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우리 언니 건드리면 죽는 거예요
요즘 아빠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저택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제법 있었는데, 낯선 목소리를 보니 그들 중 하나인 듯도 했다.
아마 그 정도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텐데, 하필이면 가시 같은 그 목소리가 내 뇌리를 찔러왔다.
‘정말 첫째 아가씨 때문입니까?’라는.
뭐?
첫째 아가씨는 나다. 내가 뭘? 저게 무슨 소리야.
심장이 불안으로 펄떡거렸다.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문 쪽으로 걸어갔다.
듣기 싫다. 그러면서도 듣고 싶었다.
어쩌면 왜 이 저택의 사람들이 나를 냉대하는지 알지도 몰라.
그 생각이 가슴을 두드렸다.
나는 문을 열고 싶은 마음 반, 열기 싫은 마음 반으로 천천히 손에 힘을 주었다.
끼익, 아주 작은 울림이 들리고 문틈으로 밖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한 명은 우리 저택에서 일한 지 꽤 오래된 시종이었고 다른 이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말을 꺼낸 것은 새로 들어온 젊은 사람인 듯했다.
“이미 들었습니다.”
그는 주변을 눈치를 보듯 크게 울린 소리에 당황한 것처럼 몸을 숙이고,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말입니다. 이래 봬도 소문이 제법 밝아요. 힐링턴의 두 아가씨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 아니어야지요.”
“…….”
“그래서 주워들은 소문이 많은데 첫째 아가씨에 대한 것도 있더란 말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여태 사교 활동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내 이야기가 밖에 돈단 말인가?
“확실히 힐데아 아가씨는 정이 가진 않더라고요. 이제 겨우 여덟 살인데, 좀체 웃는 법도 없고. 항상 차갑고. 그리고 누구 하나 살갑게 대하는 것을 못 보고. 그에 비해 로제 아가씨는 엄청 귀여우신 분이잖아요.”
“…….”
저 자식이.
당장 달려가서 너 지금 무슨 헛소리냐고 멱살 잡고 탈탈 털어버리고 싶었다.
나 혼자 자책하는 건 괜찮은데, 생판 남에게 그런 말 따위 듣고 싶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활화산처럼 튀어나오던 분노도 차가운 밀랍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첫째 아가씨의 축언 때문에 공작부인이 돌아가셨다면서요? 아, 솔직히 말해주세요. 맞습니까?”
……뭐라고?
‘축언? 내, 축언?’
듣는 순간, 턱이 덜덜 떨렸다.
주체할 수 없이 딱,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한겨울에 아무것도 입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나한테 축언이 있어? 그리고.’
나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대체 그놈의 축언이 뭐길래 공작부인이 돌아가신 겁니까? 힐데아 아가씨의 이능이 뭐길래요?”
듣고 있던 다른 시종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확언하는 듯한 그의 말이 도끼처럼 내 가슴을 후려쳤다.
엄마가 나도 모르는 내 축언 때문에 돌아가셨다.
그게…… 사람들이 나를 꺼려하는 이유였어? 그래?
심장이 지끈하고 아파졌다. 바보처럼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눈물이라는 것도 알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조용히 호흡했다.
“흐으.”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어린아이가 터진 울음을 참기 힘든 것처럼 어깨가 자꾸 들썩거렸다.
원작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는데.
내가 축언이 있다니.
그럼 이능도 있나?
그것 때문에 엄마가?
그래서 아빠도, 다들 나를 어려워한 거였다고?
‘왜 이렇게 슬프지? 진짜 애도 아닌데.’
거울에 비추는 얼굴은 참 표정 없이 굳어져, 과거의 나 같았다.
진짜로 내 축언이 뭔지 모른다. 처음에 태어난 지 12개월이 될 때까지 내 이름도 몰랐는데 축언이 알게 뭔가!
하지만 허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덜컥 덮쳐왔다.
그 축언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신 것이라면, 처음부터 아무런 희망도 없었던 것일까.
정말 나는 덤이고, 이물질이었던 것일까?
<영애는 달콤하다>에 여동생의 언니는 없다.
그렇다면 사실, 힐데아라는 인물은 납치당했던 순간 죽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난 사실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그런 것일까?
*
“언니.”
“!”
마침 뒤에서 작은 팔이 부드럽게 껴안아 오지 않았다면, 아주 깊고 우울한 생각에 빠졌을 것이다.
“뭐해애.”
난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나는 몰라도, 내 뒤에 있는 로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여덟 살이 아닌가.
우울과 슬픔은 전염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언니, 왜 울어? 누가 괴롭혔어?”
돌아보니 저가 더 그렁한 눈물을 달고 있는 붉은 눈이 보였다.
훌쩍거리며 힘을 준 로제의 콧잔등에 잔주름이 모였다.
“아니야, 언니가 왜 울어?”
“아닌데에. 훌쩍, 울었는데. 그리고 나쁜 말도 들렸어.”
“아무것도 없었어, 로제. 더 자야지, 왜 벌써 일어났어.”
“크흥, 킁, 그럼 언니도 같이 자. 듣지 마아.”
다가온 로제가 뜨끈한 손을 들어 내 귀를 막았다. 그리고 조물조물 비볐다.
그것이 귀에 닿은 소리를 다 털어버리려는 행동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아, 사랑스러워.
바라보자 일부러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하는 모습도 영악하기보다는 그저 애틋했다.
“나 너무 졸려어. 그냥 나랑 더 자자, 언니.”
이상하다. 방금 까득 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그러나 내 눈앞에는 반짝반짝 웃고 있는 귀여운 로제만 보였다.
그래. 이렇게 토끼 같은 애가 이를 갈며 화냈을 리가 없지.
“……그럴까?”
“응. 딱 조금만 더. 언니도 나랑 같이 조금만 더 잘 거야. 잠이 보약이랬어.”
“풋, 너 그런 건 어디서 들은 거야.”
“언니 동생은 똑똑해애. 히히.”
작은 손이 잡아끌었다.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홀린 듯이 폭신한 이불 위로 다시 몸을 뉘었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얼른 지우겠다는 듯이 꼬물거리는 손으로 로제가 닦는다.
한 번 크응, 콧물을 삼키고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서글픔도 밀려왔지만 못된 말을 한 밖의 시종에 대해서도 분노가 들끓었다.
다음에 또 보자.
정말 얄미운 그 코털을 다 뽑아버릴 거야.
제초제 뿌린 듯이 뿌리도 못 자라게 할 것이다!
‘흥. 내 축언이 대체 뭔데 그러는 거야.’
토닥, 토닥.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어깨를 두드리는 로제의 손길에 다시 터지려는 눈물을 꾹 참고 그 애를 꽉 끌어안았다.
따뜻한 어린아이의 체온에 기대 겨울잠 자는 동물이라도 되듯 상처를 피해 잠으로 빠져들었다.
다 잊을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불안은 가시처럼 가슴 속에 남았다.
나는 아빠에게도, 그리고 로제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제발. 나로 인해 엄마가 죽은 것이 아니기를.
제발.
*
잠시 뒤.
이불 위에서 꼬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자아?”
피곤했는지 바로 잠에 빠져든 은발 소녀의 뺨에는 눈물 자국이 흥건했다.
“그 나쁜놈. 용서 못해.”
그걸 내려다보고 있던 분홍색 머리칼의 소녀 입에서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다시 한번 빠드득, 무척이나 살벌한 소리가 울렸다.
“부숴버릴 거야.”
소녀는 결심했다는 듯 두 주먹을 움켜쥐며 일어났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숨겨 두었던 펜을 야무지게 꺼내 들어 언니의 책상 위에 있던 공책을 북 찢어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꼭 마법처럼 펜을 가져다 댄 종이에 무언가 상자같이 보이는 것이 뜬 것이다.
띠링!
“직접 말 못 해주는 것도 답답해 미치겠는데. 감히 그런 놈이 우리 언니를 상처 줘?”
그리고 소녀, 로제리엘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뭐야. 이 새끼 왜 대답을 안 해?’
크리스는 짜증과 쌍욕을 속으로 꿀꺽 삼키며, 아무 말도 없이 무슨 종이를 바라보고 있는 선임 시종을 숫제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왜 말을 씹고 난리야.’
이 저택은 하나같이 정말 이상했다.
처음에는 첫째 영애인 힐데아가 사용인들과 가족들에게 구박을 받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게 아닌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래서 정말 숨겨진 속사정이 있는 것인가 하고 떠보았는데, 제 선임이라고 했던 느긋하고 느린 시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 종이만 바라보는 것이다.
저 종이에 뭐가 있다고, 이 미친놈아.
‘너 자냐? 서서 자냐고?’
사실 크리스는 첩자였다.
몰래 귀족가의 시종으로 잠입해서 그들의 은밀한 정보를 얻고, 그것을 다시 중요한 이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
귀족들은 뭐 그렇게 숨기고 사는 것이 많은지 그것 하나만 털어줘도 돈이 술술 흘러들어왔다.
지금 제국 수도의 귀족들이 군침을 흘리며 개떼처럼 달려들 정보라면 단연 벨키우스와 힐링턴이었다.
‘벨키우스는 건드리기 좀 그러니까.’
그 열두 살 된 미친 꼬맹이가 가주가 되자마자 저지른 살육을 생각하면, 거기 들어갈 생각 자체를 말아야 했다.
그나마 예전에 비해 팍 죽었다는 힐링턴은 괜찮을 것 같아서 들어왔는데 이거야 당최 뭐가 뭔지.
바로 그때였다.
“너.”
서서 조는 것인지 의심됐던 선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삐그덕 소리가 날 것같이 느릿한 행동에, 왜 등줄기가 섬찟해졌는지 모르겠다.
“네?”
“방금 축언이 어쩌고, 저쩌고.”
절정은 어쩐지 저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선임의 눈을 보았을 때였다.
그리고.
‘허억!’
이럴 리가 없었다.
“보자보자 하니까 네가 입으로 똥을 싸고 있더라.”
몸이 딱딱하게 굳어, 심장까지 아렸다.
시선을 돌리고 싶은데 그것마저 할 수가 없다.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감히 우리 아가씨가 어쩌고 저째?”
귀족가의 시종으로 정보 팔이 짓을 하려면 제 한 몸은 지킬 정도의 실력이 있어야 했고, 크리스는 이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시종 따위에게 자신이?
‘빌어먹을! 숨을, 숨을 쉴 수가 없어!’
“네가 돌았구나. 힐링턴 한가운데서 그런 개소리를 지껄여?”
그뿐이 아니었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크리스는 시종의 손아귀에 목이 잡혀 있었다.
점점 벌겋게 변하는 얼굴을 보면서도 선임은 살벌하게 웃기만 했다.
‘이 미친 새끼가!’
“으, 으윽, 윽!”
“뚫린 주둥이라고 아무 소리나 지껄이면 곤란하지.”
시종이 훽 내다버린 종이에는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물론 점점 연해지는 글씨는 증거 하나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사라지고 있었지만.
-띠링.
-나는야 관찰자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힐데아님 눈물을 뽑은 신참 퇴치 파티 구함.
-망발을 지껄였음.
-호된 교육이 필요할 듯함.
-꼬라지가 첩자로 의심됨.
“너 오늘 한번 죽어보자.”
“으아……읍!”
선임이 말했다. 쉿.
“아가씨들 깨실라. 조용히 해야지, 이 자식아.”
곧 크리스는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었다.
*
“이번에는 벨키우스와 힐링턴에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를 해드릴 시간인데, 궁금하신 것이 있는가요. 영애분들.”
우아한 후작 부인의 목소리와 함께 턱을 괴고 졸고 있던 로제가 눈을 반짝 뜨며 손을 들었다.
“네!”
짐짓 핀잔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던지, 후작 부인의 곤란한 낯을 보며 나는 웃음을 삼켰다.
포기하세요, 후작 부인.
제 여동생은 차마 혼낼 수 없는 아이거든요.
“로제 영애. 무엇이 궁금한가요?”
“그 혼담이요. 언니랑 제가 둘 다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