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2)
나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뒤에서는 시녀가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빗질해주고 있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아가씨?”
씁쓸한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거울에 비추는 내 뒤에 있는 시녀를 보며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저기요.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요. 뭘 그렇게 떠세요?
“응. 마무리는 리본으로 단정하게 묶어줘.”
“네, 알겠습니다.”
시녀의 손길이 빨라졌다.
얼른 처리하고 나갈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듯했다.
아마도 내 냉정하고 차가운 표정 때문에 저택의 고용인들이 거리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지만,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 무척 억울하다.
“다 되셨어요, 아가씨. 그럼…… 저는 할 일을 하러 나가보아도 될까요?”
“그래. 이후의 일정은?”
“식사 시간에 늦지 않게 식당으로 내려가시면 되어요.”
“고마워.”
무서운 것을 봤다는 듯 빠르게 사라지는 시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방에 남아 있던 다른 시녀가 기겁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멋쩍었다. 내가 그렇게 무섭고 싫은가?
난 최대한 스스로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은색의 머리카락만 보려고 노력했다.
이제 제법 자라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이 익숙해졌다.
“그런데 리라는 어디 갔어?”
지금까지도 내 전속 시녀인 리라가 보이지 않았다. 질문을 받은 시녀는 입술이 떨렸지만, 제법 차분하게 대꾸했다.
“네, 리라님은 로제 아가씨께 잠시 다녀오신대요.”
“로제? 그래……. 알겠어.”
로제리엘. 이란성 쌍둥이라서 생김새는 달랐지만, 같은 날 나보다 1시간 늦게 태어난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
그러나 <영애는 달콤하다>라는 소설의 주인공이며, 부끄럽게도 내가 로제라고 착각하며 바라봤던 내 가족.
오늘은 나와 로제의 생일이자, 엄마의 기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와 로제는 이제 8살이다.
원래 보통의 귀족 가문이라면 딸들의 생일을 맞아 근사한 생일 파티를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 이래 힐링턴은 칩거를 택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고요하게 지냈다.
이건 내가 기억하는 원작과 같다. 외부의 출입을 자제하고 사람 하나 쉽게 들이지 않는 것.
아마도…… 첫 데뷔탕트를 치르기 전까지 문을 걸어 잠갔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서.
‘여주는 남주를 만나지. 그러니까 내 동생 로제가, 가브리엘을.’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한참 남은 일이었고, 당장은 아빠와 로제를 보러 내려가야 했으니까.
*
탁, 식기를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로제는 아직 식사 예절이 서툴렀다.
그럴 만도 했다. 저 작은 손으로 열심히 움직여도 어색할 수 있지.
“헤헤. 죄송해요.”
“로제리엘. 예절 교육을 잘 듣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니냐.”
“아빠아. 하지만 나이프와 포크가 쓸데없이 너무 많아요…….”
“로제. 그런 식으로 응석 부리듯이 말하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엄격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아빠의 입술은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 식당에 있는 다른 시녀들도 모두 그런 시선으로 분홍색 머리카락의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몰랑몰랑 꾹 누르면 쑥 들어갔다가 튀어나올 것 같은 귀여운 뺨.
옹알옹알 움직이는 생기 넘치는 자그마한 입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면 품 안에 있는 것을 모두 주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영롱한 붉은색 눈동자.
확실히 로제는 뽀뽀해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예쁜 아이였다.
반면에.
“……힐데아. 식사가 입에 맞느냐? 네가 좋아하는, 연어 위주로 특별히 마련해보았는데.”
누가 봐도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의 아빠가 내게 물었다. 민망해질 정도의 변화였다.
오물거리며 작게 고기를 잘라 입에 넣고 씹고 있던 나는 그것을 모두 넘긴 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례적으로 말을 건넨 것처럼, 혹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어색한 아빠의 얼굴을 보니 내가 더 미안해졌다.
‘괜히 말을 했나.’
그렇게 굳이 말 시키시고 어색해하실 건 없는데.
로제에게도 말을 시켰으니 내게도 말을 시킨다는 것이 너무 눈에 보였다.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더 먹지 않고?”
“배부르니 괜찮아요.”
“그, 렇구나.”
침묵이 흘렀다.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고 싶었는데,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딱딱하고 냉정했다.
더욱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아빠의 얼굴을 보니 속이 답답해져 왔다.
‘이게 아닌데.’
차라리 혼자 먹을걸. 괜히 식당에 내려온 모양이다.
바로 그때였다.
싸늘한 침묵을 못 견디겠다는 듯, 로제가 의자에서 일어나 아빠에게 다가가 옷자락을 흔들었다.
“아빠아.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 말구요! 오늘 언니랑 저랑 생일인데요!”
아빠는 그제야 웃었다.
“하아. 그래, 그것만 기다렸구나. 작은 아가씨가.”
“네!”
당당한 목소리와 애교 있는 몸짓에 지켜보던 이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났다.
나도 웃음을 터뜨렸지만, 분명 일그러진 웃음이었을 것이라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로제는 진짜 사랑스러운 아이야.’
사실 처음에는 힘들었다.
내 이름이 로제리엘이 아니라 힐데아라는 것이.
<영애는 달콤하다>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래서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인생이라는 것이.
그 모든 것들이.
‘전생에 별꼴을 다 보고 살아와서 제법 단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정도로 힘들었냐 하면, 전생처럼 인생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불안증이 찾아왔을 정도였다.
내게는 웃어주지 않는 아빠가 로제리엘에게는 다정하게 웃어주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냉정한 무표정이던 리라와 다른 시녀들이 잠든 로제리엘을 바라보며 푸근하게 웃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부터였을까?
바라보면 시선을 피하거나, 혹은 뚫어져라 바라보며 거북한 티를 내던 저택의 고용인들이 로제에게는 손을 흔들어줄 때부터였을까.
나만의 사람인 줄 알았던 리라는 사실 로제의 사람이기도 했다.
‘둘째 아가씨가 몸이 약하셔서 참 걱정이에요. 어머, 힐 아가씨도 걱정되어서 오셨어요?’
‘우응. 리라, 빠아는?’
‘공작 각하는 한참 있다가 가셨답니다. 찾아가시려고요? 그보다 공작 각하께서는 아까 아가씨 방에…….’
‘괜차나.’
‘아가씨?’
‘아빠 바빠. 나 괜차나.’
내가 기억하는 원작에서는 아빠가 처음에는 냉담했다고 그랬었는데, 기억하는 것과는 제법 달랐다.
아빠는 어색하지만 제법 로제에게 다정했다.
그리고 사람들도.
나만 어정쩡하게 섞이지도 못하고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건 괜찮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무척 몸이 약했던 로제리엘의 곁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집중되었다.
그래서 홀로 있을 때는 외로움이 배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진짜 어린아이처럼 투정 부릴 정도로.
난 주로 리라의 옷자락을 잡았다.
‘리라. 또…… 가?’
‘죄송해요, 아가씨. 로제 아가씨가 갑자기 열이 나셔서…… 잠시 보고 올게요. 다른 시녀 언니들이랑 놀고 계시는 거예요?’
‘으응. 아라써.’
그것이 하나씩 쌓여 있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점점 숨 쉬는 것이 힘겨워졌다.
나는 원래도 잘 웃는 밝은 아기는 아니었지만, 점점 말수를 잃었다.
무슨 말을 했을 때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리라는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걱정하며 의원을 불러 몇 번이나 진찰을 시킬 정도였다.
‘아가씨가 말을 하지 않으셔서요.’
‘하지만, 신체적인 문제는 없으십니다.’
‘그러면…… 설마 정신적인 문제라는 말인가요?’
‘그런 듯 보입니다만. 최대한, 최대한 아가씨를 혼자 두지 마세요.’
그 해프닝은 시간이 지나고 우습게도 로제를 만나면서 위안받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서로 얼굴도 보지 못했던 여동생의 존재가 오히려 내게 위안을 주었다.
그 애 덕분에 마음이 다시 따듯해지고 숨이 쉬어졌던 것이다.
‘리, 라.’
‘아가씨…….’
‘나 괜차나. 로, 로제는?’
이윽고 다시 말문이 트이면서 리라는 안심하게 되었다.
리라가 흐느끼며 미안하다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잠결에 들었던 것도 같다.
어쨌든 나는 체념과 익숙해지는 것으로 현재의 내 위치를 받아들였다.
내가 정말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로제는 로제고, 나는 나지.’
질투 아닌 질투를 하기도 했었지만 내가 로제를 사랑하게 되면서 담담히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아이의 몫이 내 몫이 아니라는 것.
<화려하게 꽃피리라>.
결국에는 모두가 로제리엘이라는 소녀를 아끼고 보듬게 되는 그 눈부신 축언은 로제리엘이라는 사람 자체를 누구보다 강력한 이로 만들어 놓았다.
소설에서는 한 줄로 쓰인 그 서술이 현실에서 어찌 발현되는지는, 내가 똑똑히 겪었다.
‘어머. 로제리엘 아가씨는 힐데아 아가씨가 너무 좋으신가 봐요. 역시 쌍둥이 자매는 우애가 좋군요!’
‘손가락을 꽉 잡고 놓질 않으시네요.’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로제는 사랑스러웠다.
다들 거북하게 대하는 내게도 로제는 방긋거리며 웃어주었으니까.
반짝거리는 별빛이 나와 같은 색의 눈동자에 녹아들어 로제를 특별히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그런 아이를 어찌 미워하겠어?
*
“힐데아. 혹시……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네? 아, 선물이요?”
아. 나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생각에 너무 깊게 빠져 있었다.
아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는데, 내가 보기엔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생일 선물을 열어보지도 않았기에, 흠.”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요.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하라고 하는 것이…….”
“네?”
“흠흠, 아니다. 그보다 선물을 열어보지 않겠느냐?”
“그래, 언니. 얼른 열어봐. 응?”
잔뜩 기대하고 있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로제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아빠.
그리고 여태까지 기다리게 한 것이 탐탁지 않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시녀들이 보였다.
그리고 내 앞의 선물까지.
굳어버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마른침을 삼키며 웃어보려 애썼다.
잘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쳐다보면 긴장된다고 말하면 상처받을까?
“고……맙습니다, 아빠.”
체념과 포기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으나, 그래도 이곳은 전생보다는 너무 따뜻했다.
좋아하던 소설을 직접 눈앞에 두고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사랑받진 못해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언니, 나는 이거 봐, 반짝거리는 머리핀이야. 다섯 개나 사주셨어! 예뻐?”
“그래서 기분이 좋구나. 잘 어울려.”
“응응. 그러니까 언니도 어서 열어봐. 응? 그리고 나한테 자랑해줘야지. 막 기대되지 않아? 무슨 선물이 들었을까!”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눈치인데, 로제만큼은 내가 우울해하는 순간을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 꼭 저렇게 말을 보태곤 했다.
‘착해가지고는.’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미간에 힘을 주었다.
내가 바라는 것보다 저들은 나를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아도, 이들이 좋고 사랑스러웠다.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어보니 나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