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그 편지가 문제였다 (1)
영애들이 데뷔탕트를 치른다는 것은 즉, 누군가가 그녀들의 파트너가 되어 연회장에서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게 누군가의 정신을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하. 안 돼. 절대.”
“주군…….”
부관은 암울한 얼굴을 했다.
질투에 미친 상관은 그것조차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가브리엘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공격을 준비하라.”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가브리엘은 사납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그렇게 놀라지? 군기가 빠졌군. 정비하라. 쉴 순간도 주지 않겠다.”
“…….”
“당장 모두 제자리로.”
그 어떤 놈도 힐데아 영애의 손을 잡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듯, 가브리엘은 서늘하게 빛나는 검을 쥐고 공격을 명령했다.
*
전쟁은 피에 미친 것처럼 날뛰는 가브리엘로 인해 큰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며칠 전 장장 12년에 걸친 전쟁을 마치고 적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흔들리리라 생각했던 황권은 안정되었고, 이득을 노렸던 황후는 이를 갈았다.
자, 그렇다면 이 모든 혁혁한 성과를 세운 최연소 공작, 되돌아올 전쟁 영웅, 젊은 벨키우스 공작은 앞으로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돌아오는 그 순간부터 화제의 주인공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랬다. 그는 현재 사교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였다.
“그 귀신 공작이 어찌 변했을지. 온갖 소문이 난무하잖아요.”
“이제 귀신 공작이라 부를 수 없지 않겠습니까? 무려 전쟁 영웅인 것을. 제국이 취한 이득이 적지 않으니 폐하의 총애가 더 한쪽으로 쏠리겠군요.”
귀족 중 누군가가 이죽거리며 비웃었다.
아마, 하나뿐인 아들이면서 여태껏 사이가 좋지 않은 현 황제와 황태자를 꼽은 것이리라.
“어제는 국무회의에서 대놓고 면박을 주셨다지요? 흠흠, 황제 폐하께서도 참으로 야속하시지요. 황태자 전하도 큰 노력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뿐인가요. 폐하께서 벨키우스 공작이 돌아오면 화려한 승전 연회를 해야 한다 세 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 덕분에 귀족파 귀족들이 신나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 상황에 공작이 되돌아오면,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지겠네요.”
벨키우스의 이야기가 뜨겁게 오르내리면서 자연스럽게 같이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그 혼담은 어찌 되었죠?”
요 몇 년, 쥐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었던 이름.
바로 힐링턴.
그 벨키우스 공작이 핏덩이 소년 공작이었을 때, 나누었던 혼약의 상대.
그들이 집중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위치의 전쟁 영웅, 그는 여전히 힐링턴의 둘 중 하나와 결혼을 하려 할 것인가?
“뭘 궁금해합니까. 이번 승전 파티에서 누가 공작의 손을 잡고 등장하느냐에 따라 약혼자를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듣고 있던 귀부인들이 빈정거렸다.
“하지만 힐링턴도 예전 같진 않잖아요. 벨키우스의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죠.”
“정말 혼담이 흐지부지되면……. 곧바로 결혼 시장에 가장 큰 매물이 나오는 것이니 다들 난리겠습니다.”
“그렇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어요?”
“어머나.”
그녀들은 좋은 사윗감인 남자에게 눈독 들이고 있었다. 힐링턴의 여자애들 따위 머릿속에서 진작 치워버리고 말이다!
“그래도 공작가입니다. 두 가문의 결합은 절대 아무렇지 않은 일은 아니지요.”
비록 힐링턴과 벨키우스.
두 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아 그 소년 공작이 혼담을 제대로 논의하지 않고 전쟁터로 떠나버린 것이라는 소문이 뜨겁게 맴돌았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재밌겠네요.”
모처럼 아주 재밌는 판이 될 것 같았다. 귀족들의 눈이 반짝였다.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나 전쟁영웅 가브리엘. 그가 누구의 손을 잡느냐는 것이었다.
제대로 교류 한 번 해본 적 없었을 힐링턴의 아가씨들일까.
아니면 새롭게 등장하여 그 잘난 영웅의 심장을 훔쳐갈 이름 모를 아가씨일까?
그 무엇이 되더라도 재밌을 터였다.
*
스무 살의 데뷔탕트.
‘준비할 게 너무 많아.’
“드레스는 이것으로 할까요, 아가씨?”
나는 턱을 들어 올리고, 눈앞에 있는 드레스를 꼼꼼히 살폈다.
“응. 하지만 레이스는 좀 더 풍성한 것으로 바꿨으면 좋겠어. 허리 조임은 너무 촌스러워. 리본도 드레스 옷감의 색과 어울리지 않고 겉돌아.”
냉정하게 집어나가자 누군가의 조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지적한 것을 빠르게 적어나갔다.
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여유롭게 서 있는 다른 여인을 바라봤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마담 루뮈에?”
난 여전히 잘 웃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프로다운 정신으로 내 냉정하고 차가운 표정에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영애의 의견에 동의한답니다. 하지만 힐데아 영애 덕에 제가 할 일이 별로 없군요, 호호.”
“과찬의 말씀이에요.”
“어머?”
“누가 가봉하느냐에 따라 드레스의 결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을 잘 아시는 분께서 저를 놀리시는군요.”
마담 루뮈에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런. 저는 아무에게나 이런 말을 하지 않아요, 힐데아 영애. 예를 들어 로제 영애에게 이런 말을 할까요, 제가?”
“…….”
수도에서 가장 알아주는 능력자인 마담의 말에도 웃을 수 없었다.
로제. 로제!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런데 로제 영애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군요? 대체 언제쯤 가봉일에 제대로 영애를 볼 수 있는 걸까요?”
그걸 나도 몰라요, 마담.
“다음에는 부디 로제 영애도 함께 있기를 부탁드릴게요.”
“……그래요.”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은 스무 살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천방지축 발랄했다.
그래서 내 뒷골이 가끔 띵하게 당길 정도로 말이다.
‘오늘도 나무를 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차마 속마음을 비추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눈을 굴렸다.
당장 데뷔탕트가 코앞인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로제는 제일 중요한 드레스 준비에 관심도 없었다.
‘언니가 골라줘, 히히!’
‘그렇게 말하지 말고, 그렇게 웃지도 말라고 했지. 로제리엘!’
‘괜찮아아아아!’
왜지. 왜 이렇게 위가 아픈 기분이지?
나는 명치를 쓸어내리며, 오늘도 우리 로제가 데뷔탕트 자리에서 욕을 먹지 않게 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아무튼, 마담. 로제의 드레스는 이것으로 하겠어요.”
“알겠어요, 힐데아 영애. 후후, 두 분의 아름다움을 살릴 수 있는 눈부신 작품을 만들도록 노력하지요.”
*
12년이 지난 지금.
전쟁 영웅이라고 불리게 된 가브리엘의 위상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원래도 최연소로 공작의 위치에 올랐을 때부터 시끄러웠지만, 이제는 그야말로 모두가 경애하는 대상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정작 가브리엘의 얼굴은 12년째 보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소식은 여러 가지 소문까지 덧붙여져 거의 신성시 되어 전달되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라는 거야.’
보지 않아도 뻔했다.
<영애는 달콤하다>에서 원래의 연약하고 가녀린 로제리엘이 대다수의 영애들에게 수난을 당하게 되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약혼자가 가브리엘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후보가 둘이나 있다 보니 어떻게든 더 열렬하게 자신들을 떨어뜨리고 가브리엘을 제 가문의 사위로 들이고 싶어 하는 자들이 많을 터.
난 상념을 끊어내고, 눈앞에 있는 종이에 간단히 서명하며 고개를 들었다.
“물건은 모두 확인했습니다.”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오늘은 이 정도까지 할까요.”
“그럼 내일도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편안한 오후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힐데아 영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가는 여러 상인을 내보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 들어와 있던 리라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적당한 선물을 상인들에게 쥐여주는 것을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난 침대로 푹 쓰러졌다.
“으으, 살겠다.”
노인처럼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누구야. 대체 누가 귀족 영애가 편안하고 안락한 개꿀 라이프를 즐길 수 있다고 한 거야?
억울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할 일이 늘어만 가는 기분인데?
‘아니지. 내가 일을 늘리고 있는 건가? 그럼…… 결국 내 탓이야?’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누운 채로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사실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 정신을 집중해야 할 이유가 있긴 했다.
‘아무 생각하지 않도록.’
난 습관적으로 침대 위 서랍을 바라봤던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야. 난 아무것도 못 봤어.’
바로 그때, 상인들을 배웅하러 나갔던 리라가 문을 열고 들어와 방만하게 늘어져 있는 날 보며 멈칫했다.
여전히 차가운 무표정인 그녀는 내게 그러고 있으면 어떡하냐며 잔소리를 했다.
아, 몰라, 몰라.
“제발 그런 잔소리는 나 말고 로제에게 해줘, 리라.”
“잔소리도 말해서 들어먹을 사람에게 하는 거예요.”
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럼 로제는 아예 포기라는 소리야?”
리라는 원래 저랬지만, 보통 귀족 가문의 시녀가 저런 말을 써도 되는 거야? 아무리 우리 헤헤거리는 로제라도 말이야.
“모르셨나요, 힐 아가씨? 저택에서 로제 아가씨에게 희망을 품고 줄곧 잔소리를 포기하지 않는 건 아가씨밖에 안 계세요.”
그랬던 거였어?
내 멀뚱한 눈을 보며 리라는 속이라도 읽은 것처럼 단호히 말했다.
“네.”
“그렇구나…….”
정말 우울한 말이었다.
우리 로제,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니.
“그, 그래도 사랑스러우니까.”
여전히 가문 사람들은 내게는 말 한마디 잘 붙이지 못하지만, 로제에게는 왁자지껄하게 말을 붙였다.
가끔 저 모습이 귀족 영애와 사용인의 모습인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그 사랑스러운 분에게 한 대 맞으면 영원히 잠들 수 있다는 것을 수도의 영식분들은 몰랐으면 하지만요.”
“리라. 그렇게까지 말해야 해?”
“사실인걸요. 아가씨.”
사랑스러운 동생의 손에는 어느새 펜보다는 검이, 검보다는 주먹 쥐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졌다.
“로제가 다른 영식들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건 괜찮은데.”
가브리엘에게만 잘 보이면 되는 일이다.
이마를 잡고 한숨을 내쉬는데, 리라가 차갑게 팩트 폭격을 날렸다.
“공작 각하도 아무런 말씀 안 하시잖아요. 며칠 전에 로제 아가씨가 친 사고 기억하시죠?”
아아, 로제가 불태워 먹을 뻔했던 아버지의 집무실을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뭐라고 했더라.
군고구마를 먹으려고 했다고 했지……. 그걸 근데 왜 하필 거기서?
“리라, 다음에 로제 보면 따끔하게 말 좀 해줘. 화낼 거라고.”
“네, 그보다, 아가씨?”
“왜?”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니, 익숙한 기분이었다.
불안하게 펄떡이는 심장을 부여잡고 리라를 바라보니, 그녀는 냉정한 얼굴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또 도착했습니다.”
아. 난 말을 잃었다.
“그 편지요.”
그것은 누군가가 내게 보낸 편지였다.
지난 12년간, 지나치도록 성실히 날아온.
그, 문제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