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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1화 (11/155)

11화. 혼담이라고요?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로 아빠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설마, 날 여태 찾아다니셨나?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이 아빠가 얼마나…….”

그 격렬해보이는 반응에 난 얼떨떨했다. 아빠의 이런 표정은 처음 봤다.

“걱정, 하셨어요?”

“당연한 소리를! 이 아빠가, 얼마나.”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당황해서 그 생각은 못 했어요.

아니, 그렇게 찾고 계실 줄 몰랐어요…….

이상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는 것은 알겠다.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도 아니고, 차가운 무표정도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빠 같은 얼굴이었는지도.

그냥 아무 말도 하기 힘들어 아빠의 옷자락을 꾹 잡았다.

“아니다, 괜찮아. 놀라지 마라. 아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되었다. 되었어.”

그렇게 연신 중얼거리는 아빠 품에 고개만 푹 박았다.

생각보다 아빠는 나를 거북해하기만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도. 나도 그거면 되었다.

*

‘아.’

어제 아빠의 품에 안겼다가 그대로 잠들었던 듯, 눈을 떴을 때 바로 보인 것은 코오, 코오 닿는 누군가의 숨결이었다.

‘벌써 아침이네.’

입을 헤 벌리고 오물거리다가 다시 헤 벌리고 자고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자아이.

그리고 그 여자애는 놓기 싫다는 듯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로제.”

내 여동생이지만, 참으로 찐빵 같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찐빵.

뺨이 저렇게 말랑하고 귀여워 보이면 어쩐다지?

‘상상이 안 가. 그 도둑놈이랑 우리 로제랑 사귄다는 미래가.’

생각이 그 남자애로 흘러갔다.

개구멍으로 밀어넣었던 그 애는 어떻게 되었을까.

로제의 말랑한 뺨을 한 번 쿡 찔러보고, 한숨 더 잘까 생각하며 늘어지게 하품하던 순간이었다.

벌컥!

문이 격하게 열리고, 누가 봐도 바빠 보이는 얼굴의 리라가 바람처럼 뛰어들어왔다.

“리라, 왜 그래?”

“아가씨! 힐 아가씨, 깨어계셨군요. 잘됐어요. 로제 아가씨만 깨우면 되겠네요. 아가씨, 얼른 일어나세요. 지금 그렇게 늘어지게 잘 때가 아닙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얼음 같은 차분함의 귀재, 리라가 뭐에 저렇게 놀라서.

심지어 고개를 늘어뜨리며 자고 있는 로제를 일으켜서 앉게 하기까지 했다.

더 재우지 왜 저렇게 깨워.

한소리를 하려고 했을 때, 로제가 그으응 소리를 내며 한쪽 눈만 간신히 떴다.

“무야아아, 더 잘 껀데에.”

“안 됩니다. 어서 눈 뜨세요. 양쪽 눈 다. 왜 아가씨는 아침잠이 이렇게 약하신 거예요.”

“힝.”

“힐 아가씨도 그러고 계시지 마시고 얼른 나갈 준비 하셔야 해요. 어서요. 자 다들 얼른 들어와서 아가씨들 준비 시켜.”

리라의 호령 아래 다른 시녀들이 우르르 뒤따라 들어왔다.

우리는 순식간에 그들에게 인형 옷 입혀지듯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씻고, 정리를 당했다.

로제에게는 화사한 분홍색의 드레스가, 그리고 내게는 차분한 노란색의 드레스가 입혀졌다.

꼭 파티장에라도 가는 것 같군.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이젠 설명해줘야지.”

“내려가 보시면 아실 거예요.”

뭐야. 전쟁이라도 난 건 아니겠지?

‘어, 진짜 그럴 가능성도 있나?’

난 심각해졌다.

실제로 옆 동네의 영지에 영지전쟁이 발발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했다.

<영애는 달콤하다>의 내용에는 로제가 사는 영지가 불탔다거나, 전쟁이 났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이미 내가 태어난 시점에서 얼마든지 변수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증명됐지 않은가.

“생각하지도 않은 손님이 와서 지금 저택이 난리가 났답니다.”

“손님?”

대답해준 것은 다른 시녀였다. 몇 번 얼굴을 보아 이제는 익숙해진 시녀, 시엔이었다.

바로 얼른 말을 해주었으면서 눈을 데구루루 굴리는 것이 언제나 나와 마주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시녀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난 애써 웃으며 친절하게 인사해보려고 했다가, 되지도 않는 노력은 과감히 포기했다.

대신 무뚝뚝하게나마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설명해줘서 고마워, 시엔.”

“…….”

“시엔?”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난 시무룩해졌다. 아, 첫 시도는 실패인가보다.

좀 씁쓸해졌다. 그렇게 내 얼굴이 무섭고 거북한가.

아니면 이름을 불러서 거북한가?

그래도 어젯밤 아빠의 행동에 씩씩함을 얻었던 나는 차분히 거울 속을 바라보며 잠시 내 얼굴을 응시했다.

용기를 내자.

*

‘아가씨가, 아가씨가 내 이름을 불러주셨어!’

옆에서 방방거리며 발을 구르고 있는 시엔과, 그런 시엔을 매섭게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녀들을 힐데아는 죽어도 알지 못하리라.

시엔은 그대로 쓰러지고 싶은 것을 참으며 특히 질투의 화신처럼 쏘아보는 리라를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

꼬소하다! 맨날 너만 아가씨께 이름 불리며 기고만장하더니!

상황은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시엔은 이 일을 대화 노트 속 모든 이들에게 자랑하기로 마음먹었다.

*

그렇게 겨우 옷시중을 받으며 로제와 함께 우아하게 내려왔는데.

‘전쟁이 아닌 건 다행이지만.’

이런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지.

“…….”

“…….”

힐링턴 저택이 왜 뒤집혔는지, 그 낯선 손님을 보자마자 알아챘다.

설마 그 손님이 쟤일 줄이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가브리엘.

그는 바로, 내가 어제 개구멍을 통해 구해준 그 소년이었다.

천사 같은 이목구비와 화사한 머리카락, 그리고 그런 주제에 냉정하고 차가운 얼굴을 가면처럼 뒤집어쓰고 있는 소년.

보라색 눈동자는 불빛에 반사되어 다채로운 영롱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겉모습은 무척 아름답지만, 가브리엘이 로제가 아닌 사람에게 얼마나 냉혹하고 차가웠는지를 잘 알고 있어 은근한 긴장이 타고 올라왔다.

그러다가 어깨를 떨며 정신을 차렸다.

‘아니지. 도둑질은 쟤가 했는데, 왜 내가 긴장해야 해?’

생명의 은인도 나고, 숨겨준 것도 나고, 도와준 것도 난데 왜 내가 눈치를 본단 말인가.

“아버지.”

“……힐. 왜, 아버지…….”

“준비하느라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

응? 이상하다. 왜 아빠가 좀 서글퍼 보이지?

나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느끼며 아빠 쪽으로 가서 섰다.

어린아이처럼 아빠, 아빠하고 매달릴 수 없는 일. 더불어 아직 예법에 어두운 로제를 옆으로 숨겼다.

‘이건 소설에 등장하지 않은 일이야. 그러니까 가브리엘은 아직 로제를 사랑하지 않아.’

차분히 숨을 내쉬며 기억하고 있는 귀족의 예법을 떠올렸다.

‘틈을 보일 순 없어.’

이미 공작과 공작이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므로 우리는 기척을 내고, 각자 자리에 의자를 빼고 앉으면 그만이다.

시선이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그러했을 것이다.

“…….”

“…….”

침착하게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나는 가브리엘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뭐, 야?’

아니다.

저건 그냥 쳐다보는 게 아니라.

‘지금 날 노려보고 있어?’

저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런 걸 배은망덕이라고 하지 않나?

그러나 당황도 잠시였다.

포커페이스로 얼굴을 숨기는 법을 가장 먼저 교육받았던 나는 이런 일에 익숙했다.

적의를 보이는 사람에게도, 호의를 보이는 사람에게도 쉽게 속을 보여주지 말라.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할까요?”

네가 먼저 객이 되어 찾아왔으니, 먼저 운을 띄워야지. 이 자식아.

그렇게 예의 없다 돌려 까니, 소년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빠 쪽을 돌아보니 한쪽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응? 설마 지금 웃음을 참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미안합니다, 영애. 저는 벨키우스의 가브리엘입니다.”

짤막한 설명이었고, 이번에는 내가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인사했다.

“전 힐링턴의 힐데아, 만나뵈어 영광입니다. 이쪽은 힐링턴의 로제리엘이에요.”

잠시의 침묵이 흘렀으나, 나와 가브리엘의 눈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가 내려오기 전까지 테이블을 감돌고 있던 살벌한 분위기를 보아, 가브리엘이 유쾌한 소식을 들고 온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긴. 원작이 어쨌든 증표를 훔쳐서 흠을 만들려고 했던 애니까.’

하지만 로제리엘을 보자마자 어떤 반응을 할지 알았는데…….

생각보다 로제에게 향하는 가브리엘의 시선은 넋이 나갔거나, 사랑에 빠진 눈빛과는 거리가 있었다.

퍽 냉담했다.

아니면 철저히 무관심했거나.

여러모로 이상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이런 일은 없었어. 설마……. 어제 못 훔쳐 가서 이렇게 된 건가? 황제가 우리 가문을 견제하고 있나? 그게 아니라면 왜 가브리엘이 벌써 움직였지?’

머리가 혼란했다.

똑바로 바라보는 가브리엘의 시선이 나와 로제를 번갈아 바라봤다.

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으나, 마른침이 꿀꺽 삼켜졌다.

그 시선이 꼭 기억 속의 누군가를 가늠해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마, 어제의 날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의심하는 순간, 소년의 시선이 내 옆에서 헤헤 웃고 있는 로제에게 향했다.

아.

안도와 알 수 없는 기분이 동시에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역시 로제를 찾아온 건가 봐. 괜히 이상한 의식을 해서는.’

“벨키우스 공작.”

바로 그때 아빠가 더 이상의 대치는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문을 여셨다.

“갑자기 이런 무례한 방문을 한 이유를 들어야겠다. 그것도 내 딸들을 불러 달라 청하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응? 우리를 청했다고?

깜짝 놀라서 바라보니, 아빠를 보며 천천히 유려한 웃음을 그리는 가브리엘이 보였다.

가식인 것을 아는데도 그 미소가 너무 어여뻐서 순간 넋을 잃고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어쩐지 어딘가에서 빠득 빠드득 이가는 소리가 울렸던 것 같기도 하고.

“저는.”

그때 가브리엘이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힐링턴과 벨키우스의 혼담을 청하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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