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또 남주를 죽일 뻔했다?
‘아!’
다급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흥분한 말의 발굽이 날 향해 높이 올려져 있었다.
악, 솟구치는 비명을 삼키며 난 눈을 질끈 감았다.
*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가브리엘의 심장은 처음으로 알게 된 감정이라는 것을 다급히 삼키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폭풍처럼 쏟아진 감정의 해일은 인내심을 끊어 놓았고, 온종일 그 사람에 대해 생각만 하게 만들었다.
가브리엘, 그 자신도 스스로의 이런 점에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집착적이었다.
그건 활이 비처럼 쏟아지는 전투에 임할 때도, 수뇌부 암살을 위해 급습을 논의 중인 순간에도 그랬다.
심지어 검이 날아와 옆구리를 베었을 때도, 피곤한 낯으로 돌아오는 길에 피어 있던 길가의 꽃을 봤을 때도 그랬다.
언제나 힐데아가 보고 싶었다.
‘오늘은 누구를 만났을까.’
‘가끔 내 생각을 했을까?’
‘화분은 받았을까.’
편지 한 장을 보낼 때마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담았는지, 써서 보내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몇 배는 많았다.
비싸고 좋은 것들을 얼마든지 힐데아에게 보내고 싶었지만, 지긋지긋하게 밀어붙인다 생각할까 봐 조심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힐데아가 좋아하는 것을 고심해서 고르고 또 골랐다.
‘주군,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한 마디만 더 해봐라. 뒤에 어떻게 되는지 확인시켜주지.’
‘하아……. 정말, 인생.’
직접 삽을 들고 그림자 지는 절벽 끝에만 서식하는 약초를 수집해왔을 때, 저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시선이란 정말 미친 자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딱 한 번만.’
그는 손에 얼굴을 묻으며 탄식했다.
‘딱 한 번이라도 좋아.’
힐데아가 불러주는 제 이름을 들어보고 싶었다. 고백하며 청하고 싶었다.
‘브리라고 불러주세요.’라고.
그녀에게 그저 그냥 스치는 흔한 사람이 아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가브리엘도 눈과 귀가 있어 제국 수도에서 자신을 두고 전쟁 영웅이네 뭐네 떠들어대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과 같지 않은 힐링턴의 영애들과의 혼담이 깨질 것이라는 소문이 돈다는 것도.
그는 픽 비웃었다.
‘개소리. 정말 어이가 없군.’
소문의 출처를 알면 죄다 목을 비틀어버릴 심산이었다.
‘다 죽여버릴까.’
그것을 빌미로 힐링턴의 영애들에게 비공식적으로 혼담을 넣는 새끼들도 많아졌다고 들었다.
특히 힐데아에게!
생각만 해도 이가 으드득 갈렸다.
‘혼담을 넣으려면 로제리엘에게나 넣을 것이지, 어째서 내 힐데아에게 집적거리지?’
전쟁 영웅이라는 칭호 앞에서 그의 관심은 하나였다.
힐데아도 그 이야기를 들었을까? 그 부분이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호감이 되었을까? 아니면 유치하다고 생각했을까?
감정의 홍수에 당혹스러울 때는, 그는 부끄러움도 모르기에 이 모든 생각들을 부관인 디안에게 이야기했다.
그는 처음에는 흥미로워하다가, 나중에는 제발 살려달라는 듯 목 졸린 얼굴을 했다.
그만. 제발, 주군 그만.
당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하지 말라고 해서 내뱉지 않을 가브리엘이 아니었다.
먼저 포기한 건 디안이었다.
‘진짜 미치셨군요. 위풍당당하던 벨키우스 공작 각하는 어디로 가시고…….’
‘감정을 가지라 한 것은 너였다. 말을 바꾸다니 뻔뻔하군.’
‘아니죠, 이런 식은 아니었습니다! 이게 제가 잘못한 겁니까아!’
확실히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했다. 오랜 시간을 지켜온 부관, 디안이 본대로 그는 감정에 완전히 미쳐 있었다.
곧 데뷔탕트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시도 참을 수 없어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그리고 승리했다.
‘이제 돌아갈 수 있나.’
황제가 너무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 아닌가 우려의 말을 보탰을 정도로 그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승리의 깃을 꽂는 순간, 그는 모든 이성을 놓아버렸다. 고삐가 풀렸다.
“더는 안 되겠다.”
“네?”
“더는 못 참는다고.”
그림으로만 보는 힐데아는 모자랐다. 직접 보고, 직접 말하고 싶었다.
돌아왔습니다, 라고.
“가, 각하.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제가 잘못 들은 것이지요?”
파랗게 질린 디안의 얼굴을 모른 척 하며 그는 손을 털었다.
승리의 깃발이 툭, 쓰레기처럼 내버려졌다. 그것을 허겁지겁 받아드는 기사들을 보며 그는 냉엄하게 말했다.
“먼저 가겠다. 알아서 따라오도록.”
싸늘한 침묵 끝에 디안이 경련하듯 입술을 떨었다.
“지금,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제가 제대로 듣지 못했,”
“말해놓은 것은 처리해놓았나?”
“그 저택 말씀이라면 사람을 보내 해결해놓았습니다만, 그 이야기를 지금 왜!”
“도착하면 그곳으로 모여. 영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주구우운!”
비명처럼 울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그는 말을 타고 달렸다. 기쁜 웃음이 광기처럼 새어 나왔다.
빌어먹을 전쟁터.
다 끝났다. 그러니 해방이다.
‘제가 가겠습니다, 힐데아.’
그렇게 물도 마시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 제국에 도착했다.
황제에게 인사도 보고도 하지 않은 채로 저택으로 향했고, 경악하는 고용인들에게 설명하지도 않고 움직였다.
그의 머리에는 오로지 하나.
‘힐.’
힐링턴 가에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였다.
‘또 그때처럼 싫어하면 어쩌지.’
그게 걱정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생각했다. 그러면 겉모습이라도 꾸며야겠다.
어떻게든 힐데아에게 좋고,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어 사용인이 추천한 곳에 맞춤 정장을 주문하러 뛰듯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히이이잉!”
“악!”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기척이었다.
말의 거친 울음소리, 그리고 흥분한 말 앞에 서 있는 여자가 보였다.
“…….”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벗겨진 후드 자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찬란한 은색의 물결이 가브리엘의 눈을 찔렀다.
쿵.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몰라볼 리 없었다.
그의 힐이었다.
*
아주 짧은 순간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바로 주마등이라는 거겠지? 싶었을 정도로.
‘흑!’
그런데 눈을 감고 몸을 움츠리는 순간, 커다랗고 단단한 누군가의 팔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동시에 몸이 옆으로 강하게 쏠렸다.
‘헉……?’
정신을 차렸을 때, 누군가의 넓은 가슴에 기댄 채 바닥으로 구른 채였다.
“하아, 하…….”
어안이 벙벙해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아래에 깔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상대와 지나치게 밀착해 있는 현재의 상태 역시.
‘감사, 인사를.’
난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아래에 깔려 있던 남자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
“…….”
몇 초간, 생각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듯했다.
감각만이 바늘처럼 곤두섰다.
일어나기 위해 지탱한 것은 남자의 단련된 근육이었다. 어쩐지 전기라도 통한 듯 손끝이 저릿했다.
눈은 아름다운 광경으로 어지러웠다. 흐트러진 진한 꿀 같은 머리카락은 화사한 백금발이었다.
햇살이 눈부셨던 것인지 살짝 찌푸린 채 올려보는 눈매는 야릇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날 동상처럼 굳게 만든 것은 남자의 수려한 얼굴도, 밀착하고 있는 민망한 상황도 아니었다.
‘아.’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저 눈을 알아. 알고 있어.’
그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러나 저런 눈빛의 소유자가 또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쿵, 쿵. 심장이 뛰었다. 이것이 내 손 아래 깔린 남자의 심장에서 들리는 소린지, 내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척 시끄러웠다는 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다친 곳은.”
묵직한 목소리는 꼭 동굴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소년이었던 자는 12년의 세월을 지나 다시금 눈앞에 나타났다.
완연한 청년이 되어, 예전보다 한껏 낮아진 감미로운 저음으로 같은 말을 물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
내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가 당황한 것 같다는 건 착각일까?
“저 빌어먹을 말 새ㄲ, 아니.”
조심스레 살피는 눈매가 예전과 달리 차갑고 냉정하지는 않아 보이는 것도 착각일까.
“다치셨습니까?”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닐까?
‘그럼 변한 것은 나?’
그렇게 생각이 들자, 바늘에 찔린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아, 아니요. 다치지 않았어요.”
난 얼른 몸을 물렸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내가 누구이고, 그가 누구인지 되새겼다.
내 여동생의 약혼자.
“……오랜만입니다, 영애.”
가브리엘.
먼저 일어난 남자의 손이 내게 내밀어졌다.
무례하지 않게 다가와 허리를 잡고 일으켜 세우는 동작이 물 흐르는 듯이 자연스러웠다.
“그, 그러네요. 오랜만이에요.”
자연스럽게 보이길 바라며 목을 가다듬었다. 너무 놀라 음성이 갈라져 있었으니까.
단순히, 놀라서였을 것이다.
난 익숙해진 동작으로 우아하게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를 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벨키우스 공작님.”
당신, 가브리엘.
그가 돌아왔구나.
*
그 벼락 같은 재회 이후.
무슨 정신으로 그를 따돌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난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일이 더 중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미친 듯이 말을 쏟아 부었다.
“나중에, 이렇게 뵈는 건 경우가 아닌 것 같아요.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정식으로 저택에서 뵐게요. 그럼.”
“……잠…….”
감사 인사를 한 뒤 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달리세요!”
뒤에서 가브리엘이 뭐라 한 것 같았지만 마부에게 웃돈을 얹어주고 빠른 속도로 달리고야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제야 현실이 확 다가왔다.
‘하하, 진짜 가브리엘이네.’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뭐야, 이게.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어? 수도가 이렇게 넓은데……? 그리고 날 구해주고?”
상상 속의 소년, 저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누군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뇌리에 남은 것은 아까 마주쳤던 그 남자뿐이었다.
‘역시 남자주인공. 엄청 잘생겼네…….’
사람을 짐승에 비유하자면, 그건 밀림의 사자에 가깝지 않았을까.
‘아니야.’
난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대필이었던 게 분명해.’
저 남자가 저와 그런 솔직한 이야기를 오가며 편지를 보냈을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부끄러워졌다. 나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그 편지에 의미를 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