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후아! 끄응!”
남자애는 무거웠다. 나랑 네 살 차이였으니 현재 열두 살일 것이다.
단련을 열심히 했는지 닿는 팔이나 어깨가 나이에 맞지 않게 딱딱해서 더 무거웠다.
남주만 아니라면 나 몰라라 하며 집어던졌을 정도로.
“으으! 조금만 더 가면.”
난 끙끙거리며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저택을 열심히 돌면서 봐두었던 개구멍으로 향했다.
“다 왔다!”
풀숲에 가브리엘을 내려놓은 뒤 땀범벅이 된 이마를 닦으며 개구멍을 살폈다.
“들어가려나?”
이 정도면 얘가 충분히 들어갈 것 같다.
원래는 밖에 아무도 모르게 드나들 때 사용하려던 곳이었다.
“이대로 밀어넣으면 괜찮을까? 아니면, 혹시 죽, 죽…….”
나는 심란해져서 기절한 가브리엘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다시 한번 손가락을 코앞에 대보았다.
“넌 왜 하필 내 앞에서 쓰러져가지고.”
*
시어스는 딸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힐데아는 똑똑하고 명석했고 차분했으며,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리고 로제리엘은 씩씩하고 명령하며, 누구에게나 쉽게 친화적으로 구는 성격이었다.
성격이 다를 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었다.
그나저나.
“하아. 이제 아이들의 축언을 공표해야 할 텐데.”
빌어먹을 전통들.
남의 축언에 무슨 굶주린 늑대 새끼마냥 관심이 많은 것인지.
“문제는 힐데아의 축언이군.”
시어스는 이를 갈았다.
안 그런 척하면서도 황제도 그것을 궁금해하고 있으리란 것을 안다.
젊었을 적 그는 오로지 황제의 검에 충실했지만, 이후에는 엘리자베스에게 심장을 바쳤고, 그 이후 지금까지 두 딸이 그의 세상이었다.
황제나 다른 귀족들이 그의 생각을 알면 불충이라 윽박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엘르 제국이 만약이라도 그의 딸들을 이용하거나 해하려 든다면, 그는 귀족의 작위고 나발이고 다 내던지고 딸들과 함께 망명할 마음도 있었다.
그만큼 걱정이 많았다.
“로제리엘의 축언은 <화려하게 꽃피리라>.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주 좋은 것이지만, 위험한 축언이지.”
그로 인한 이능은 로제에게 깃들었다.
그 아이가 요정처럼 걷는 걸음걸이 하나, 숲의 이슬처럼 통통 튀는 웃음소리 하나,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행동 하나에도 상대는 마음을 빼앗기고 호감부터 주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설령 아이를 해치려는 적이라 할지라도.
그 작은 순간의 방심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생각하면, 로제리엘은 오히려 위험한 일이 적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힐은.’
아직 당사자인 힐데아도 모르고 있는 그 축언.
처음 듣자마자 엘리자베스는 창백하게 질렸고, 시어스 자신도 다리에 힘이 풀려 꺾일 뻔했다.
축언을 전달하는 신관은 최고 신관의 말을 전하며 말했다.
‘아가씨께는 운명이 없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소. 지금 뭐라 한 것이오?’
‘네. 운명이 없습니다. 그것이 축언입니다.’
‘그게, 그런 게 어찌 축언이 될 수 있단 말이오!’
‘정해진 운명이 없다. 그것이 모든 전언이었습니다.’
‘정해진 운명?’
그 뒤로 수많은 시간을 골똘했다.
그게 신관의 말대로 정말 불길한 축언인가?
힐데아는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글을 떼었고, 말도 유창하게 하기 시작했다.
온갖 지식을 습득했고 꼭 두 번째 생이라도 사는 사람처럼 온갖 예절 교육과 귀족 집안에서 배우는 모든 것들에 두각을 나타냈다.
흥청망청 놀면서도 헤헤거리는 로제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그게 이능은 아닐 터.’
그래서 걱정이었다. 만약 저 축언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운명이 없다는 것은 곧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뜻과도 같지 않겠는가.
없는 것은 무엇이든 쓸 수 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힐데아는 너무 노력했다.
작은 아이가 아등바등하는 것이 눈에 보여, 안쓰러워 주변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르며 바라볼 정도였다.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사람처럼.
열심인 것은 기특했으나, 무언가에 쫓기고 불안해하는 모습 같았다.
“부모가 안정을 주지 못하는 것 같지 않나.”
이제 고작 여덟 살이었는데, 힐데아는 이미 중등 아카데미 기본 학문을 모두 뗀 상태였다.
‘설마 너무 똑똑한 아이라 그때의 일들을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
시어스는 손에 얼굴을 묻고 탄식했다.
어리석은 자신이 엘리자베스가 떠나기 전에 아이를 방치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렸다.
지금도 로제에 비해 살갑게 대하지 못하는 것 같아 힐데아가 그 일로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어떡할는지.
‘너무 소중해서.’
얼마나 수줍고 부끄러움이 많은지, 힐데아는 말을 건네면 시선을 돌리거나 혹은 눈을 깜빡이며 굳어버렸다.
그래놓고 로제와 이야기하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시선이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다.
그래서 선물을 주는 여덟 번째 생일을 무척 기대했다.
그 수줍은 아이라도 그 선물을 보면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다.
힐데아는 신기하게도 달리는 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길렀는데, 보통 귀족의 자제들은 잘 하지 않는 훈련 방법이었다.
특별히 그것을 위한 편안한 신발도 신지 않는 법이라 고심하다가 오로지 힐데아만을 위해 맞춤 제작한 신발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여러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
‘제가요, 제가 할게요!’
‘로제. 네가 말이냐?’
구체적인 모양과 기능은 놀랍게도 항상 해맑기만 한 로제가 그려냈다.
그림에 천부적인 재질이 있는 그 아이는 쓱쓱 그리더니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새의 것을 가져온 것이다.
‘얼마나 대단했는지. 역시 내 딸들은 천재인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 뒤는 그의 몫이었다.
천문학적인 재료를 쏟아 붓고, 인력을 퍼부었다.
모든 방어와 공격 마법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는 신발을 보며 그는 이와 비슷한 물건들을 앞으로 딸들에게 꾸준히 선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세상은 너무 위험하다.’
힐데아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제가 신고 있는 신발이 어떤 물건인지.
그리고 힐링턴의 아이가 그런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도 굳이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특히 이 저택 안에서는 그 아이를 해하려는 움직임이나 그 애가 무언가에 위협을 느끼며 도망가게 되는 순간에는.
‘온 기사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경고가 전달되겠지.’
그때였다.
문이 빼꼼 열리고, 타박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 자그마한 머리통이 쏘옥 들어와 눈이 마주쳤다.
“로제, 잠이 오지 않느냐?”
“아빠아. 언니가 없어요.”
“또 운동을 하러 간 모양이군.”
“언니는 너무 열심히 해. 언니랑 자고 싶은데에.”
“이리 와라. 아비가 안아주마.”
“싫어요. 제가 안길 건데요!”
도도도 뛰어온 아이가 품에 폭 안겼다.
까르륵 웃는 웃음소리가 무척이나 맑았다.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신발을 꼭 껴안고 수줍게 웃던 힐데아가 생각났다.
평소에도 그리 자주 웃으면 더 보기 좋을 텐데…….
‘아니. 아니지. 그렇게 웃었다가 쓸데없는 잡벌레들이 꼬이기라도 하면.’
그래서 힐데아의 손을 잡고 사귀겠다는 망발을 지껄이는 놈이 나오면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사랑스러운 둘째 딸 로제도.
“아빠, 슬퍼요?”
워낙 팔불출 같은 생각에 빠져있던 터라 로제가 그리 말했을 때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하지?”
“오늘은 기쁜 날이기도 하지만 슬픈 날이기도 하잖아요.”
내려다보니 말똥말똥한 눈을 깜빡이며 아이가 무언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
“네 엄마 말이구나.”
“으응. 엄마, 저흴 두고 떠났어요.”
“떠난 게 아니다. 너흴 세상에 엄마가 보내준 거야.”
“핏, 그게 그거지.”
“아니야. 달라.”
한때는 바보 같은 생각도 했었지만, 시어스는 이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힐데아. 로제리엘.
그의 두 딸은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엘리자베스여도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리운 날이기도 하지만, 너희 둘이 태어난 날이다. 이 아비에게는 일 년 중 그 어떤 날보다 행복하고 기쁜 날이야. 그러니까 아비가 슬퍼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으응. 알았어요. 나도 아빠 최고로 좋아요.”
배시시 웃는 뺨을 살짝 꼬집어주며 물었다.
“거짓말도 잘하는구나. 아빠보다 언니를 제일 좋아하는 걸 아는데.”
“앗. 들켰다!”
바로 그때였다.
저택을 울리는 경보가 터진 것이.
시어스는 안색을 굳히며 로제를 제 의자에 앉히며 일어났다.
이 알림은 힐데아에게 선물로 준 신발에서 발생한 것이다.
평소 놀라는 일 하나 없는 그 침착한 아이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로제에게 상황을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이미 그 아이는 의자에 착 하고 제대로 된 자세를 잡고 팔짱을 끼며 근엄하게 속삭였다.
“로제 여기 씩씩하게 있을 거예요.”
“……움직이지 말고, 나오지 말고.”
“응! 여기 있을게요. 언니랑 손 꼭 잡고 오는 거야. 아빠, 약속!”
그는 웃으며 작은 손을 꼭 잡은 뒤, 바람 같이 뛰어나갔다.
힐데아!
*
소설에서 그런 건 못 봤는데 혹시 얘 심장이 안 좋다거나 한 건가?
“이걸 어쩌지.”
얘를 살리겠다고 사람들을 불러오면 반드시 잡힐 것이고, 그대로 내보내자니 밖에서 가브리엘을 구해줄 사람이 있는지 확신을 할 수가 없다.
사실 내가 이렇게 절박하게 도울 일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입술을 한번 질끈 깨물고, 나는 다친 날개를 펼치고 날아갔던 새를 떠올렸다.
‘어쩌면 내 이능. 사람에게도 통할지 몰라.’
이건 모험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이지 않은가. 이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서 쓰러져 있는 소년의 가슴팍 위에 올렸다.
정말 통할지 안 통할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몇 번의 연습 끝에 나는 의도적으로 내 이능을 무언가에 발휘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눈을 감고 상대를 치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속삭였다.
곧 몸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며, 따뜻한 것이 상대에게 퍼지는 확신이 들었다.
‘됐다!’
약해지던 호흡이 원래의 속도와 정도를 되찾는 것도 똑똑히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나는 미련 없이 가브리엘을 개구멍으로 밀어넣었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 보지 말자.”
아, 추워서 입 돌아가지 않게 걸치고 있던 담요도 상냥하게 몸에 둘둘 말아주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힐링턴에 악감정 가지지도 말고. 그리고 나도 기억하지 말고.
“난 나 사는 것도 힘든 사람이거든, 가브리엘.”
이때만 해도 난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했다.
원래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다른 곳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처럼, 내 작은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그리고 원래 가브리엘이 훔쳐갔어야 할 증표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면서 상황이 어찌 급변하게 되었는지도.
“아아. 어쩌지?”
그저 누군가 침입한 것을 알게 되었는지 불빛이 번쩍이며 난리가 난 힐링턴 저택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터덜터덜 저택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호된 질책도 누군가의 눈초리도 아닌 격렬한 포옹이었다.
어?
“힐! 아가!”
단단한 품에 이마를 콩 박았지만, 고개를 드니 날 껴안은 것은 아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