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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9화 (9/155)

9화. 첫만남에 남주를 기절시킨 모양입니다

로제리엘의 짝은 가브리엘이고, 가브리엘의 짝은 로제리엘이다.

그렇게 정해진 운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로제의 엉뚱한 말은 내게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로제가 가브리엘을 거절하는 경우라고?’

설마 싶으면서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로제를 보고 좋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분명 가브리엘은 로제를 좋아하겠지만.

로제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이랑 정략결혼이라니 너무 고루해요.”

후작 부인은 엄한 얼굴을 했다.

“선황제 폐하께서 직접 추진한 혼담이었답니다, 영애. 어디 가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큰 화를 입게 될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귀족들의 화법도 힘들어요.”

“영애는 그 귀족의 정점 중 하나입니다.”

후작 부인이 골치를 앓는 것을 보면서도 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원작과 바뀐 것들이 소소하게 있었다.

이를테면 원래는 아빠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열심히 수업을 듣고 교육을 받았던 로제였다.

그런데 내 동생은…….

‘수업이라면 질색을 하지.’

그뿐인가.

원작의 로제는 사실 무척이나 건강이 안 좋아서 오래 뛰지 못하는 체력을 갖고 있었다.

잔병치레도 많아서 춥게 있었다가 걸린 감기로 인해 가브리엘이 자책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른바 허약 여주.

‘그런데 우리 로제는 나무도 씹어먹을 만큼 튼튼한데?’

물론 로제도 어릴 적에는 약한 순간이 있었다.

태어나고 삼 년쯤 지났을 때부터 호전이 되다 못해 너무 건강해져서, 나는 아빠가 사랑하는 로제를 위해 몰래 드래곤의 하트라도 먹인 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로제 영애. 자, 보세요. 힐데아 영애를 보면 어떤가요?”

로제와 내 시선이 딱 마주쳤다.

난 어색한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다가 입꼬리를 내리며, 두 손을 포개었다. 로제는 사랑스럽게 눈을 빛냈다.

“우리 언니는 무척 예뻐요. 완벽해요. 어떤 귀족 아가씨보다 우아할걸요!”

으음, 칭찬은 감사하다만 그 정도는 아니야.

“그래요, 누가 가르쳤는데 당연…… 아니. 로제 영애, 지금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랍니다. 보고 배우라는 뜻이었어요!”

로제는 입을 삐죽거렸다.

“에이, 그건 못해요. 다르잖아요.”

“뭐가 다르단 말입니까. 영애나 힐 영애나 모두 같이 배운 것을! 오늘은 수업을 한 시간 연장하겠습니다. 힐 영애는 나가봐도 좋아요.”

“언니!”

이제 나는 괜찮다는 후작 부인의 손짓에, 배신감에 찌든 얼굴을 한 로제를 뒤로 하고 종종걸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로제는 귀엽지만 그래도 예절 교육은 더 해야 한다.

훗날, 파티장에서 로제가 창피를 당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

밤이 깊었다.

로제도 오늘 독한 수업 때문에 깊게 곯아떨어져, 난 방에 혼자 있었다.

“실험해보자.”

손으로 밀자 챙강, 하고 화분이 바닥으로 떨어져 망가졌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제발. 제발.”

아주 작은 화분이라 밖에서 깜짝 놀라 들어온 사람은 없었지만, 난 유심히 깨어진 화분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역시 꿈이 아니었어.”

화분은 완벽하게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그것을 들어 올려 요모조모 훑어보아도 금이 간 곳 하나도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이능이지?”

시종의 가시 같은 말. 그것에 좌절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바로 내가 축언을 지녔다는 것.

그렇다면 <영애는 달콤하다>의 기본 법칙을 따르자면, 나도 이능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설마?’

그때부터 내가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들이 떠올랐다.

내가 키우는 식물들은 반짝거리며 빛이 났고, 꽃들은 유독 오래 살아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는 어떤 새 한마리가 날개 한쪽을 다친 채로 창틀에 떨어졌는데, 내가 키우던 화분의 열매를 먹고 잠시 뒤 완치가 되어 날아가지 않겠는가.

“설마 내 이능은 치유?”

근데 왜 내 축언이 재수 없다는 소문이 돌았을까.

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내 이능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지만, 혹시라도 내가 이 저택을 떠나야 될 때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로제를 사랑하고, 아빠도 애틋하게 여겼지만, 그 시종의 말은 꾹꾹 눌렀던 내 걱정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그래서 난 노력 중이었다.

열심히 배우고 배워서 똑똑해지고, 어디 가도 잘살 수 있을 만큼 풍부한 귀족 영애의 혜택을 누리기로 했다.

거기다 이능까지 있다면 훗날 어떤 처지가 되든 톡톡히 도움이 될 것이다.

“치유라면 난 죽을 일은 없을 거고, 여차하면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돈도 벌 수 있을 거야. 시골의 촌장들도 치료사는 환영한다고 했으니까.”

좋은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을까.

알 수 없는 감정을 지우며 나는 소중하게 담아 두었던 그 신발을 꺼냈다.

“생각이 복잡할 땐 움직이는 거랬어.”

꼭 구름 위를 뛰어다닐 것같이 푹신한 재질에, 옆에는 앙증맞은 날개까지 있는 그 신기한 구두.

조심스럽게 신어보자 정말 발이 너무 편했다.

“내 선물…….”

밤에 열심히 운동할 때 마땅히 신을 신발이 없어 고생스러웠었는데.

낮에는 눈치가 보여서 하지 못해 밤을 이용하고 있었다.

일단 귀족 영애들은 승마 정도의 운동은 해도 본격적으로 기사들처럼 뛰거나 훈련을 하지 않는다.

난 시선을 끌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잠깐만. 근데 진짜 이 신발을 왜 주신거지? 꼭 이런 신발이 필요했던 걸 아는 것처럼.’

내가 밤에 몰래 운동하고 있는 건 저택의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정말 우연인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기 어디에 CCTV가 있을 리도 없는데, 정말 뭐지?

*

어쨌든 밖에 나가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기분이 이상한데……?’

복도는 조용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는 풍경이었는데, 이상하게 뭔가가 있는 기분이었다.

괜히 등골이 차가워졌다.

설마 귀, 귀…….

‘헉.’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던 복도의 끝에서 검은 무언가가 서 있는 것이!

난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졸도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정말 귀……신이 아니네?’

그러다 그것이 사람이며, 저 행색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좀도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힐링턴을 터는 간 부은 도둑놈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러나 있었다.

다행인 점은 그 도둑과 내가 눈이 마주치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젠장. 이대로 살살, 조용히.’

난 현실을 잘 알았다.

우리 가문인 힐링턴은 좀도둑이 쉽게 뚫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니 저게 도둑이 아니라 살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오지 마라, 도둑놈아. 일단 나부터 살고 튈게.’

내가 저 침입자를 한방에 후려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니었으니, 돌아가서 사람들을 부르고, 다음에…….

그러나 몸을 돌리는 순간, 도둑이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으악!’

얼마나 빨리 달려오는지 금방이라도 잡힐 것 같았다.

절박하게 몸을 돌리고 빠르게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

뺙!

‘응?’

복도에 청명한 소리가 길게 울렸다.

‘이게 뭐?’

발을 디디자 다시 한번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뺙.

정확했다. 그것은 내 발에서 나는 소리였다.

“……뭐.”

뺘라라라라락!

경악하여 내려다보니, 선물 받은 내 신발에서 그런 소리가 나고 있는 게 아닌가.

막 번쩍거리며 불빛도 났다. 이건 전생에 일고여덟 살 된 아이들 신는 장난감 신발 같은 느낌인데?

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빠. 나한테 뭘 선물해준 거예요!’

그리고 왜 하필 이런 때에!

그때였다.

“넌 누구지?”

갑자기 홱 몸이 돌았다. 어깨를 잡은 손아귀가 어찌나 강한지, 살점이 떨어질 것 같았다.

‘도둑 주제에 나한테 지금 누구냐고 물어보는 거야?!’

악 소리를 내며 돌아보며 쳐다보는 순간,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헉.”

“너. 누구냐고 물었…….”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드러난 눈.

달빛에 비추는 선명한 보라색의 빛.

‘보라색……?’

보라색. 그리고 드러난 눈썹은 영롱한 백금색이다.

저런 조합을 가진 것이 누구였는지를 떠올리자 기분이 이상야릇해졌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그러면 말이 되는데…….

“뭐, 뭐야.”

당장 내 목이라도 칠 것처럼 달려왔던 주제에 복면 상대가 짚단처럼 풀썩 쓰러진 것도 그때였다.

나는 황망해졌다.

“지가 누구냐고 물어봐놓고 왜 쓰러져……?”

상대는 내가 누구냐며 살벌하게 묻던 사람이 맞냐 싶을 정도로 픽, 가련하게 쓰러진 것이다.

“야.”

처음에 상대가 장난하는가 싶었지만, 저렇게 전신 무장까지 한 도둑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집주인 딸 앞에서 누워버릴 리는 없는 것 같았다.

난 쪼그리고 앉았다.

“저기요. 이거 몰래카메라 아니지?”

조심스럽게 숨죽이며 앞으로 가서 손을 대보았는데.

헉.

“수, 숨이 왜 이렇게 약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대의 복면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걷어냈다.

“헉.”

드러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꿀타래 같았다.

‘얘, 역시 가브리엘이겠지? 백금발에 보라색 눈동자. 그리고 이 나이에 힐링턴에 침입할 수 있을 만한 실력. 또 있을 리가 없어.’

가브리엘.

원작의 남자주인공이었다.

정신이 잠시 멍해졌다.

이게 뭐야.

원작은 시작도 안 했는데, 나는 남주의 도둑질을 목격한 건가?

허허, 남주도 도둑질을 하는군.

“근데 되게 예쁘다……. 얘가 나보다 더 예쁜 것 같은데?”

<영애는 달콤하다>은 거추장스러운 혼약을 파기하기 위해서 로제에게 접근했던 가브리엘이 나중에는 어떻게든 혼약을 치르려 안달하는 줄거리였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냉정한 가브리엘은 로제 앞에서는 제 심장이라도 다 내어줄 것처럼 해사하게 구는 사랑둥이였고.

‘첫눈에 반했다고 했었는데.’

난 부르르 떨었다.

가브리엘은 무서운 놈이다.

로제에 대한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치 없다고 여기는 주제에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상냥하게 대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연기파이기도 했다.

단, 로제에게도 처음부터 상냥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가브리엘이 혼약을 깨려고 했던 근거가 힐링턴에서 정표를 잃어버렸다는 거였는데?’

와.

촉이 왔다.

‘설마 이 녀석?’

아귀가 딱 맞아떨어진다.

정표 훔쳐 간 도둑놈이 바로 가브리엘이었구나!

그래놓고 훔쳐 간 증표로 파혼을 뻔뻔히 따지려 했었던 것이었다. 자기가 훔쳤으면서!

“근데…… 증표 훔치러 온 주제에 왜 날 보고 쓰러지는 거야. 내가 귀신이라도 돼? 그리고 이 상황, 나더러 어쩌라고?”

이걸 도와줘야 해 말아야 해.

‘하지만.’

이 애가 어렸을 때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생각하자 이대로 모른 척 가기 힘들어졌다.

“이번, 이번 한 번만.”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내 요란 벅적했던 신발 때문에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난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였다.

남주가 들키기 전에 일단 여기서 대피시키자.

‘내 팔자야.’

나는 우울한 얼굴로 남주의 팔을 목에 걸쳤다.

으쌰!

“남주면 여주를 구해주거나, 여주 언니인 나도 구해줘야지. 왜 자기가 쓰러져.”

감당하기 힘든 무게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일단은 질질 끄는 형태로 들 수는 있었다.

“으, 무거워! 이러려고 운동한 건 아니었는데…….”

너 정말 나한테 고마워 해야 돼, 남주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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