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심장이 뛰어
그것은 소년이 자라나면서 나타난 문제였다.
‘도련님. 슬퍼하지 마십시오, 라키는 좋은 곳에 갔을 겁니다.’
‘슬퍼하는 게 머야?’
‘도련님? 라키가, 도련님이 키우던 개가 죽었잖아요.’
‘웅. 죽어써. 그런데?’
‘맙소사.’
소년을 꿰뚫지 못하는 것은 검이나 상대뿐이 아니었다.
그는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흥미가 없었다. 타인에 관한 관심도 그의 심장에는 머물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상 소년을 잡고 흐느꼈다. 그것조차 소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아이를 살아 있다고 보아야 할까요?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데. 이 아이가 살아가면서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게 생기기는 할까요? 사랑은, 누군가를 사랑하기는 할까요?’
‘여보. 진정하오.’
‘어떻게 진정해요! 이따위 힘, 가져가라고 해요. 다 필요 없어! 내 아이의 심장을 돌려달라고 해요!’
슬픔으로 말하던 어머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무엇에 웃는지 어떤 것에 우는지, 그런 것들이 모두 무채색으로만 느껴졌다.
그래도 소년에게 희로애락이 아예 없진 않았다.
다만 둔하고, 무뎠다. 얇은 천으로 덧댄 것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웃고 우는 것도 어색했다.
사랑이나 애정이라는 감정은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잘 느끼는 것은 화와 분노였다.
‘오늘의 일을 잊지 마십시오, 주군!’
‘벨키우스는 오로지 당신의 것입니다, 저 무엄한 것들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굴욕적으로 친척들에게 굴려지고, 위태로운 시기를 잘 견딜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견디는 세월이 끝났다.
마침내 가주가 되어 드디어 벨키우스 공작가의 자리를 완전히 차지하는 순간이 왔다.
그러나 그 때에도 가브리엘의 심장은 그저 고요했다.
그때, 지켜보던 부관은 슬픈 얼굴로 물었다.
‘주군. 정말 기쁘지 않으십니까?’
‘왜. 너도 내가 이해가 가지 않나?’
‘아닙니다. 오히려 주군으로서는 냉정함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슬픕니다.’
그런 가브리엘이었다.
관심도 흥미도 없는 것들이 주변에 널렸다. 힐링턴과의 혼담 역시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귀찮고 껄끄러운 것.
치워버려야 하는 어떤 것.
그래서 꾀를 냈다. 혼담 정표를 훔쳐 거추장스러운 끈을 잘라 내버리려 하였다.
어차피 곧 벌어질 제국 전쟁에 차출되어야 했으니, 혼약의 증표를 끊어내면 힐링턴도 다른 혼처를 찾아 나서게 되리라.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했었다.
어젯밤, 힐링턴에 몰래 침입하기 전까지는.
‘보호 마법이 왜 이렇게 겹겹이 쳐져 있는 거지?’
그는 혀를 차며 가까스로 보호 장벽을 뚫고 힐링턴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증표가 있을 만한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이미 사람의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에 한번 도약할 때마다 거리가 접히듯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뛰듯이 움직이던 어느 순간 시야를 스치는 반짝임을 목격했다.
‘뭐지?’
그건 분명 누군가였다.
이대로 지나쳤다면 마주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그런데도 가브리엘은 몰래 들어왔다는 것도 잊고 움직임을 멈췄다.
‘뭐, 지. 어째서.’
이상하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꼭 동상이 되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저의 모습에 놀라 도망치려는 것을 느끼면서, 까닭 없이 절박해졌다.
안 돼.
가지 마.
가브리엘은 자신의 그 초조와 닮은 감정에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어느새 몸은 알아서 움직였다.
도둑질하러 들어온 주제에 뛰어가는 누군가를 쫓아, 어깨를 잡고 제게 돌린 것이다.
정말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그는 묻기까지 했다.
“넌 누구지?”
그 모든 과정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말도 안 되었기 때문에 가브리엘은 생각했다.
그래, 이건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저 여자애가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해.
그렇게 생각하며 상대가 저를 뚫어져라 마주한 순간.
출렁이며 흐트러지는 반짝이는 은발의 머리카락들 사이로 하얀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딸깍 소리를 내며 작동 장치를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무언가가 변했다.
가브리엘의 심장 속에서.
“…….”
“…….”
상대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의 등장에 깜짝 놀랐을 텐데도 상대는 침착한 성격인 것인지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인형처럼 예쁜 얼굴이었다. 가브리엘은 인간의 미추에 관심조차 없었으나, 어쩐지 소녀는 달랐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쿠욱-하고 무언가가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가브리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견디기가 힘든 감각이었다.
‘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것들이 한꺼번에 몰아친다면, 심장은 어떻게 될까?
그의 무딘 심장은 과부하를 일으켰다. 터질 것처럼 쿵-뛰었다.
‘윽!’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 이후, 다음의 일을 떠올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대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펄떡거리며 뛰다가 호흡을 멈추었다.
그렇게 죽는 줄 알았다.
‘으…….’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누가 옆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것은 심란한 안색을 한 여자애. 쓰러지기 전에 보았던 사람이었다.
알겠다.
‘저 애가 날, 구했나?’
가브리엘은 멍하니 생각했다.
‘저 머리카락은 분명-’
힐링턴의 첫째.
이건 기쁨이다. 그리고 환희였다.
‘이상해.’
소녀를 보자마자 그의 심장은 활로를 찾은 것처럼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어.’
온갖 무채색이던 주변의 풍경도 화려하게 꽃을 피운 것처럼 온갖 색채로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여자애의 선명한 은발과 흰 얼굴, 그리고 무엇에 힘들었는지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 밤공기를 타고 번지는 숨결, 또렷한 붉은색 눈동자.
이유도 모른 채 가브리엘은 그 장면의 모든 조각들을 허겁지겁 제 기억에 퍼담았다.
말을 하고 싶었는데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기회도 없었다.
소녀는 미련 없이 저를 어떤 공간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에.
‘아직-’
다시 의식이 뚝 끊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으윽.’
‘주군! 정신이 드십니까?’
가브리엘은 저를 둘러싸고 있는 다급한 얼굴의 기사들을 마주했다.
‘주군, 아니, 이게 어찌 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혹시 공격받으신, 주, 주군? 얼굴이 왜…….’
‘뭐?’
가브리엘은 몰랐다.
제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그는 천천히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는 박동이 낯설었다. 손발이 떨리고, 푹신한 구름 속을 걷는 것 같았다.
그 애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예전에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은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온종일 그 애를 보고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가브리엘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 감정은 무엇이지?
이게 대체 무슨 미친 기분이지?
내가 미쳤나?
‘천사가.’
‘네?’
‘천사가 있었다.’
‘네?’
잠시 심호흡을 하며 기억들을 정리하던 가브리엘은 주군이 미친 건가, 중얼거리는 기사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계획을 바꾸어야겠다.’
‘어떻게 바꾼단 말씀이십니까?’
‘힐링턴의…….’
어쩐지 이 말을 내뱉기에 굉장히 수줍은 기분이 들었다.
아, 수줍음이 이런 것이었군.
가브리엘은 새삼스럽게 심장께를 문지르며 미소했다.
‘첫째와 결혼할 거야.’
‘……네에?’
*
과거의 회상을 끝내며 눈을 뜨니, 얼떨떨한 얼굴을 한 현재의 부관이 보였다.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러웠습니다. 갑자기 혼약 추진이라니……. 주군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다들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부관은 얌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피식 웃었다.
“나도 몰라. 이유 따위 묻지 마. 그런 것 없으니까. 그냥 그러고 싶었고 행동했을 뿐이다.”
그래, 그야말로 충동이었다.
진짜 미친 거냐는 듯 가브리엘을 바라보는 부관의 얼굴은 괴상망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주군. 정말 이상해지셨습니다. 며칠 사이에 말입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네, 딱 그렇습니다.”
가브리엘은 비식 웃었다.
“뭐, 그 만남이 벼락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죽을 뻔도 했으니까.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힐링턴의 첫째가 궁금하다. 곁에 있고 싶고 다가가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나 첫 번째로 깨닫고 겪어본 욕망에 가브리엘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역대 최연소 공작, 막강한 축언과 이능을 가지고 있는 벨키우스.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니 그를 막을 자도, 꺼릴 것도 없었다.
이후의 과정 역시 가브리엘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빠르게 해치웠다.
그는 가장 먼저 황제를 찾아가 확답을 지었다.
그러나 그렇게 혼담을 부르짖었던 황제는 정작 가브리엘이 그리하겠다 하자 의심부터 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지, 가브리엘?’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폐하.’
황제가 생각하는 어떤 정치적인 이유도 아니었지만, 그걸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말씀드린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 한마디만 하고 뒤로 돌아 나왔다. 헛웃음을 짓는 황제의 목소리를 들었으나, 그는 마음을 굳혔다.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데.’
홀가분하게 떠나려던 전쟁터가 이제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변했다.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이후 만류하는 부하들을 물리고 고집을 피우며 힐링턴으로 진격했다.
더 신중한 절차를 따라야 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몸과 머리가 따로 놀았다.
가브리엘은 너무 궁금했다.
그 여자애에게는 그날밤이 어떤 의미가 되었을지. 그가 느낀 이 충격을 그 애도 느꼈을지. 이 두근거리는 마음과 같을지.
그 소녀도, 자신과 결혼하고 싶을지.
만약 소녀가 거절한다면…….
‘후자는 생각만 해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죽을 것 같은데.”
“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오늘의 냉담했던 힐데아를 생각하니 끝없이 치솟던 자신감이 수그러드는 기분이었다.
모든 과정에 자신이 있었는데, 어이가 없을 정도로 힐데아 앞에 있을 때의 그는 작아졌다.
대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힐데아의 얼굴이 그다지 밝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니 다시금 심장이 쓰려왔다.
그 애는 내가 싫은가?
“엉망진창이야.”
“주군……?”
“다시 한번 말하지. 이유 따윈 없어. 가문의 이득도, 숨겨진 이유도 없다. 그냥 내가 결혼하고 싶은 거야.”
“……오, 맙소사. 주군. 설마.”
더 좋은 첫인상을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반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