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정말 악연이었을까?
그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힐데아에게 저 악명 높은 벨키우스 공작이 붙다니.
‘우리 아가씨는 별로 좋아하는 눈치도 아닌데!’
처음부터 힐링턴의 사람들이 무뚝뚝하고 차분한 소녀에게 푹 빠졌던 것은 아니었다.
밝게 웃으며 떠드는 솔직한 쌍둥이 동생 로제리엘과는 달리 힐데아는 무척이나 조용한 소녀였다.
표정도 별로 없었다.
그 모습은 사람들의 눈에는 상대를 무시하거나, 비웃는 오만한 모습으로 비춰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첫째 아가씨는 퍽 상냥했다.
‘그게 필요한 거 같아서요. 나는 필요 없어요.’
‘이번에 결혼했다던데, 다른 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아내에게 전해주겠어요? 결혼 축하한다고요.’
‘실례일지 모르지만, 겨울은 춥잖아요. 그런 옷감으론 감기 걸릴 텐데요. 그러면 공작가의 위신이 떨어져요.’
대체 언제 그렇게 유심히 보고 있었던 것일까. 대체 어떤 귀족 아가씨가 그런 사소한 것들을 궁금해하고 배려할까.
힐데아를 위한 사람들은 그렇게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했다. 그 성질 나쁘다는 벨키우스 공작이 우리 아가씨의 혼약자가 되진 않게 해주시길!
그런데 하늘은 그들을 버렸다.
왕래도 없던 벨키우스 공작이 대뜸 집에 쳐들어오더니, 적극적으로 구애까지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 눈에 인형처럼 예쁜 소년의 외모도, 소년이 지닌 탄탄한 작위도 눈에 차지 않았다.
‘말 한번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배짱이라니.’
힐데아가 보지 않을 때 뒤에 따라붙는 시선은 집요하고 뜨거웠다. 그런데 정작 마주치려 하면 휙 돌리고 얼굴을 쳐다도 못 봤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게 차갑고 싸가지 없게 굴면서 힐데아에게는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표정도 경직되어 웃지도 못했다.
그런 주제에 귀는 사과처럼 붉게 변해 있고 손가락은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우리 아가씨는.’
그런 소년의 행동을 연심이라고 판단하기보다는 무례한 행동이라고 이해한 모양이었다.
아주 싫고, 굉장히 거북한 표정으로 가브리엘을 쏘아보았으니까.
그런데 그 마음에 안 드는 공작이 우리 아가씨를 호수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실상은 도와주려다 같이 빠진 거지만, 어쨌든 그 놀라운 이능을 지닌 존재면 뭐해. 뱃놀이 같이 한 상대 하나 못 지켜주는데?
그들은 아가씨가 싫어한다면, 아무리 무시무시한 벨키우스 공작이더라도 아가씨 발끝도 건드릴 수 없게 방해할 생각이었다.
*
이렇게 아팠던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아니, 이 몸으로 눈을 뜬 뒤 온몸을 두드린 것 같았던 감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멀쩡해지기까지는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덕분에 가브리엘이 떠나기까지 시간도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찾아온 로제는 옆에서 재잘거리면서 떠들곤 했는데, 반쯤은 가브리엘에 대한 투덜거림이었다.
그저 귀여운 속삭임이었지만.
‘난 언니가 아픈 거 싫어. 같이 빠졌는데 가브리엘은 멀쩡해.’
‘그야, 콜록,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나는 기억했다. 손을 뻗었던 그 순간, 그렇게 싫어하고 거북하던 날 구하려던 순간을.
그것만으로도 앵돌아지며 쌓였던 불만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랄까.
‘따지고 보면 피해자는 가브리엘이고.’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도, 이번에 물에 빠지게 된 것도 날 잡다가 그러던 것이 아닌가.
가브리엘 혼자 있었다면 배가 휘청거리든 말든 휙 날아올라 착지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래서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서 가브리엘을 찾았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보려 하니 그 남자애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만나지 않으려 할 땐 그렇게 자주 부딪히더니.
“여기인가요?”
결국 힐링턴 저택을 거의 돌다시피 해서 도착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초대 힐링턴 가주가 책에 미쳐 있다시피 한 사람이라 서재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건물 하나를 통째로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위병들이 경례를 하며 외치듯 말했다.
“네, 아가씨. 출입 기록을 보시면 명부를 작성하고 들어가신 지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민망할 정도로 딱딱하고 경직된 표정의 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뒤 나도 명부를 작성하고 들어갔다.
‘어떻게 찾는다?’
가브리엘은 아직 소년이라 작았고, 나도 작았다.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도서관이 아니라 따로 사서도 없었고 사서가 있다 한들 이 넓은 곳에서 자그마한 소년 하나 찾아달라 하기에도 뭐 하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난 하나씩 책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소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
낭패였다.
그 일로 힐데아가 일주일이나 아픈 통에 가브리엘은 계속 힐데아가 머무는 곳에 찾아갔다가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어지길 반복했다.
아쉽고 소중한 시간이 훌쩍 흘러가기만 했다.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
더, 조금 더. 욕심이 자꾸만 커져서 큰일이었다. 앞으로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하게 될 텐데.
‘내가 대신 아플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가브리엘은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픽 웃었다.
그의 생각을 부관이 들었다면 정말 무섭다며 부르르 떨었을 것이다.
요근래 가브리엘이 힐데아를 대하는 것을 보면 몇 번이나 그랬듯이 말이다.
“후우.”
바로 그때였다.
“어디 아프세요?”
“…….”
“저기, 공작님. 제가, 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가브리엘은 뒤를 밟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일 따위 용납한 적 없었다.
문제는 요즘 자주 얼이 빠질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누군가를 떠올릴 때.
“힐……!”
그런데 그 누군가가 바로 뒤에서 말을 갑자기 거는 상황이라면?
심장마비로 잠시 죽었을 때만큼 놀란 가브리엘은 사다리에 올라선 채 휘청거렸다.
“!”
그리고 팔꿈치로 비스듬히 꽂혀 있던 책들을 치고 말았다.
몸이 비틀리며 추락하는 순간, 책들도 함께 우르르 비처럼 쏟아졌다.
‘아.’
그런데 크게 떠진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던 소녀, 힐데아.
요즘 그를 미치게 하는 소녀가 하필 그 아래에 있었다!
‘이대로라면.’
가브리엘의 심장이 한껏 조여들었다.
‘다칠 거야!’
안 돼.
*
이럴 수가 있나.
정말 이럴 수가 있어?
나는 웅크린 채로 무겁게 쏟아지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가 날 꽉 끌어안고 있었다.
눈을 살며시 떴을 때 본 것은 작은 체구로도 어떻게든 감싸 안고 대신 책에 맞은 가브리엘이었다.
“아…….”
평소 단정했던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고, 상태도 엉망이었다.
난 얼이 빠진 얼굴로 바짝 붙어 있는 소년을 바라보다가 벌써 흰 이마가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혹이 톡 튀어나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미간을 찌푸렸다. 으, 아프겠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가브리엘이 몸을 흠칫 떨었다.
“윽!”
그때서야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깨달은 것인지, 가브리엘은 경기를 일으키듯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큰일 날 뻔 했습, 윽!”
문제는 주변이 엉망인 책들 투성이였다는 것이다.
헛손질을 한 소년이 지탱하지 못하고 뒤로 나뒹굴 뻔했고, 이번에는 내가 손을 뻗어 넘어지지 않게 가브리엘을 잡아주었다.
어색하게 손을 놓고 말았지만, 어쩐지 어설픈 미소라도 떠오르고 있는 듯했다.
난 그제야 소년을 제대로 보면서, 입을 뗐다.
“고마워요.”
처음부터 말했어야 했는데 제대로 하지 못한 말을.
잔뜩 날서 있었던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착각일까?
어쩐지 책을 막다 다친 것인지 가브리엘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지금 손을.”
“다치지 않았습니다. 괜찮아요.”
“하지만 이마가.”
“이것도, 괜찮습니다.”
유심히 보려 했는데, 소년은 보이는 것이 싫다는 듯 손을 뒤로 숨겼다.
얼굴은 잔뜩 숙이고 있는 채였다.
그래, 뭐.
거기까지는 아니라 이거지. 난 가브리엘의 예민함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거기다 생명의 은인이니까.
‘약혼자 사이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엉망이었던 가브리엘의 첫인상이 한 번 더 무너져 내렸다.
‘친해졌다면 좋았을 텐데. 얘가 날 싫어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제법 아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가브리엘에게 나는 최악의 만남만 있었던 악연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겐 저 소년이 악연이 아니었다.
난 로제리엘처럼 상냥하게 웃어줄 순 없다. 그래도 마음을 담아 다시 한번 말했다.
“고마워요, 가브리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꿋꿋할 정도로 가브리엘은 나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일으켜주려는 듯 내민 작은 손은 다친 듯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소년이 아프지 않도록 힘을 주지 않고 잡은 채 일어났다.
맞잡은 가브리엘의 손은 무척 따뜻했다.
*
며칠 남은 시간은 무척 빠르게 흘러갔다.
“침묵하는 여신의 손길이 머물며, 그곳에서도 평온하시기를.”
“평화와 안녕의 축복만이 바람 신의 축복처럼 피어나시길.”
약혼이 오가고 있는 가문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치고는 퍽 형식적이고 삭막하다.
가브리엘의 시선은 우리 자매 쪽으로 향해 있었는데, 누가 봐도 확연히 로제 쪽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었다.
소년은 로제를 한참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껄끄러운 상대를 확인하겠다는 듯 날 잠시 바라봤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인사를 건넸다.
“영애께서도 평안하셨으면 좋겠, 습니다.”
“공작께서도 조심하셨으면 좋겠어요.”
아까의 형식적인 인사보다는 사감이 담긴 말이었다.
그리고 진심이었다.
말이 전쟁터이지, 누구든 죽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저 어린 애가. 그렇게 생각하니 미간이 찌푸려졌다.
인사를 하며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가브리엘이 시선을 홱 돌린 것도 그때였다.
‘나랑 인사는 끝났으니까, 이제 로제를.’
난 뒤를 돌았다.
로제를 부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재잘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던 로제가 한발 물러나 싱긋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손짓했더니 로제가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내 뒤를 콕콕 가리켰다.
응? 내 뒤엔 가브리엘이 있잖아.
몸을 돌린 순간, 깜짝 놀랐다.
“……힐데아, 영애.”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