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19화 (19/155)

19화. 12년은 무척 길었다

깜짝 놀랐던 것도 잠시,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을 하는 소년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따라 긴장하고야 말았다.

‘뭐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데 생각보다 가브리엘이 내뱉은 말은 별것 아니었다.

“편지, 보내겠습니다.”

나는 순간 대답을 못 했다.

그러다가 가브리엘이 로제에게 편지를 보내겠다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보내면, 답장을.”

“네?”

웅얼거리는 뒷말을 듣지 못해 살짝 미간을 찌푸렸는데, 가브리엘의 어깨가 흠칫하고 튀어 오른 것 같았다.

뭐야, 벌레라도 있었나?

하지만 소년의 주변을 살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려는 찰나.

“영애께 답장 받으면 기쁠 것 같습니다.”

“……아.”

난 눈을 크게 떴다.

말이 너무 빨라서 랩이라도 하는 줄.

여태까지 느릿하게 이야기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답장 써달라고 한 거야, 지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쟤랑 할 말도 없는데 퍽 난감한 부탁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아하. 로제의 소식을 전해달라는 건가?’

당사자에게 묻기 힘든 말을 내게 물어보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제야 소년의 복잡한 속을 이해를 한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공작님. 보낼게요.”

“……가브리엘, 이라고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

내가 너를 왜 가브리엘이라고 부르니. 그렇게 인상을 구길 거면서.

제법 친근하게 굴었던 방금 전의 순간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가브리엘의 낯은 무척이나 차가워진 상태였다.

약간 구겨진 미간을 따라 나도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조절할 수가 없었다.

그냥 고개를 다시 한번 끄덕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저기요!”

그때 로제가 끼어들었다.

뭐라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한발 뒤로 물러났다.

“로제리엘 영애.”

로제를 보자마자 편하게 풀어지는 가브리엘의 표정을 보니 사이좋은 여동생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친근하기만 했다.

주변에서 날 싫어하고 냉대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기에 기분 나빠하기보다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한창 재잘거리는 로제의 손을 잡고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럼 주군, 출발하시지요.”

사람들이 대거 이동하는 소리와 함께 가브리엘이 자신의 흑마에 훌쩍 올라탔다.

커다란 흑마 위의 작은 소년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다.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멀어지는 가브리엘과 그를 따르는 기사단의 행렬을 보며, 나는 옆에서 자꾸만 웃고 있는 로제를 보았다.

아니, 얘가 왜 웃지?

“로제, 걱정되지 않아?”

“으응? 뭐라고, 언니야?”

왜 저 눈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 같을까.

아직 어린아이라 자신의 미래 약혼자가 위험한 전쟁터로 떠나는 것을 잘 모르는 것일까.

나는 위로를 건네고자 했다.

“괜찮아, 로제. 공작님은 무사히 돌아오실 거야.”

“헤헤. 그거야 그렇지?”

“로제?”

로제는 내 손을 꽉 잡아 왔다. 그리고 씨익-개구쟁이처럼 웃어서 나도 따라 눈에 힘을 풀었다.

“근데 언니.”

“응, 왜 그래?”

“무슨 구도가 좋아?”

“……뭐라고?”

내 동생이지만, 가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불쑥 내뱉곤 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으음, 아니야. 내가 결정할래. 역시 정면이 좋을 것 같아!”

“…….”

난데없는 말을 하며 까르륵 웃는 소녀는 무척이나 천진난만했다.

무슨 소리인지는 못 알아들었어도, 뭐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 나이도 있으니까.

나는 로제 나름의 우울해지지 않으려는 방법이라 생각하며, 분홍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로제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 떠난 이 길로부터 가브리엘은 무려 12년이라는 시간을 전쟁터에 묶이게 된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그때가 진정한 <영애는 달콤하다>의 시작이 될 것이다.

나는 점이 되어 멀어진 그들의 모습에서 천천히 눈을 돌렸다.

*

세월이 지나도 우아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여인은 미엘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울리는 부드러운 음악과는 어울리지 않는 초조한 표정이 얼굴 위로 떠올라 있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따악, 딱, 여인은 히스테릭하게 가지런히 다듬은 길쭉한 손톱을 물어뜯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그녀의 아들, 황태자 벤자민은 그 모습이 우아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를 걱정할 뿐.

“어마마마. 손톱 상하세요.”

“아들, 황태자.”

“네.”

눈이 마주치자 황후는 엄한 표정을 했다.

“가브리엘이 힐링턴과 결혼하면 황태자, 너의 후계자 위치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그 가증스러운 디트로이아는 그것을 노리는 거야!”

“압니다. 어마마마.”

벤자민은 얼굴을 굳혔다.

디트로이아, 그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의 남편. 그러나 가깝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들보다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벨키우스의 핏줄을 더 귀히 여겼던 아버지니까.

속에는 반감이 치솟았지만, 벤자민은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할게요, 어마마마.”

“후우. 너는 언제고 그리 순하기만 할 거니?”

“어머니의 착한 아들이 되고 싶으니까요.”

“벨키우스 그 독한 것과 비교가 되잖니.”

유약한 그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황후는 혀를 찼지만, 소년은 적어도 모친의 말이라면 언제든 무릎을 꿇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되었다. 타고난 성정을 어찌 할까. 하지만 내가 널 중요한 순간에 망설이는 모자란 것으로 키우진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그럼요.”

“칼을 쥐었으면 때가 되었을 때 휘둘러야 해.”

“물론이에요, 어마마마.”

벤자민은 제 어미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경애했다.

그녀에게 착한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무수히 듣고 자랐으며, 그러기 위해 기꺼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가브리엘 그 괘씸한 것의 생각이 변한 거지? 도통 이유를 알 수가 없구나. 불안해. 힐링턴과 무슨 수작이라도 부렸을까 걱정이야.”

벤자민은 사르르 웃었다.

재수 없는 벨키우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카랑카랑한 어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 속을 누가 알겠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어마마마.”

“어찌하여?”

“속셈이 무엇이더라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 녀석은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시간 동안 황도를 떠나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구나.”

황후의 얼굴 위로 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 그랬지.

아주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이었다. 덕분에 12살밖에 되지 않은 그 어린 공작은 내쫓기듯 전쟁터로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은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곳. 언제 어떻게 죽는다 해도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이 아니겠는가?

“돌아오지 못하면 애초에 그놈의 혼담은 이뤄질 수도 없겠구나. 그렇지 않니, 아들아?”

황후가 손을 뻗었고, 벤자민은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에 뺨을 기대었다.

“아가. 조금만 참으면 모두 괜찮아질 것이란다. 이 어미가 너에게 찬란한 제국을 선물해주마.”

“네…….”

감히 그 누구도 황권을 건드릴 수 없는, 그런 강인한 제국을.

악독하게 빛나는 그 눈을 보면서도 벤자민은 어미의 손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니 너 또한, 이 어미를 위해 노력하거라. 언제나. 이 어미를 위해 살렴. 알았느냐?”

“네, 어마마마.”

*

그로부터 12년.

무려 12년이나 이어진 지긋지긋한 전쟁이었다.

축언으로 강력한 이능을 발휘하는 미엘르 제국군의 기세는 막강했다.

그러나 살기 위해 저항하는 상대의 기세도 뒤지지 않았기에, 지지부진한 대치 상태가 줄곧 이어졌다.

이로 인해 죽은 이는 셀 수도 없었으며, 제국 역시 만만치 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이도 오래갈 수 없으리라. 전세는 뒤집혔다.

“끝이 다가오는군.”

남자는 무척이나 차가운 눈빛과 목소리로 고요하기만 한 상대 진영을 쏘아보았다.

며칠 전, 사내는 아주 큰 사냥감을 제대로 건졌다.

그의 손에서 쏘아나간 화살이 가장 값진 사냥감의 어깨를 꿰뚫었던 것이다.

덕분에 상대 진영의 총사령관은 치명적인 부상으로 오늘내일하는 처지였다.

“우두머리가 무너지면, 전세도 깨어지게 되는 법.”

냉혹한 얼굴로 살피고 있는 미남자.

그는 미엘르 제국군의 총사령관이자, 살아 있는 전쟁의 신이나 마찬가지가 된 가브리엘 폰 엘른 벨키우스였다.

충직한 그의 부하들은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였고, 혹독한 시간 동안 옆을 지켜왔던 가브리엘의 부관은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이번 공격에서 모든 것이 결판나게 될 것입니다, 주군.”

“그래.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어? 주군, 저건 전서응 아닙니까?”

곧 하늘에서 날아온 전서응이 전한 서신이 가브리엘의 손에 떨어졌다.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무슨 소식인가. 설마 적군에서 무슨 움직임이라도?

가브리엘은 무심하게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하.”

“주군? 왜 그러십니까?”

그리고 부하들은 항상 침착하다 못해 냉정하기까지 한 자신들의 상관이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대체 무슨 소식이기에 저런 반응이란 말인가!

승기를 다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하들의 얼굴에는 먹구름이 감돌았다.

설마 다시 집요하게 전투가 시작되는 것은…….

그때, 가브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부하들은 흠칫 놀랐다.

상관의 잘생긴 얼굴 위로 누군가를 썰어버릴 것 같은 무참한 표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백금발의 상관은 지옥에서 기어나온 것 같은 음색으로 으르렁거렸다.

“죽여버리고.”

예?

“다 죽여버리고 어서 돌아가야겠다.”

뭐라고요, 주군?

“이 전쟁, 일주일 안에 끝내고 돌아간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지? 일주일?

가장 가까이에 있던 부관은 가브리엘이 신경질적으로 내던진 전서에 적힌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했고,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러면 그렇지. 큰일은 무슨.’

부관은 다른 누구도 보지 못하도록 신속하게 그것을 처리했다.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짜증이 올라왔다.

그곳에 적힌 것은 간단했다.

적국의 수뇌가 심각한 움직임을 보인 것도, 부상으로 오늘내일 하던 적군의 사령관이 기적적으로 깨어난 것도 아니었다.

‘후우.’

바로, 힐링턴의 두 영애가 데뷔탕트를 치르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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