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너에게 꽃을 보내고 싶어
“허락해주신다면…….”
뭘 또 언니에게 허락까지.
저 영문 모를 행동이 이제야 이해가 가서 속으로만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지간히 로제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꼭 결혼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졌다.
전쟁터에 있는 동안 로제에게 다른 남자친구가 생길까 봐 질투가 났던 모양이다.
“…에게……보내도 되겠습니까?”
응?
흐뭇하게 로제를 생각하다가 앞의 말을 놓쳤다.
하지만 뭐, 로제에게 편지를 보내도 되겠냐는 거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분명 기쁠 거예요.”
“…….”
“?”
로제가 방방 뜨며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근데 어째서일까.
침묵하고 서 있던 가브리엘의 얼굴이 무척이나 붉었다. 꼭 뭘 잘 못 먹고 알레르기라도 난 사람 같았다.난 그 급격한 변화에 깜짝 놀랐다.
“저기. 괜찮으세요?”
“아…….”
내가 당황해서 손을 뻗으려는 찰나, 그가 움찔하며 뒤로 반걸음 물러났다.
“가브리엘?”
“윽!”
뭐야, 상태가 진짜 이상한데.
“읏, 지금 이름…….”
가브리엘은 마치 간지러운 것처럼 귀를 마구 문지르기까지 했다.
“잠깐만요. 귀까지 번진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난 표정이 심각해졌다. 주변에 풀독이 오를 만한 것이 있었나 싶어서.
“손 멈추세요. 아무래도 의원에게 가보는 게 낫겠어요. 귀 말고 다른 이상 부위는요?”
이능 때문에 먹어도 되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을 시험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식물에 대해 지식이 는 편이었다.
‘주변에 문제 될 만한 풀은 없는데?’
잠깐만. 난 떠오르는 것이 있어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저게 알레르기가 아니라, 혹시.
‘……저 팔불출 꼬마가 우리 로제 이야기만 해도 좋아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와,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다.
세상에, 무슨 저런 순정남이 다 있어? 역시 남자주인공이라 이거야?
‘그렇게까지 좋은가.’
원작의 가브리엘은 로제리엘에게 헌신적인 남주이긴 했지만, 내 여자에게만 따뜻하겠지, 라는 컨셉의 여주 한정 다정남이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내 표정을 봤던 것인지, 가브리엘이 갑자기 정색했다. 하지만 얼굴은 토마토다.
“영애, 제가 원래 이러지 않습니다.”
아닐걸. 넌 앞으로는 쭉 그럴 것 같은데.
“네, 알겠어요.”
“정말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싸가지 없이 구는 소년도 지금만큼은 꽤 귀여워 보였다.
그 애정이 내게 향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러나 조금은 씁쓸해지기도 했다. 나는 저런 무조건적인 애정의 상대를 과연 만날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세요. 로제는 정말 좋아할 거예요.”
“……그렇, 습니까.”
“네, 분명히 그럴 거예요.”
“로제 영애만, 요.”
“……? 네.”
그럼 또 누가 있단 말이야.
사랑에 빠진 소년에게 지금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건만, 표정이 왜 저런담. 어쩐지 어깨가 축 처진 것도 같았다.
‘모르겠다. 뭐, 이제 됐겠지.’
난 더 이상 내게 할 말이 없어 보이는 가브리엘을 뒤로 하고, 종종걸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또 로제를 기다리나 보네.’
어쨌든, 친하지 않은 소년을 걱정하기에는 내겐 남은 할 일들이 꽤 많았다.
*
“크라이스님. 명상하고 계셨습니까? 식사 시간이 다 되었는데, 이제 내려가시지요.”
경건한 분위기의 기도실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소년, 크라이스가 눈을 반짝 떴다.
“하멜 신관님. 예, 잠시 생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너무 열심히 기도에 임하셔도 안 됩니다. 건강부터 돌보셔야지요.”
크라이스를 바라보는 중급 신관 하멜의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그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지만, 이제 겨우 열두 살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신성력이었다.
길게 내려오는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이나 다정한 녹색 눈동자마저 신의 현신 같았다.
최고 신관, 크라이스.
신을 가장 사랑하는 자.
성스러운 축복의 대리자.
축언을 내리는 자.
모든 영광스러운 명칭이 저 어린 신관의 것이었다.
미엘르 제국민 중 이능과 축언을 갖고 태어난 자는 모두 당대 최고 신관의 입을 통해 그것을 내려 받는다.
그렇기에 최고 신관은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신의 모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권력을 황제도 쉽게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왜냐하면 최고 신관은 이 세상에 날 때부터 최고 신관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라이스 님. 며칠 전에 황궁에서 사람이 왔었다던데, 어떠셨습니까?”
잠시 크라이스의 미소가 사라졌다가 빗금처럼 떠올랐다.
“그 얘기를 들으셨군요. 아는 이가 많지 않을 텐데.”
“네, 그들이 간혹 선을 넘는 요구를 해오기도 하니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부드럽게 웃는 최고 신관의 얼굴은 꼭 순진무구한 천사상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하멜 신관님.”
“네?”
“그 이야기를 또 누가 알지요?”
“……예?”
이상했다.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미소였는데, 간담이 서늘했다.
저도 모르게 중급 신관은 발걸음을 뒤로 주춤했으나, 물러날 곳이 없었다.
“누가 또 아는지 물었습니다.”
“저, 밖에 모르는 일이긴 합니다만, 그것을 왜 물으시는…….”
하멜은 말을 더 꺼낼 수 없었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강렬한 고통이 심장 쪽에서 몰려왔기 때문이다.
언제나 빛처럼 웃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최고 신관은 다정하게 속삭였다.
“당신 하나라서 다행이네요.”
퍼억-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헉.’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뭐지?’
뭔가 굉장히 무서운 꿈을 꾼 것 같았는데, 기억이 나진 않는 찝찝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오늘의 날짜를 확인한 뒤 좌절의 탄식을 내뱉었다.
‘오늘이구나.’
빌어먹을 뱃놀이.
나만 보면 차갑게 굴고, 나 또한 볼 때마다 얼굴을 굳히게 되는 망한 사이가 되었더라도 가브리엘은 미래의 내 여동생의 약혼자일 것이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전쟁터로 떠나기로 약속되어 있는 가브리엘이 불쌍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을 써서 로제와 딱 붙어 있게끔 해주려고 했는데, 여기서 복병이 하나 있었다.
‘난 언니랑 갈래요!’
‘…….’
‘…….’
‘언니야, 우리 뱃놀이 구경 가자, 로제는 언니랑, 오빠랑, 다 같이 놀러갔으면 좋겠는데에?’
문제는 내 동생, 로제리엘이 나를 너무 좋아하는 데 있었다.
당황한 듯 폭삭 무너지던 가브리엘의 표정을 보면 그렇게 발랄하게 말할 수가 없단다, 로제야.
이 언니는 커플의 데이트에 굳이 끼고 싶지 않았거든…….
“아가씨, 일어나실, 어머, 벌써 일어나셨군요.”
리라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죽을 상을 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의례적인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랬었는데…….
‘로제.’
그랬는데. 이건 반칙이잖아.
‘로제리엘!’
난 속으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피눈물을 흘렸다.
약속 장소에는 헤헤 웃는 분홍 머리의 소녀는 없었다.
“오셨습니까, 영애.”
창백한 낯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가브리엘만 있었을 뿐이다.
*
분홍 머리 소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펼쳐진 노트에 띠링 띠링 연신 알림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발닦개가되겠어요 님이 대화에 초대되셨습니다.
-그분은 결혼에 뜻이 없는 게 분명.
입술을 오물거린 소녀는 펜을 들어 끄적이기 시작했다.
-내가 봐도 그럼. 분발이 필요할 것으로 보임. 아직 아무런 관심도 없음.
그 뒤에 달리는 대화들은 하나같이 그분이 싫어하는 벨키우스 따위 어서 이 저택에서 나갔으면 좋겠다는 제법 과격한 대사였다.
소녀의 눈이 다정히 휘었다.
“힘내라고요, 남주 씨.”
*
이보다 어색할 수가 있을까?
우리 발랄한 로제와 함께 나왔을 때는 제법 즐거웠던 추억이 가득한 뱃놀이 장소인데.
‘그렇게 싫으면 돌아갈 것이지.’
아끼는 여동생에게 벌써부터 헌신적인 모습은 보기 좋긴 했지만, 상대를 너무 가리는 모습은 민망하게 만드는 법이다.
로제의 앞에서는 그렇게 부드럽게 웃었으면서, 가브리엘은 나와 함께 뱃놀이하는 것이 그토록 못마땅한지 시종일관 딱딱한 얼굴이었다.
어쩐지 숨도 참는 것 같았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대꾸는 좀 해줄래?
그냥 빨리 배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이 숨 막히는 시간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배가 기우뚱하고 흔들렸다.
“어?”
“아.”
호위 기사와 시종, 시녀들이 따라오긴 했지만, 그들이 함께 배에 탄 것은 아니었다.
배에 같이 타고 있더라도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호수 안에 무언가에 걸린 것인지 휘청거리는 배가 기울어지는 방향이 하필 내 쪽이었다.
난 기우뚱 기울어졌다.
그 순간 내가 생각한 것은 어이가 없게도 하나였다.
‘드레스 물먹어도 괜찮나?’
근데 과장이 아니다. 몇 겹을 껴입었는데. 이대로 빠지면 물 밖으로 못 빠져나올 것 같은데……?
“힐데아!”
그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아챘다. 몸이 확 잡아당겨지고 짧은 시간 눈이 마주쳤다.
가브리엘이었다.
‘뭘 그런 표정으로 봐.’
소년은 퍽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때만큼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도, 싫어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냥 놀란 얼굴.
‘걱정한 것처럼.’
그리고 우리는 함께 기울어졌다.
풍덩!
*
“에취!”
힐데아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있는 모습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이를테면, 힐데아의 열렬한 추종자인 힐링턴 공작가의 사람들의 가슴을 짓이겼다.
아, 우리 아가씨가 저렇게 아프시다니!
망할 벨키우스!
마침, 옆을 지키고 있던 로제리엘이 툴툴거렸다.
“치잇, 이럴 때는 멋지게 구해줘야지 가브리엘은 왜 같이 빠지고 그래?”
힐데아는 가물가물 눈을 뜬 뒤, 철없이 구는 쌍둥이 동생을 질책했다.
“로제, 에취! 너 어디, 에취! 어디 갔었, 취!”
“언니야, 아무것도 하지 마. 으이그, 열이 펄펄 나잖아…….”
다들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힐데아 폰 힐링턴.
과묵하고 똑똑하며 너무 차분한 우리 첫째 아가씨.
힐링턴 사람들은 누구 하나 고작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이 첫째 아가씨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