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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6화 (16/155)

16화. 방해꾼이 될 생각은 없었는데, 왜 자꾸 마주치죠?

언제 노려봤냐는 듯 로제리엘은 순진하게 히죽 웃었다.

“히히, 그런 적 없어요. 언니는 가브리엘 이야기도 꺼낸 적 없거든요!”

아주 말로 죽이는군.

웃으면서 말한 이야기가 오히려 가브리엘을 격침시켰다.

‘관심도.’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없는 건가.’

시무룩해지는 그를 보며, 로제리엘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모습이 심술이 오른 병아리 같았다.

“뭔지 몰라도 언니가 피했잖아요. 우리 언니한테 강요하면 황제 폐하가 와도 엉덩이 때려줄 거라구요! 언니도 적응할 시간을 주고 또 선택할 수 있어야죠.”

“말이 다른데. 분명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으응? 내가 언제요? 언니가 가브리엘이랑 친해지기 싫어하면 안 도와줄 건데요?”

황당했다. 후회도 들었다.

어쩌면 도와줄 사람의 손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닌가? 내가 왜 얘랑 어울리고 있지?

“근데 가브리엘, 우리 언니가 왜 좋아요? 어떻게 좋은데요? 저 하늘의 별보다 더더더 좋아요?”

“그냥…….”

“설마 그냥 예뻐서, 그냥 좋다고 말하면 입술을 빨래집개로 찝어버릴 거예요.”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부담스러워 가브리엘은 살짝 몸을 뒤로 물렸다.

도대체 어디에 그런 사람들이 숨어 있었는지, 시종으로 보이는 이들이 어느샌가 불쑥 나타나곤 했다.

풀숲에서, 정원 안쪽에, 유리 정원 밖에 등등. 곳곳에서 느껴지는 시선들이 이쪽을 어떻게 판단할지도 신경 쓰였다.

“좋다는 것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거라면 맞습니다.”

“에에이, 뭐야. 자신이 없네. 자기 마음도 몰라요? 가브리엘 오빠는 바보구나!”

“…….”

이 작은 소녀가 은근히 강적인 것 같았다. 가브리엘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면 이거는요? 안 보이면 막 우리 언니가 생각나고 그래요?”

이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네. 보고 있으면 행복해지고, 보고 있지 않아도 자꾸 떠오릅니다. 그리고 난 당신과 결혼할 생각은 해본 적도 없습니다.”

“와아……. 단호하긴 한데 정말 기분 나쁘게 말씀하시네요!”

방긋 웃으며 말하는 로제리엘을 보며 이제 가브리엘은 속지 않기로 했다.

세상 꽃 하나 꺾지 못할 것 같은 순진한 얼굴을 하고, 지금까지 계속 푹푹 말로 찌른 상대였다.

더 슬픈 것은 그는 약점 잡힌 상태였고, 상대는 사랑하는 소녀의 하나밖에 없는 쌍둥이 여동생이다.

“나도 가브리엘과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에. 그리고 또?”

왜 힐데아 앞에서도 아닌 여기서 이런 말을 하고 있어야 하나 싶지만, 가브리엘은 조금 수줍게 말했다.

“그냥, 보고 있을 때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을, 조금.”

말하면 말할수록 좌절했다.

가브리엘은 힐데아와 어떻게든 말 한번 해보고 싶었지만, 소녀는 저를 보자마자 인상을 찡그리며 도망갔다.

힐데아는 날, 싫어해.

“와아, 가브리엘, 이제 겨우 열두 살이잖아요. 근데 그런 생각까지 했구나! 조숙하네요!”

자기는 어른인 것처럼 말하는 기묘한 말투였다.

“근데요, 우리 시녀 언니들이 그랬어요. 첫눈에 반했으면 그냥 겉모습만 보지 말고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야 한다구.”

가브리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힐데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눈앞의 쌍둥이 자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알아가기 위해 앉은 것이지만-

“근데 오빠는 모르겠다. 우리 언니가 웃을 때 얼마나 반짝반짝 예쁜지. 모르죠? 히히. 나는 아는데. 부럽죠?”

어쩐지.

“언니는 다정하게 코오 토닥여주는데요, 진짜 기분 좋아요. 언니는 내가 제일 좋다고 했거든요. 부럽죠?”

듣고 있자니, 어쩐지.

“아, 아무것도 모르겠구나. 오빠는 언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계속 기분이 나빠졌다.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나를 놀리고 있는 건가?’

가브리엘은 그의 기사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왕이면 차갑고 정 없어 보이는 힐데아 영애보다는 밝고 천진난만해 보이는 로제리엘 영애와 혼담을 주선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말이었던 것 같다.

‘개소리.’

벌써 부럽죠, 를 몇 번이나 하는 거지, 저 망할 꼬맹이가?

그는 분노를 참았다.

그리고 이를 갈 듯이 말했다.

“그래서 언니분은 무엇을 좋아합니까. 그걸 알려주겠다고 해서 만난 거였다는 걸 잊은 모양인데, 로제리엘 영애.”

“삶의 법칙도 모르시는구나!”

“뭐?”

“원래 뭔가 얻고 싶다면, 누군가에 대한 성의가 필요하거든요! 왜 이렇게 태도가 고압적이지이? 절박한 사람이 누구시더라아? 그냥 확 가버릴까아?”

“…….”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상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붙잡고 정보를 뜯어내야 할 텐데에?”

“…….”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어디를 자주 다니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가브리엘 오빠는 아무것도 모를 텐데? 우리 언니에 대해 아, 무, 것, 도 모르니까?”

감정에 둔한 가브리엘도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저 소녀가 자신을 놀려먹고 있다는 것을.

“무엇을, 원합니까.”

“좋아요!”

지그시 노려보니 로제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어 드디어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언니는 꽃과 화분을 좋아해요. 창틀에 하나씩 놓아서 키우고 있는데, 이제 열 개도 훌쩍 넘었어요. 그리고 전 반짝거리는 게 좋아요, 이왕이면 많이!”

“후자는 듣지 않아도 될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만.”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데에. 언니 그림도 많이많이 있는데에. 언니 얼굴도 생생하게 그리는데에.”

“……반짝이는 것, 기억했습니다.”

가브리엘은 열심히 기억하려 노력하며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참 이상한 일이었다.

가브리엘이 힐링턴 저택에 들어와 머문 시간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어디를 가든 가브리엘과 로제가 보였다.

‘이게 무슨 조화지?’

이 넓은 저택에, 꼭 내 행동반경 안에서 나타나겠다는 것마냥.

‘이럴 수가 있나? 누가 장난 치는 것도 아니고.’

난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로제는 사랑스러운 내 동생이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지만, 가브리엘과 함께 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해 주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걸어가려던 길도 되돌아오고, 하려던 것도 중지하고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불편해. 진짜 불편하다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지금처럼.

“이곳은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일 텐데요, 벨키우스 공작님.”

자꾸 만나서는 안 될 공간에서 가브리엘과 마주칠 때가 생기는 것이다.

뭐야. 얘, 우리 집 염탐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가브리엘이면 됩니다.”

돌아오는 새침한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친한 척이 싫으면 말을 할 것이지, 이름 부르라면서 차갑게 톡 쏘듯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 건 또 뭐람?

난 빈정이 상했지만, 같이 날을 세울 필욘 없었다.

“그렇게 하지요, 가브리엘.”

거기에 더해 안부까지 물었다.

“그간 이 저택에서 지내는 것은 편하셨나요?”

의례적인 인사말이었지만.

이미 망해버린 첫인상을 되돌리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웃으려 노력하진 않았다.

“……덕분에 편했습니다.”

난 고민해야 했다.

제대로 대접하거나 인사한 적 한번 없는 상대에게 저렇게 말하는 건, 대놓고 비꼬거나 시비를 거는 것일까.

싸늘한 침묵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여기에 로제가 있었다면 발랄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너도 참 재수가 없구나. 왜 하필 싫어하는 나를 만나서.’

묵묵한 뒷모습이 가엾어 보이기까지 했다.

난 참았던 호흡을 훅 내뱉으며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할 말이 없으시면.”

먼 산을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몇 분 참았으면 되리라.

“그럼 가던 길 가실까요? 저도 볼 일이 있거든요.”

“아.”

“로제에게 가던 길이라면 오른쪽으로 가시면 되어요. 저는 왼쪽으로 갈 것이라서요. 마주칠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세요.”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자꾸 이렇게 어색한 만남 갖지 말자.’

미래의 제부와 벌써부터 척지긴 싫었, 응?

“꽃을.”

미련 없이 돌아설 때, 가브리엘이 갑자기 내게 말을 걸었다.

“그.”

“……?”

“꽃을.”

더운가.

가브리엘의 귓불이 어쩐지 무척이나 붉게 달아올라 있는 것 같아, 눈을 찌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데 잠깐 눈을 마주쳤다.

나도 놀라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그보다 더 화들짝 놀라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시선을 돌리는 소년의 행동에 기분이 상했다.

‘이렇게까지 차별 대우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지 않아도 너랑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단 말이야.

언제나처럼 둘이 있는 상황이 되면 입을 꾹 다물고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기에 가브리엘과 마주친 순간마다 내게는 안 좋은 추억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겠구나.

“할 말이 없으신 것 같으니, 저는 이만,”

“힐데아 영애는.”

그런데 말을 내뱉을 기회를 또 잘렸다.

“힐데아 영애는 꽃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느리게 말한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제법 빠르게 말한 그는 말이 잘릴까 봐 두려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난 곁눈질로 가브리엘을 바라봤으나, 역시나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뭐 하는 거지, 지금?

나랑 친해져 보려고 하는 건가?

근데 왜 눈을 안 마주쳐?

아니면 로제에게 한 소리 들었나?

“맞습니까?”

“음…….”

“만약 그렇다면, 제가.”

꽃과 화분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진 것은, 내가 내 이능을 시험하느라 화분을 모으다보니 생긴 오해였다.

“네, 그렇긴 해요.”

사실 꽃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내가 이능으로 피운 꽃들이 유독 생기 있고, 싱싱하여 애틋하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걸 왜 물으시는지 궁금하네요.”

“물어보면 안, 아니. 알고 싶, 그러니까.”

“네?”

“후우.”

가브리엘은 호흡이 가쁜 사람처럼 잠시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나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있기에 그가 생각할 수 있게끔 기다려주었다.

“죄송합니다.”

“괜찮, 아요.”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뒤, 가브리엘은 느리게 말을 이었다.

“전쟁터에서 편지를, 보낼 생각입니다. 로제 영애에게도.”

아. 그렇구나. 로제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내게 말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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