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 편지가 문제였다 (2)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무려 12년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 동안 내 마음의 변화가 생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오만했지. 사람의 마음은 한순간에도 변할 수 있는 건데.’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 채로 리라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거창한 문양이 찍힌 것도 없는 조촐한 편지 봉투.
그냥 안 볼래, 돌려보내.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정말 보지 않으면 나을지도 몰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호흡했고,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리라가 물었다.
“그렇게 싫으세요, 아가씨?”
“응?”
싫어한다고?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와 얼떨떨해졌다. 그러자 리라가 내 손을 가리켰다.
“그 편지 말이에요. 볼 때마다 얼굴을 그렇게 구기시는걸요. 모두 다 알아요.”
“……그래?”
어안이 벙벙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할 줄은.
리라를 포함해 모두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 편지를 볼 때마다 다른 의미로 심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저 착각이 낫다.
“응, 싫은가 봐.”
“그러면 모두 버릴까요?”
그건 바로 가브리엘이 보낸 편지였다.
나는 상상도 못했다. 그래. 그랬다.
지난 12년 동안, 누구는 전쟁터에서 시간을 보냈고, 누구는 산과 들을 자유롭게 노닐며 행복을 찾았고, 다른 누구는.
‘나는.’
어떤 이가 보낸 편지와 선물에 차곡차곡 알 수 없는 정을 쌓았다.
‘바로 바보 같은 나 말이야.’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브리엘은 날 싫어한다. 첫인상 최악에 마무리까지 혐오로 끝난 관계였는데, 나는 왜 이 편지를 보면 가슴이 술렁이는 것일까?
‘난 언제부터 이 편지를 기다리게 된 거지?’
무슨 거창한 사랑이나 이런 감정은 아닐 것이다.
그냥,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말했던 것처럼 길들여지기라도 한 것일까.
“익숙해진 거야.”
“네, 아가씨?”
“아니야. 아무것도. 버리는 건 됐어. 그래도 공작이 보낸 편지인데.”
난 손을 거친 이전 편지의 문장들을 떠올렸다.
무뚝뚝할 정도로 간편하게 안부를 물어오는 그 문장 하나, 하나.
‘안녕하십니까. 힐데아 영애.’
‘전쟁터는 고요합니다.’
‘오늘은 어떠셨습니까? 하루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친한 분이라도…….’
‘수도의 소식을 알 수 없어 답답하군요. 아직도 나무를 타십니까?’
‘적군과 산악 지대에서 싸우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만, 덕분에 귀한 꽃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아프셨다고 들었습니다. 찾아뵐 수 없는 곳에 있어 안타깝습니다. 지금쯤 회복되셨을지 궁금하군요.’
‘보낸 꽃들이 온실을 가득 채웠다고 들었습니다. 다음에는 더 작은 꽃들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뒷말하는 자들은 비겁한 자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힐데아 영애는 항상 노력하고 있지요.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단순히 그것이었는데.
그냥 작은 화분과 꽃들이었는데.
나는 손안에 담긴 편지를 만지작거렸다. 얇고, 평범하다.
이 안에 담긴 것도 특별한 무언가는 아니었다.
단지 타이밍의 문제였다.
꿋꿋하게 버티다 정말 힘들고 외로울 때, 소년은 툭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꼭 내 상황을 아는 것처럼.
‘어미도 없이 자라서 제대로 예절이나 알겠어요? 들리는 말에 둘째는 그리 천방지축이라던데.’
귀족들이 애용하는 잡화점에 들렀다가 힐링턴에 대해서 시끄럽게 떠드는 귀부인들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돌아왔을 때, 나도 모르게 울적해졌을 날.
하필 그 편지는 그렇게 물었다.
뒷말하는 자들은 비겁한 것입니다, 라고.
‘왜 하필, 지금.’
툭, 툭. 소년의 무정한 손이 아픈 상처를 쓰다듬어주는 기분이었다.
‘지금 그런 말을 해?’
그래서 정이 들었고, 어느 순간 그 담담한 편지를 기다리게 되었다.
‘대체 왜?’
답장을 요청했던 소년의 말대로 처음에는 몇 번씩 형식적으로 답변을 보냈다.
네, 로제는 잘 지내고 있어요. 로제는 무엇을 좋아하고, 로제는 오늘 무슨 일을-
그렇게 줄곧 늘어놓다가 소년이 물었다.
힐데아 영애는요?
내게 무언가를 물은 최초의 사람이었다.
너는? 너는 행복하니, 힐데아?
그때부터였다. 형식적인 말뿐이었던 편지에 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편지가 오는 날은 하루도 빠짐없이 답장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핫, 하고 깨달았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거울에 비춘 얼굴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던 날.
‘내가 왜.’
왜 가브리엘의 편지를 보며 웃고 있는 거야?
“음, 아마 이건 공작께서 전쟁터에서 마지막으로 보내신 편지일 거예요, 아가씨.”
아, 순간의 과거 회상을 끝내며 리라의 차가운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응. 그래, 그렇겠지.”
그는 회군하고 있을 테니 이제 편지는 오지 않는다. 그가 돌아오면 이제 답장은 보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건 마지막 편지야.’
나는 편지를 살짝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옆에 다른 시녀가 내민 작은 화분까지도.
‘풋, 작은 선인장이네.’
이건 또 어디서 구했을까?
바쁜 전쟁터에서 이런 것들은 다 어떻게 구하는지 참 신기했다.
‘나한테 친절한 건지, 아니면 여전히 날 싫어하는 건지.’
안다.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 그리고 나도 다른 것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로제와 내 대우가 다르니까. 그건 착각할 수도 없지.’
내게 오는 것은 얇은 편지 몇 장, 그리고 항상 화분 하나.
여동생인 로제에게 도착하는 것은 두꺼운 편지와 무척이나 화사하고 화려한 보석들.
물론 나는 보석들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그 차이는 가브리엘이 누구에게 마음을 쓰고 있는지 나타내는 증거였다.
‘그는 로제를 좋아하고.’
그런 차이에 새삼 상처받지 않았고 마음을 쓰지도 않았다.
‘로제는 그를 좋아하고.’
헤헤 웃는 로제의 얼굴을 보면 나도 기뻤으니까.
“아가씨? 무슨 생각을 하세요?”
“아무것도.”
난 무심하게 침대맡 서랍에 편지를 집어넣으며, 화분은 볕이 잘 드는 곳에 가져다 두라고 다시 시녀에게 건넸다.
리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지 안 읽어보시고요? 곧 만나게 되실 텐데. 용건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난 잠시 멈칫했다.
“뭐, 언제는 읽었나? 요즘 바빠서 읽을 시간도 없고, 그리고 어차피 전쟁이 끝나서 회군해서 돌아올 거 아니야.”
“그렇지요.”
“공작에게 따로 답장은 보내지 않아도 될 거고 급한 용건이 있었다면 로제 쪽으로 전달되었겠지. 내가 아니라.”
“하지만…….”
이 길들여지는 과정은.
그리움은.
이 친근함은.
아무에게도 들킬 필요 없었다.
어차피 잘라낼 것이니까.
“리라, 그건 됐고. 영식들이 보냈던 편지들은 어떻게 됐어?”
“아, 그건.”
로제는 내게 정말 소중한 아이였고,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아이의 행복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내 일방적인 친근함이었고, 난 연결할 생각이 없었다.
‘편지를 버리는 때는 그때가 될 거야.’
무뚝뚝하게 안부를 묻는 이 문장 속의 주인공은 결국 내 상상 속의 가브리엘이었다.
그러니 현실의 가브리엘과 어떤 인연이 시작되기 전에 태울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혹시라도, 이 호기심과 반가움이 내가 걷잡을 수 없는 것으로 번지게 된다면.
그때는.
‘그때는 내가.’
내 눈은 단호하게 타올랐다.
‘내가 사라질 거야.’
*
황제 디트로이아.
그는 들판을 누비는 사자같이 험하게 살아온 인물이었다.
거리낄 것이 없고, 또 망설일 것도 없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생겼다. 바로 자식 문제였다.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 청명한 푸른색의 눈동자, 그리고 밤하늘처럼 부드러운 검은색의 머리카락.
검은 머리를 보는 황제의 시선이 순간 애틋해졌다.
“황녀.”
“예, 아바마마.”
황후 데자이아가 이를 갈며 저 아이, 황녀 라피이아를 잡는 것은 머리카락 때문일 것이다.
황후가 여기기에는 천한 여자, 그러나 황제 디트로이아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황비에게서 난 아이였으니까.
“이해할 수가 없구나. 왜 아비의 말대로 하기 싫다는 것이냐?”
“싫으니까요.”
황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어릴 적의 그를 기억하고 있어요, 아바마마.”
“그래서?”
황녀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가브리엘과 전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가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지가 바뀌어야 하나요?”
“아가. 어릴 적과는 다르다.”
“그는 약혼녀가 있어요.”
“정식으로 약혼하지는 않았다.”
“태중 혼담이지요. 그것도 선황제폐하의 언약이 담긴.”
황녀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남자에게 자신을 붙이려 하시다니.
하지만 황제는 속이 답답했다. 황후와 황태자가 저리 눈에 불을 밝히고 있는데, 황녀가 가장 안전할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가장 안전한 사내와 짝을 짓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태중 혼담을 자신이 가브리엘에게 강요한 적도 있었다.
황태자보다도 가브리엘을 아꼈기 때문에 힐링턴과 맺어주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는 황녀를 가브리엘의 짝으로 고려하지 못했다.
‘게다가.’
어릴 적의 가브리엘은 약했다. 아직 지닌 권력도 없었고, 힘도 없었다.
하지만 되돌아올 그는 다를 것이다.
황제는 제국 대다수 귀족들의 축언을 손에 쥐고 보아왔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가브리엘이 지닌 축언은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라는 것을.
그런데 이대로 있으면 그것을 온전히 쥐게 될 힐링턴이다.
예전에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힐링턴이었건만, 지금은 칩거할 뿐 코빼기도 비치질 않으니.
과연 괜찮을 것인가? 향후, 제국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진 않을 것인가?
“그토록이나 아끼던 가브리엘 아닌가요. 그런데 그리 고압적으로 구시면 퍽이나 따르겠습니다.”
“아비는 황제니라.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마냥 어여뻐할 수 있었던 그때와는 다르지 않겠느냐.”
황제는 못마땅해하는 황녀를 달래듯 속삭였다.
“승전 파티에서 힐링턴의 쌍둥이가 데뷔탕트에 참가할 것이다. 그럼 그 아이들이 가장 주목받겠구나. 어쩌면, 황족보다도 더.”
그 부분은 황녀의 심기를 건드린 듯했다.
“……그건 마음에 들지 않네요.”
“아비의 생각과 같구나.”
황제는 내심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살랑살랑 바람을 불게 했다.
힐링턴의 두 딸이라면 황녀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또한 쌍둥이가 가브리엘의 환심을 사려 한다면, 라피이아도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다.
‘가브리엘의 시선을 돌려서라도 말이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하며, 황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가볍게 생각했던 그 혼담을 누군가는 목숨보다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