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악연인 게 분명해
“심장이 막, 뛰십니까?”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심장이야, 뛰었지.
“그게, 뭐.”
“힐데아 영애만 보면 정신을 차릴 수 없으세요?”
“지금 시비 거나?”
“오, 맙소사!”
가브리엘은 답을 못했고 부관은 그대로 경악했다.
“정치적인 이점을 찾으셔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그냥 그러고 싶어서 혼담을 추진하신 것이란 말입니까?”
“그게, 뭐. 이상해?”
“이상하죠! 주군이라면요!”
부관의 흥분한 얼굴에 가브리엘은 가만히 얼굴을 구겼다.
“이 감정이 뭔데.”
“정말 모르십니까? 아까 힐데아 영애 앞에서의 주군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그게 뭐.”
“평상시 주군이라면 가당치도 않은 모습이지 않습니까. 들어보세요, 주군.”
어리다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능수능란하게 익힌 처세술의 가면도 소녀의 앞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그 사람을 보면 심장이 망가진 것처럼 뛰고, 생각의 모든 끝에는 그 상대가 있으며.”
어떻게 하면 상대의 흥미와 관심을 끌어낼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행동할 수 있었는데.
‘그럴 수 없었어.’
차마 냉랭한 소녀 앞에서 웃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웃으면 따라 웃게 되고, 슬퍼하면 따라 슬퍼하게 되는 그런 감정이요.”
너무 긴장되고, 초조하고, 그 애가 어떤 표정을 할지 보는 것이 두렵고 또 기뻐서.
“주군께서도 그러십니까?”
힐데아는 시종일관 차갑고 살살 맞았으나 한 가지는 명확했다.
“아십니까?”
그때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은발의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자각할 수가 없었다.
첫 만남이 엉망이 된 것이 짜증났다. 도둑질하러 오지 말 걸.
“그런 감정을 우리는 보통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주군. 첫눈에 반했다고 하지요.”
“…….”
가브리엘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후회를 되새기며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아마도.”
그냥 좋았다.
“네 말대로 이게 사랑이라면.”
미치도록.
언제나 거짓으로 감정을 덧씌우던 가브리엘의 눈은, 쌀쌀맞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온화하고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그래.”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그 아이가 그의 심장의 저주를 풀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되지 않았다.
부관과 눈이 마주친 가브리엘은 아주 느릿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 애가 좋아.”
이게 좋아하는 거구나.
*
남주인공, 가브리엘이 우리 집에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했다.
‘나랑 아무 상관 없어.’
갑자기 일어난 일이기는 했지만, 설령 가브리엘이 우리 집에 머물게 되더라도 내게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었다.
로제가 그렇게 방긋방긋 웃으며 좋아했으니 둘이 사이좋게 지내지 않을까 하였고, 가브리엘 역시 로제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으니 이쪽에게는 말 거는 일도 없으리라 여겼다.
‘평상시처럼 지내면 되겠지.’
단순하게 그리 생각했었는데.
꿈에도 몰랐다.
이런 일들이 연달아 터질 줄은.
나는 절망했다.
“뭐야. 대체 왜 이렇게 됐지. 왜 내가, 내가 가브리엘이랑 그런 사고가 난 건데?”
방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한숨을 쉬다가 마음껏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악! 아프잖아!
‘상관이 없다고?’
천만의 말씀이었다.
“너무 상관이 있다고…….”
골치 아플 정도로, 힐링턴에 머물게 된 가브리엘은 내게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
나는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전생에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다시 태어난 건강한 몸으로 달리는 것이 좋았다.
물론 <영애는 달콤하다>의 세계관은 고리타분한 신분제 사회였다.
승마나 사냥 취미는 있어도 나처럼 몸을 직접 움직이며 단련하는 귀족 영애는 괴짜 취급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단련하는 것을 게을리 하고 싶진 않았다.
‘괴짜가 나만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나는 피식 웃으며 내 사랑스러운 동생을 떠올렸다.
‘언니, 언니야! 얼른 올라와 봐!’
‘로제, 너무 높이 올라가면 위험해!’
‘괜찮아아-안 떨어져!’
내 동생, 로제리엘은 나처럼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도 아닌데 가뿐하게 나무도 오르는 괴짜 중의 괴짜였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우리 로제는 분명 태릉이 잃은 인재였을 거야. 분명히 상을 다 휩쓸었겠지?’
까르르 웃으며 높은 나무 위에서 손을 흔드는 로제가 부러웠다.
나도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가 알면 펄쩍 뛰실 것 같아 홀로 조용히 위험하지 않을 높이의 나무로 꾸준히 연습했고, 결국 노력한 보람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말이지.
“와, 공기 너무 좋다. 전생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공기란 말이야. 산 좋고 물 좋고…….”
꽤 높은 나무 위에서 영지가 멀리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평화롭네. 이렇게 계속됐으면 좋겠다.”
이 맛에 로제가 자꾸 수업을 빼먹고 나무 위로 오르는지도 모르겠다.
후작 부인이 본다면 가문의 체면을 생각하라며 펄쩍 뛰겠지만 지금은 보는 사람도 없다.
‘더 나이를 먹으면 이것도 못 하게 되겠지?’
상상하니 퍽 아쉬웠다.
난 킥킥 웃으며 이제 내려가려고 엉거주춤 다리를 뻗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윽!”
편히 움직이기 위해 입은 승마복에 장식된 단추가 하필 나뭇가지에 걸린 것이었다.
“……어?”
파스슥,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뒤로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감각.
“!”
몸이 쑥-아래로 미끄러졌고, 핏기가 싹 가셨다.
악!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떨어지면 분명 어딘가 부러질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 것은 내가 아니었다.
“아악, 주군!”
“주, 주군, 괜찮으십, 이게 무슨, 하늘에서 왜 사람이…….”
“영, 애? 설마 힐데아 영애십니까? 이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영애?”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으…….”
근데 왜 생각보다 안 아픈 것 같지? 저 높이에서 떨어졌으면 적어도 피가 철철…….
난 띵하게 울리는 머리를 붙잡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날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과 내 아래에 누군가가 깔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설마.
얼굴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감각이 섬뜩했다.
나는 눈을 내렸고, 보고 말았다.
“가, 브리엘?”
반짝이는 찬란한 백금발을.
‘너 왜 내 밑에 깔려 있니?’
그건 분명 가브리엘이었다.
가브리엘이 남자주인공답게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떨어지는 나를 공주님 안기로 가뿐히 받아주었다……는 기적이 일어나진 않았다.
“아악!”
난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주, 죽었어? 나 때문에?
“괜, 괜찮…….”
“영애, 잠시 비켜 주십시오!”
경악하며 다가온 기사들이 날 일으켰다.
그러자 축 늘어져 눈을 감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 똑똑히 보였다.
난 눈 뜨고 기절한 것처럼 정신을 놓고 말았다.
‘죽, 죽은 건 아니고.’
힘없이 늘어진 가브리엘은 아마도, 아마도 기절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 엉덩이에 깔려서.
‘헉.’
나 때문에 죽을 뻔한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상상하기 싫은 대형 사고였다.
까딱 잘못했으면 가브리엘은 모, 목이 꺾이거나 큰 사고를 당할 뻔했고 나도 같이 가브리엘 손잡고 요단강을 건널 뻔했다.
‘내가 남주를 또 죽일 뻔한 거지?’
처음에는 날 보고 심장 마비를 일으키더니, 이 무슨 악연이람.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의원!”
미안하고 속상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살벌한 기사들의 시선도 날 겁먹게 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이 반색했다.
“주군, 주군! 정신이 드세요?”
“아. 방금 무슨.”
“힐데아 영애가 나무 위에서 떨어지셨습니다!”
“…….”
파르르 눈꺼풀이 떨리더니 가브리엘이 눈을 떴다.
잠깐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난 소년은 가장 먼저 나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저…….”
나는 대역죄인이 된 심정으로 어떤 말도 못 하고 굳어 있었다.
“미…….”
미안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다친 곳은 없어요? 라고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긴장될수록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버리는 내 미친 고질병은 이런 순간에도 날 괴롭혔다.
안 돼.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정말…….”
보지 않아도 알겠다. 무척이나 딱딱하고 냉정한 내 얼굴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 같지 않을 것이다.
굳어가는 기사들의 얼굴을 보니 알만 했다.
미안해하기는커녕, 네가 내게 사과하라는 도도한 낯으로 보일 것이다.
망했어.
얼마나 억울하고 기분 나쁠지 짐작이 갔다. 뒤에 나올 말들도.
‘욕하겠지. 화내겠지.’
난 맞기 전의 사람처럼 움츠렸다.
하지만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영, 애는.”
“……네?”
가브리엘의 입에서 나온 것은 나에 대한 질책이나 힐난이 아니었다.
보라색 눈은 섬세히 나를 살폈다.
“영애는요.”
처음으로 그 눈이 날 노려보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설핏 들었다.
“다친 곳은?”
충격으로 잠겼으나, 앳된 음색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화가 아니었다.
욕도 아니었다.
어쩐지 입술이 떨렸다.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가브리엘이 다시 말했다.
“영애는 다친 곳이 없습니까. 그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저는, 괜찮아요.”
“영애. 나무는 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떨어지면 위험합니다.”
“그, 부끄러운 모습을.”
부끄러워졌다.
첫인상은 별로였어도, 저 어린애도 날 걱정해주었는데 왜 나는 솔직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지.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데 가브리엘은 산뜻하게 대꾸했다.
“다치지 않았다면 됐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려고 하는 소년의 모습이 유독 인상 깊었다.
그것이 꼭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자신은 괜찮으니, 미안해하지 말라는 듯.
꼭 내 속을 읽은 것처럼.
*
그 사건 이후.
고작 한순간이 사람에 대한 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에 대해서 나는 이제 확답을 할 수가 없어졌다.
괜찮은지 묻던 그 차분한 목소리를 생각하면 가슴 깊은 곳이 따뜻해져 왔다.
‘첫인상은 망했었는데.’
가브리엘은 내 생각보다 착한 애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날 싫어하지 않을지도 몰라.’
물론 그런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