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5화 (15/155)

15화. 짝사랑은 가혹해요

“저, 손님들은 어디에서 머무르고 있어?”

“손님이요? 아가씨께서는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시, 싫어한 것까지는 아니야.”

리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왠지 민망해져서 나는 우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손님들은 별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고요.”

“그렇구나. 별관.”

그럼 앞으로 마주칠 일은 많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리라가 불쑥 물었다.

“손님들에 관해 지시하실 사항이 있으신가요, 아가씨? 방문하실 것이라면 제가 벨키우스 공작님 쪽으로 연락을-”

“아, 아니야. 그냥, 물어봤어.”

내 호들갑에도 무표정한 리라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다가와서 내 머리를 묶어 주었다.

“오늘은 어떤 리본으로 묶어 드릴까요? 골라 보셔요.”

“으응, 왼쪽의 붉은색으로 할게.”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옷도 리본에 맞춰 고르도록 하지요.”

오늘도 리라의 얼굴은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하지만 손길만은 다정해서 이제는 로제에게만 웃어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속상해하진 않는다.

그녀가 내게 친절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제대로 웃지 못하니까 피장파장이지.

“근데 리라.”

“네, 아가씨?”

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로제가 요즘 신이 난 것 같지? 새 손님이 들어와서 그런가. 집 안이 조금 시끄러워진 것도 같고.”

“로제리엘 아가씨는 원래도 그러셨잖아요. 저는 차이를 그다지 느끼진 못하겠어요.”

“아니야, 달라.”

가브리엘이 들어온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집 안에는 몇 가지의 변화가 있었다.

로제의 움직임이 수상한 것도 변화 중 하나였다.

‘좋은 의미겠지.’

우리 활발한 로제리엘 아가씨의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인지, 하루 종일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

짐작하기에는 분명.

‘오늘도 가브리엘에게 갔을 테고. ……벌써 그렇게 좋은가?’

소설에서도 가브리엘과 로제리엘이 특별히 사랑에 빠지는 큰 사건이 있는 건 아니었다.

우연에 불과한 만남들이 이어지고, 그러다가 혼담이 오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둘은 큰 계기 없이 슬며시 품었던 호감들이 불 밝힌 것처럼 서로를 마음에 품었다.

물론 이 소설에서 갈등이나 사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황궁에서 일어날 일.

미래를 생각하면 멀찍하게 도망가고 싶어지기도 했다.

“로제는 벨키우스 공작이 좋은 것 같아. 그냥 바로 로제와 혼약을 결정하면 좋을 텐데.”

리라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렇게 보셨나요?”

“응. 로제도 눈에 띄게 좋아하고, 벨키우스 공작도 로제를 마음에 들어하는 기색이었으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미심쩍은 표정을 한 리라를 보진 못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람도 있다잖아. 그 둘이 그런 경우일지도 몰라.”

“하지만 모두 아직 어리셔요.”

“귀족들은 일찍 약혼해, 리라.”

“흐음, 신난 건 다른 사람인 것 같던데…….”

“응? 뭐라고?”

난 고개를 갸웃했다. 리라가 웅얼거린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잘 못 들었는데.”

리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가씨. 그보다 아가씨는 가보지 않으셔도 괜찮은가요?”

“어?”

“이러다 로제 아가씨와 그냥 확정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답니다. 기회조차 가지지 않으시려고요?”

기회는 무슨.

“응. 그러는 게 나을 거라고 했잖아.”

“벨키우스 공작가라면 모두가 원하는 혼담일 텐데, 아가씨는 정말 관심이 없으신가요?”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설핏 입꼬리에 힘을 잃었다.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다.

바르르 떨리는 작은 움직임이었겠지만, 잠시 리라의 시선이 내 얼굴에 닿은 것도 같다.

“벨키우스 공작이 날 선택할 리도 없고, 내가 그를 선택할 리도 없어.”

“하지만, 아가씨.”

“나무에서 떨어진 얘기, 리라도 들었을 거 아니야. 더 악연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 이야기는 됐어.”

너무 우습잖아. 내가 그 혼약을 욕심낼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구나.

‘깔아뭉개서 죽일 뻔했었는데, 설마 나를 고르려고? 바보나 변태도 아니고.’

난 툴툴거리며 옷을 마저 정리했다.

가뜩이나 나무에서 떨어진 일로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었었다.

‘나무를 타는 것을 뭐라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오늘 얼마나 크게 다칠 뻔했는지 알고 있겠지, 힐데아.’

‘네, 알, 아요.’

‘혼자 있을 때는 나무를 타지 않는 게 좋겠다.’

‘네, 아버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냐.’

‘네?’

‘……아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혼나는 게 얼마나 무섭던지. 마지막에 이상한 말씀을 하셨던 것도 같지만.

“리라, 이제 나갈래.”

난 복잡한 생각을 떨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모처럼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그런 날은 보통 승마를 하거나, 저택의 사람들이 지내는 것을 관찰하곤 했다.

“오늘은 어느 곳으로 모실까요?”

“글쎄. 오늘은…….”

정원 쪽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까르륵,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저건, 로제?’

행복한 듯 웃고 있는 그 얼굴은 내 동생, 로제리엘이 맞았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

정원 끝부분, 활짝 열려 있는 유리 온실 안에서 웃고 있는 소년과 소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것은 바로 저 모습을 보고 만들어진 묘사일지도 모른다.

원래도 밝은 로제였지만, 오늘따라 태양처럼 밝게 빛이 났다.

손으로 귀엽게 턱을 받치고, 상대의 말에 집중하며 로제는 간간히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바람에 따라 살랑이는 분홍색 머리카락에 토끼 같은 붉은 눈동자는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다.

그런 로제에게 해사한 미소를 아끼지 않고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친절한 소년, 가브리엘.

‘닿을 수 없는 둘만의 장소인 것 같네.’

앞으로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소년이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왔을 때가 기대되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내가 소설을 몇 번이나 읽으면서 그려왔던 장면이니, 직접 보면 무척 설레고 기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조금, 외로운 것 같아.’

평소라면 내가 온 기척만 들어도 활짝 웃으며 반겨주던 로제가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까?

‘동생을 빼앗겨 질투하는 언니라니.’

아니면 내게는 딱딱하고 고요한 표정만 보여주는 가브리엘이 로제에게는 저토록 부드럽고 온화하게 웃고 있기 때문일까.

‘이건 좀 아니다.’

이게 만약 질투라면 너무 낯부끄러워지는 감정이다.

내가 정말 여덟 살 여자아이도 아니고 설마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난 입술을 깨물었다. 창피했다.

‘역시 기대는 사람을 상처받게 해. 싫다는 사람 붙잡고 애원하는 취미도 없고. 됐어.’

가브리엘은 나를 불편해하고, 로제 역시 다정한 시간을 방해받길 원하진 않을 것 같았다.

‘잘 해봐, 로제.’

난 아무것도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몸을 비틀었다. 어디로 가볼지 즐겁게 생각하면서.

까르르 울리던 웃음소리가 잠깐 멈춘 것 같았지만, 나와 상관없을 것을 알아 신경 쓰지 않고 사라지기로 했다.

*

가브리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며, 그의 눈앞에 있던 소녀가 영악한 미소를 지었다.

“우응, 우리 언니는 수줍음이 많아요.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가브리엘을 싫어하는 것보다는 어려워하는 게 분명해요!”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가브리엘은 멀리서 다가오는 반짝이는 은색의 물결을 보고 가슴이 부풀었다.

조잘조잘 지저귀는 새처럼 떠드는 로제리엘의 목소리도 한 귀로 흘러들어와 한 귀로 빠져나갔다.

다가오면 무슨 말을 할까.

이번에는 웃어 보일 수 있을까.

넘어졌을 때 다친 곳은 없었는지 다시 한번 물어보면 괜찮을까.

‘나무에서 떨어진 일로 혼났다고 들었는데.’

그 일로 힐데아가 자신을 더 싫어하게 되었을지 생각하면 속이 얹히는 기분이었다.

속상했다.

언제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얼굴 근육은 왜 힐데아 앞에서는 망가져 버리는 것인지.

‘그래도 이번에는.’

조력자가 있으니 다를 것이다.

가브리엘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제 앞에서 까르륵 웃고 있는 분홍 머리의 소녀를 보았다.

명랑하고 천진난만해 보이기도 했지만, 장난꾸러기에 짓궂은 미소에 더 가까워 보이는 소녀, 로제리엘.

이 소녀가 가브리엘의 새로운 조력자였다.

*

며칠 전, 소녀는 불쑥 나타나 말했다.

‘울상이시네요!’

황당했다.

원숭이도 아니고, 이게 공작 영애가 맞나 싶어서.

그는 의심하는 시선으로 눈을 가늘게 떴으나, 나무 위에서 다리를 달랑거리며 흔들고 있는 소녀는 사라지지 않았다.

‘……당신은, 로제리엘 영애?’

‘그냥 편하게 로제라고 부르세요! 저도 오빠 말고, 가브리엘이라고 부를래요.’

감당 못 할 친화력이었으나, 그다지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싫습니다.’

‘어어? 나한테 그러면 곤란할 텐데……?’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러다 로제와 혼약하고 싶은 것이라는 오해를 사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다음 이어진 소녀의 말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근데요, 그렇게 계속 기다리면 우리 언니랑은 못 친해질걸요?’

가브리엘은 깜짝 놀랐다.

아무도 그가 나무 아래서 자꾸만 서성이는 이유를 몰랐는데, 저 천진난만한 쌍둥이 동생 쪽이 이유를 알았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언니 기다리는 거 아니었어요?’

더 놀라운 것은, 눈을 반짝 빛낸 로제리엘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내가 도와줄까요, 공작님?’

*

그렇게 현재.

가브리엘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힐데아가 이쪽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계속 기다렸던 소녀가 아무렇지 않게 몸을 돌려 뒤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절망했다.

‘어째서?’

설마, 나를 보고?

‘피한 거야?’

가브리엘은 심장이 아래로 쑥 내려간 기분이었다.

아마 로제리엘이 말리지 않았다면, 당장 일어나 힐데아의 뒤를 쫓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친해지는 거 도와주겠다고는 했지만, 우리 언니 괴롭히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뭐, 라고 했습니까. 내가 왜 힐데아를 괴롭힌단 말입니까?”

“싫다는데 쫓아가면 그게 괴롭히는 거죠!”

“싫……. 힐데아는 내가 싫다고 했습니까?”

마냥 순진하고 좀 바보처럼 보이던 영애는 어디로 간 것인지, 날카로워진 붉은 눈이 제법 매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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