하고 있는 리라를 바라보려 하였지만, 방 안에는 나 혼자였다.
‘어라? 아무도 없잖아?’
납치사건을 겪었기 때문인지 낮이고 밤이고 눈을 뜨면 항상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
그것은 리라일 때도 있었고 낯선 시녀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도 없었던 적은 처음인데?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이상하게 심장이 술렁였다. 꼭 불길한 것을 느낀 것처럼.
나는 침대에서 엉금엉금 엉덩이부터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타박, 타박.
휘청이듯 손을 뻗어 벽을 짚고, 한 번도 나 혼자 나가보지 않았던 방문을 꾸욱 밀었다.
“끄아우!”
혹시 몰라 살며시 열어둔 문은 아기의 힘으로도 열렸고, 그러자 무척이나 길고 또 고요한 저택의 복도가 눈에 보였다.
어째서일까.
이곳을 나가야, 어딘가로 가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므으아!”
괜찮아!
난 모험을 하는 심정으로 문을 나섰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도 모르고.
*
리라가 어제 그랬다. 내일은 아가씨의 생일이세요! 라고.
‘근데 왜 아무도 없는 거지? 리라 어디 갔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제법 걸어왔는데도 복도는 길기만 해서 까마득한 현기증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잠깐 다시 돌아갈까 하는 고민도 들었다.
“아웅.”
길을 잃을 염려는 없는 구조였지만, 짧은 아기의 다리로 걷기에는 무리가 있는 길이기도 했다.
이대로 저 모퉁이를 돌았는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돌아가서 잠이라도 청해보자 결심했을 때였다.
꼭 누군가가 싸우는 것같이,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퉁이를 돌자 고요했던 복도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
나는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저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에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참고 있다는 표정의 사람들, 불안한 얼굴로 바삐 움직이는 메이드들, 그리고 마치 아이가 보채는 듯한 소리.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공작 각하, 둘째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둘째, 아가씨?
그녀는 어쩐지 평소와는 달리 다정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얼굴을 한 채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리라.’
그리고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어린아이의 솜털 같은 머리카락.
그것은 선명한 분홍색이었다.
오밀조밀하게 또렷한 이목구비.
설탕처럼,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게 자랄 것이 분명한 그 조그마한 아기. 지금 내 몸의 또래로 보이긴 하지만, 분명 ‘둘째’라고 했다.
둘째.
힐링턴에는…… 원래 둘째가 없다. 그렇다면 저 아기는 대체 누구지?
황망하게 바라보는 순간 안도하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다시 급변했다.
“의원님, 부인께서 숨을……!”
“안 돼! 당장 성수를 가져와!”
“성수가 통하지 않아요. 이미…….”
가망이 없다.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 이야기가 아니었는데도 내가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의사가 했던 말이 생각난 탓이었다.
아니, 아니다. 사실은 아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부인이라고?’
누군가의 죽음을 앞에 둔 충격적인 상황 때문만이 아니었다.
굳건히 믿었던 어떤 희망이 사실은 당장 무너져 내릴 수 있는 얇은 유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지껏 누구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몰랐다.
‘설마 나는…….’
내 머리카락은 로제리엘의 달콤한 분홍색 머리카락이 아니다.
‘나는 로제가…….’
원작에서 공작 부인은 로제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후병이 악화되어 죽는다.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뭔가 다른데, 그 다른 것이 아무래도…….
‘나는 로제가 아니었어.’
그리고 로제의, 아니 이번 생의 내 아빠는 단 한 번도 저리 웃어주지 않았다.
아빠는 낯선 아기를 소중하게 안으며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다.
“로제, 아가……. 네 어머니가 가시는 마지막 길을 배웅해주렴…….”
“각하, 첫째 아가씨도 모셔오겠습니다.”
“그래, 많이 놀라겠지만, 그 아이도 보아야지…….”
부드럽게 떨리는 손이 아기의 작은 머리카락을 닿으면 부서질 듯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그 미남자는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당장 숨이 넘어갈 듯 창백한 여인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여보, 우리 로제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가. 우리 아이들은 만나고 가야지…….”
“다행히, 읏, 미안, 미안…… 당신…….”
“여보? 엘리자베스?”
“…….”
“엘리자베스. 제발, 제발 이렇게 가지 마…….”
바닥이 무너져 내린다.
그들의 눈물, 좌절, 서글픔이 선명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한다는 두려움도 들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곧 자취를 감추고 만다.
완벽한 한 장의 명화처럼 그들의 모습은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나는 굳어버린 그림자처럼 숨을 멈췄다.
‘아.’
가슴을 따끔하게 스치는 감각, 서글픈 생각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기에 내 자리는 없어 보였다.
나는 덤이라는 것처럼.
오로지 로제를 위한 이 세상 속에서, 불편하게 달린 혹이 된 거라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
우르릉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벼락이 꼭 누군가의 울음 같았다.
고용인들은 이 그림 같은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어쩔 줄 모르는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시어스 폰 힐링턴.
그의 축언은 그의 공작 작위식에서 공표되길 <사랑으로 완벽하리라>.
처음에는 누구보다 냉정한 저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축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누구를 사랑하기는커녕, 스스로에게도 지독하게 채찍질하며 살아왔을 남자였으니까.
그런데 그는 엘리자베스를 만났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잎처럼 풍성하고 달콤한 핑크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사르르 휘는 붉은 눈동자가 설탕처럼 부드러운 여자.
시어스는 엘리자베스를 만나자마자 사람이 바뀐 것처럼 몰두했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사랑.
세기의 로맨스였다.
힐링턴에 고용되었던 모두가 이 젊은 귀족 부부를 사랑했다.
그들이 행복하기를, 영원히 사랑하기를.
그러나 결국 이렇게 되었다.
좌절을 모르고 살아왔었을 철혈의 남자.
축복받은 쌍둥이를 낳고, 모든 것이 완벽한 줄 알았으나 불행은 차츰차츰 시작되었다.
첫째 아이를 신전에 빼앗기고, 아이를 찾기 전까지 쓰러질 수 없다며 버티던 공작 부인이 결국 병으로 앓아눕고, 그리고 이렇게.
그는 지금 자신의 심장과 같았던 여인을 잃고, 귀족으로서의 체면과 냉정함도 모두 잃어버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결국 부인께서 버티지 못하고 이렇게 가시는구나.’
모두가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을 때였다.
워낙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이 없던 이들은 그제야 이 공간에 자신들 말고 다른 이가 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첫째 아가씨……?”
고용인들의 시선이 황망하게 중얼거린 시녀 리라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았다. 애 같지 않은 처연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 자그마한 아기가.
그제야 마님의 임종 전에 첫째 아가씨를 얼른 모시러 가지 못했다는 생각들을 했다.
동시에 리라는 자신을 자책했다.
첫째 아가씨의 축언 때문에 마님이 이렇게 되셨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한 것은 아닌가 하고.
그래서 먼저 로제 아가씨를 모셔온 게 아닌가 하고.
엉거주춤 벽을 짚고 서 있는 모습이 당장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눈이 마주친 자들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심장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가씨?”
당황한 안색으로 다가간 시녀 리라는 아기를 얼른 품에 안았다.
모두 똑같이 생각했다.
‘대체 언제 오신거지? 설마 저 긴 복도를 걸어오신 거야?’
다들 경악했다. 설마 어린아이가 무언가를 느끼고 이곳으로 왔을 리도 없건만.
호기심에 밖으로 나왔다가 이곳까지 온 것이겠지만.
그런데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시선이 시종일관 오열하고 있는 제 아빠와 눈을 감은 엄마 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꼭 죽음을 이해하시는 것 같잖아.’
아기가 죽음을 이해할 리 없는데도 이상하게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표정제거술을 받지 않은 평범한 시녀들은 아기의 그 서글픔에 같이 훌쩍이며 눈을 비볐다.
정작 아기님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도.
울지도 않고 차마 다가가지 못하겠다는 듯 얼어 있는 아기의 모습이 더 슬펐다.
“리라, 뭐하고 있어. 얼른, 얼른 아가씨 좀…….”
데려가.
훌쩍거리던 시녀 한 명이 아가씨의 전담 시녀를 재촉했다.
무표정한 채 아기를 안고 있었던 리라는 눈을 깜빡인 뒤 얼른 공작을 향해 걸어갔다.
“각하. 여기, 첫째 아가씨가 오셨어요.”
모두는 아기님이 꼭 겁에 질린 것처럼 리라의 품에 얼굴을 숨기는 것을 보았다.
아, 안타까운 탄식이 쏟아졌다.
공작이 쓰러진 아내의 병간호를 위해 항시 곁에 붙어 있던 것을 생각해보니, 제 아빠인 줄 모르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낯설어서.
아기는 리라의 품에 묻었던 얼굴을 천천히 돌리며 공작을 한 번, 그리고 공작의 품에 안긴 제 쌍둥이 동생을 한 번,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제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얼마나 안타깝던지.
“마아…….”
그 작은 옹알이가 왜 엄마처럼 들렸을까?
결국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아낸 공작이 손을 뻗었다.
“힐데아.”
힐데아.
신전에 첫째 아가씨를 빼앗긴 이래 이 저택에서 누구도 제대로 불러본 적 없던 그리운 이름이었다.
“각하. 아가씨는 제가 안고 있겠…….”
“아니. 힐을 이리로.”
아기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지만, 곧 공작은 팔에는 로제를, 다른 팔에는 엉거주춤하게 안긴 첫째를 안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공작부인, 엘리자베스를 잃어버린 부녀는 한참을 그곳에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몰랐을 것이다.
아이가 그 순간 받았던 끔찍한 충격을.
그 고통을.
*
힐링턴의 공작부인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은 곧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그 오만했던 힐링턴 공작, 시어스가 평범했던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기까지 벌어졌던 일들은 유명한 로맨스 소설이 되어 수없이 읽혔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비애를 느꼈다.
꼭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은 결혼하여 아들, 딸을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고 끝맺어야 할 해피엔딩이 무너진 기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고 사람들, 특히나 귀족들은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든든한 오른팔과 왼팔을 일컫는다면 모두 힐링턴과 벨키우스를 꼽는다.
그런데 벨키우스는 혈족 대다수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사랑으로 완벽하리라>라는 축언을 받고 태어난 시어스는 그 중요한 사랑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미엘르 제국에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지, 그건 누가 봐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권력이 기울 것이다.
“폐하께서 곤경에 처하시겠군요.”
“벨키우스의 후계자는 미쳐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황후파가 득세하겠습니다.”
“하지만 힐링턴이 이대로 무너질까요?”
“그 사랑이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알잖습니까. 혹시 아나요, 따라 죽겠다고 그럴지.”
“태어난 아이들이 여자 쌍둥이라고 하던데 그러겠어요?”
“어머, 축언에 매인 이가 얼마나 맹목적인지 모르시는군요. 아이들이 눈에 뵈지도 않을걸요. 장담하던데 사랑하는 이를 잃게 한 딸들을 아끼기 힘들 거예요. 애들만 불쌍하게 되었군요.”
“게다가 공작부인의 죽음의 원인이 쌍둥이 중 첫째 딸이 타고난 축언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는걸요. 축언은 정확히 당사자가 공식적으로 말해야만 알 수 있겠지만, 얼마나 심각했길래 그런 소문이 돌았을까요. 그리고 신전에서 한 행동을 봐요.”
“어머, 그래요? 대체 무슨 축언이길래? 그럼 첫째 딸 때문에 죽었다는 거예요?”
“쌍둥이를 낳고 이후부터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되었으니까요.”
귀족들은 연신 시끄럽게 그 화제에 대해 떠들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힐링턴과 벨키우스의 비극에 대해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솔직히 기고만장한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즐겁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의 궁금증은 그것이었다.
“그래서 어미를 죽게 한 그 딸은 어떻게 됐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