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2화 (12/155)

12화. 허락해주신다면 머무르겠습니다.

아빠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나도 눈을 크게 떴다. 왜 갑자기 전개가 그렇게 되지?

“지금 뭐라? 힐링턴과 벨키우스의 혼담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아빠의 눈썹은 사정없이 꿈틀거렸다. 우리 쪽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좋지 못했다.

“이제 와서?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벨키우스?”

“아니오. 때가 되었지 않습니까.”

한마디도 지지 않는 가브리엘은 어린 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뻔뻔했다.

“기가 막히는군. 그때가 너만 만족하는 때인가?”

아빠는 황당하다는 투가 역력했다. 그리고 나 역시.

아니 왜 지금. 쟤가 로제를 언제 봤다고 저렇게 바뀌었지?

그리고 어제는 혼담 파하려고 도둑질하려고 했었잖아.

내가 다 봤는데?

나는 분연히 의자를 떨치고 일어나 “여러분, 쟤가 어제 침입자예요!” 하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을 가까스로 참았다.

무슨 수작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주인공들 사이에 알 수 없는 불꽃이 튀었다고 하기에는, 로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예쁜 소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원래는 파혼하려고 찾아왔었는데, 그게 갑자기 바뀐 건가?’

나는 아빠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아빠도 얼떨떨해보였다. 사전에 이야기가 된 것이 아니라는 뜻.

사실 벨키우스 공작가와 힐링턴 공작가가 이어지는 것이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로제리엘과 가브리엘이 얼마나 아름다운 연인이 되는지 나는 이미 미래를 다 알고 있었고, 그것을 생각하면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소설에 없던 일이 급진적으로 진전되는 것에 대해 불안함은 있었다.

‘뭘 해야 하지.’

아빠는 뭐라고 할까.

정작 로제보다 내가 더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그리고 아빠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안 돼.”

잠시의 침묵.

응? 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공작, 지금 뭐라 말씀하셨-”

“안 돼.”

그 거절을 믿을 수 없어하는 사람들을 향해 아빠는 도끼를 찍듯 다시 확언했다.

“절대 안 돼. 물러라.”

“공작?”

“싫다. 내 딸들은 물건이 아니다. 네가 원하면 하고, 아니면 거절할 이유도 없다.”

“…….”

“그러니 꺼져라. 좋게 말할 때.”

그 짜증 가득한 대답에 나 뿐 아니라 가브리엘, 그리고 그의 뒤에 서있던 벨키우스 가문의 기사들도 당황한 듯했다.

나도 아빠가 저렇게 퉁명스러운, 꼭 음, 삐친 아이 같은 말로 거절할 줄은 추호도 몰랐다.

그런데 가브리엘도 만만치 않았다.

“싫은데요.”

“뭐, 라?”

“싫다고 했습니다.”

소년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 해사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공작은 황제 폐하의 명령서를 거부하실 생각입니까? 황제께선 힐링턴을 신뢰하고 계시던데.”

아빠의 입술이 비틀렸다.

“혼담은 명령이 될 수가 없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여태까지 그래서 미루었던 것은 벨키우스 공작, 너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후계자의 위치에 있어 불안하여 혼담 이야기를 미뤘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꺼릴 이유가 없지요.”

“하!”

아빠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오히려 어깨를 흠칫 떨었다.

“지나가는 개도 안 믿을 헛소리를 늘어놓는군. 거짓말을 하려거든 입에 침이나 바르고 하라.”

“흠? 이상합니다. 제가 그렇다고 하는데 지나가는 개가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역시 남자주인공.’

뭔 애가 저렇게 말을 잘한담.

이제 겨우 열두 살 된 어린아이가 어른과 마주치며 설전을 나누고 있는데 접전이 팽팽했다.

“공작. 저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게 아닙니다. 증표를 나누어 가진 가주로서 응당한 권리를 주장합니다.”

“…….”

“그건 공작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아실 텐데요?”

“이 하룻강아지가 어디서 감히 협박질이란 말이냐.”

으르렁거리는 맹수처럼 저조한 아빠의 음성이 꽤 두려울 법도 했건만, 가브리엘은 부드럽고 신사적으로 웃음 지었다.

“따님은 두 분이시니 결정은 힐링턴에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가리켰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나는 미간을 찌푸렸고, 로제는 재미있다는 듯이 입술을 휘었다. 아빠는 내 마음과 통한 듯 빈정거렸다.

“대단한 아량을 베푸는 척하는구나.”

“하지만 그 전에, 저도 나름대로 선택을 받기 위한 노력할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군요.”

“뭐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브리엘은 정중하게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웃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곧 전쟁터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그 전에 기회를 청하겠습니다.”

“하여 그 기회라는 것을 주면, 이후 내 딸들이 거절하면 어찌할 것이지? 얌전히 물러나겠다?”

“……얌전히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수긍은 하지요.”

나는 이상한 불길함을 느끼며, 가브리엘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어떠십니까? 힐데아 영애.”

무슨 기회.

그리고 따님 두 분이 여기서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쟤는 어차피 로제와 약혼할 텐데.

‘그리고.’

이상했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가브리엘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쟤가 날 왜 저렇게 무섭게 보는 거지?’

노려보다시피 한 집요한 시선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로제를 향했을 때의 조용했던 눈빛과는 전혀 다른 뜨거운 시선이었다.

어찌나 집요한지 고개를 돌리고 움직여도 그 움직임조차 따라오는 느낌이었다.

순간 엄청나게 억울해졌다.

‘기억은 못 해도 내가 생명의 은인인데, 이런 취급은 너무 하잖아?’

이런 경우에는 보통 구해준 사람에게 반하는 거 아닌가.

그런 걸 바란 건 절대 아니었지만 저렇게 원수 보듯 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씁쓸해져서 시선을 돌렸다.

“제 의견이 중요한가요?”

“네, 중요합니다.”

“어차피 정해져 있는 거잖아요.”

“그래도, 중요합니다.”

희미한 호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도 상처를 받았다.

가브리엘이 얼마나 처세술에 유능한지 알아서, 숨길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내가 싫은 모양이라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한때는 로제라 착각했을 때, 저 소년을 만나면 어떤 말들을 해주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뇌한 순간들도 있었는데.

나는 고개를 들어 아빠를 바라봤고, 시선이 마주쳤다.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답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에 나는 로제 쪽을 돌아봤다.

“난 아무래도 상관 없을 것 같은데. 로제, 너는 어떠니?”

“으응? 언니, 뭐라고?”

로제는 꼭 다른 짓을 하다가 놀란 사람처럼 굴었다. 난 상황도 잊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우리 천진난만한 로제가 쟤랑 결혼해야 한다니. 상상도 가지 않는다.

“저 제안,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묻고 있는 거야.”

로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으응? 그러니까아. 저 오빠가 우리 집에 머문다는 거지? 언니랑 나 둘 중의 한 명이랑 결혼하려고?”

“컥! 쿨럭!”

솔직담백한 말에 벨키우스 가문의 기사 중 누군가가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로제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우리 중에 오빠를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하는 거야? 둘 다 거절할 수도 있구?”

“그렇겠지.”

그리고 그건 너란다, 로제.

로제가 빙글 웃었다.

“재밌을 것 같은데. 언니는?”

역시나 예상한 답이 돌아왔다.

“……네가 좋다면 언니도 좋아.”

그것만으로도 괜찮다는 듯 로제가 박수를 치자, 방 안의 날카로워진 분위기에 훈풍이 돌았다.

로제는 눈을 반짝이며 가브리엘 쪽으로 몸을 당겼다.

후작 부인이 옆에 있었다면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다고 혼났을 모양새였다.

“그러면 오빠, 여기 머무르는 거예요? 떠나기 전까지? 응?”

“영애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얼씨구.

내게 말할 때와는 달리 로제를 향해 말하는 목소리는 어쩐지 비척비척 힘까지 없어 보였다.

꼭 내치지 말아달라 애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고 있는 난 기가 막혔다.

‘연기 잘한다더니 정말이네.’

그때, 아빠가 테이블을 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결정 났군.”

그러나 경고와 같은 말을 던지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키는 결정이 아니었다는 걸 기억하라. 머무는 동안 조용히 잘 지내다 갔으면 좋겠군. 벨키우스 공작.”

잘 지내라는데 왜 꺼지라는 것으로 들릴까. 신기한 일이다.

언제 로제 앞에서 풀이 죽었냐는 듯 가브리엘도 날카롭게 응수했다.

“그리하지요, 힐링턴 공작. 일자를 정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쯧.”

파직, 하고 전기가 튈 것 같은 모양새를 바라보며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시간이 좀 앞당겨졌을 뿐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가브리엘을 좋아하게 될 일도, 가브리엘이 날 좋아하게 될 일도, 가브리엘과 로제리엘이 결혼하지 않게 될 일도 없을 테니까.

*

“괜찮으십니까?”

어떤 힘든 일도, 궂은일도 꿋꿋하게 이겨내 왔다. 그런데 고작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눈 것이 이토록 긴장될 일인가.

가브리엘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기력이라도 잃은 사람처럼 의자에 몸을 기댔고, 답지 않은 그 모습에 부관의 얼굴은 걱정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이상했나?”

“네?”

“모습, 이상했냐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늘 대처도 충분히 잘하셨습니다.”

오히려 부관은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대체 왜, 왜 이렇게 일을 돌아가게 하는 것인지.

“하지만, 주군.”

“…….”

“왜 오늘 그렇게 하신 겁니까?”

왜.

왜라.

소년은 스스로도 묻고 싶었다.

지금 자신의 상태가 왜 이런지.

*

<그 어떤 것도 뚫지 못하리라.>

가브리엘 폰 엘른 벨키우스.

황제의 친척이자 가장 강력한 무력을 가진 벨키우스 공작가의 후계자는 그런 축언을 받고 태어났다.

숨만 쉬어도, 그냥 살아만 가도,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강해진다는 타고난 검.

‘하하! 제국의 큰 복이로구나!’

황제는 크게 웃으며 기뻐했다.

그러나 완벽하기만 한 것은 없는 법. 아무도 몰랐으나, 그 강력한 축언에는 허점이 있었다.

그의 심장은 얼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