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24화 (24/155)

24화. 따끔한 이유가 무엇일까?

‘왜 이런담, 정말.’

괜히 닿았던 손끝이 욱신거리는 것 같아 마구 문질렀다. 그리고 쿵쾅거리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심장아, 너 왜 난리가 난 거야?

얼굴은 왜 이렇게 뜨겁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가브리엘은 어렸을 때도 눈부시게 잘생긴 소년이었고, 다 큰 청년이 되어서도 잘생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남주인 가브리엘에 대한 찬양이 아주 몇 페이지에 걸쳐 반복해서 나오지 않았던가.

동시에 헛웃음도 나왔다.

“처음 만날 때도 엉망이더니, 이번에도…….”

하마터면 승전하고 돌아온 전쟁 영웅이, 나 때문에 말발굽에 깔려 돌아가실 뻔한 것 아닌가.

웃을 수도 없는 비극이었다.

“역시 우린 악연인가 봐.”

그래도…….

“지금은 정리가 안 됐으니 도망치고, 다음에 만나면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자.”

그렇게 알 수 없는 감정을 떨구어 내고, 저택 앞의 대로에 서서 마차에서 내렸을 때였다.

“어?”

나는 내리자마자 본 광경에 눈을 커다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푸르릉 소리와 함께 나보다 더 앞서 멈춘 마차가 보였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문제는 그 마차에서 내린 사람이, 다름 아닌…… 가브리엘이었다!

“벨, 벨키우스 공작님이 왜 거기서.”

네가 왜 거기서 내려?

이상했다. 웃돈을 얹은 것에 신이 난 마부가 전생의 택시 기사님들 부럽지 않게 광란의 질주를 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내 마차보다 앞에 올 수 있었다고?

“…….”

황당하다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어쩐지 흠칫했던 가브리엘은 어쩐지 초조한 것처럼 목덜미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단추 하나가 뚝 소리를 내며 풀렸고, 깊은 굴곡을 만드는 근육의 골이 더 선명해졌다.

이상하게도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뭐, 뭐야. 왜 벗고 그래?

난 알 수 없는 민망함에 눈을 돌렸고, 어쩐지 그도 허둥지둥하는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그냥 가셔서요.”

“……네?”

설마 그럴 리 없었겠지만.

“가는 길이 같아서 동행하자 말씀드리려 했는데.”

이것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와 내가 어떻게 가는 길이 같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 경악할 사실도 깨달았다.

난 눈을 부릅떴다.

이 남자 정말 왜 여기에 있지? 제국군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 아니었나?

‘사령관이 혼자 돌아왔을 리도 없고.’

그건 말도 안 되지. 어이가 없어 속으로 픽 웃는데, 가브리엘이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행동이 무척 빠르시더군요, 힐.”

잠시 호흡이 정지했다.

‘지금 가브리엘이 날 힐이라고 불렀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까 위험에서 구해주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부른 것 같았다.

기분이 삽시간에 떨떠름해졌다. 힐이라니, 우리가 무척이나 친근한 사이처럼 착각하게 되지 않는가.

‘그건 편지에서나 부르던 호칭이잖아.’

그렇다고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라고 하기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떫은 감이라도 삼킨 듯 오묘한 기분이었다.

“벨키우스 공작님. 왜, 저는 제국군이 귀환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여기에 계시죠?”

“…….”

그것도 우리 집 앞에.

정신을 차리고 물은 말에 이번에는 가브리엘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한 발짝 움직이자 가브리엘이 따라왔다.

뭐야, 왜 이래.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가브리엘의 표정 역시 딱딱해졌다.

음, 그래. 저 표정이 내겐 익숙하다. 역시 친근했던 감각은 모두 착각인 게 분명했다.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설마 혼자 오셨을 리도 없고요.”

“왜 안 됩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얼른 아니라고 말해!

“…….”

“영애?”

경악스러웠다.

설마, 설마 로제를 보기 위해서 관례도 규칙도 다 무시하고 이 자리에 맨발로 달려온 것은 아니겠지?

나는 우리 로제가 그런 스캔들에 휘말리는 것은 극구 사양이었다.

사람들이 가브리엘의 행동을 두고 그를 욕하겠는가?

아니다. 우리 로제를 욕하겠지!

절로 눈이 뾰족해졌다.

“언제 귀환, 하셨나요?”

“……방, 아니.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미친 듯이 달려 오지 않았습니다.”

뭐라는 거야. 그보다 방금이라고 하지 않았어?

난 고개를 저었다. 잘못 들었으리라. 황제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우리 집부터 올 리가 없잖아. 하하.

설마 그렇게 미쳤을까.

“로제라면 지금 저택에 없는데, 아쉽게 되셨어요.”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를 생각해서 해준 말에, 가브리엘은 갑자기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응?

그리고 눈을 날카롭게 뜨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저는 로제리엘 영애를 만나러 온 것이…….”

그가 무어라 하는 순간이었다.

쾅! 쿵! 하는 소리가 났다.

“!”

나는 깜짝 놀라 우리 집 입구 너머, 수도의 힐링턴 저택 앞쪽에 비어 있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게 그쪽에서 무언가 물건 옮기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는 비어 있을 텐데?’

공작가 수도 저택의 앞에 있는 저택이 비어 있단 것이 좀 이상할 법도 하지만, 힐링턴의 몇 대 전의 가주가 사랑하는 아내의 양부모를 모시기 위해 지은 건물이었다.

제법 아름답게 꾸며진 곳이었으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가문에는 골칫덩이로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아빠가 새삼스레 저곳을 누구에게 머물라 주었을 리도 없…….

‘그럼 누가?’

그때, 짐을 옮기던 사람 중 누군가가 내 쪽을 바라보며 반가운 표정을 했다.

정확히는 내 옆에 우두커니 서있는 훤칠한 남자를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식은땀이 흘렀다.

‘설마.’

시선의 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무뚝뚝한 얼굴을 한 가브리엘이 보였다. 그는 아까보다 더욱 낮은 목소리로 느릿하게 대답했다.

“싫으십니까?”

“네?”

무슨 소리지?

그의 미간은 한층 찌푸려져 있었고, 무언가 당장 물러서고 싶다는 듯 거북함을 참는 표정이었다.

나 또한 기분이 이상해졌다. 지금 나 때문에 저런 표정 하는 거야?

“바로 앞에, 당분간 머물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저기에.

난 황당하다는 시선을 감추지 못하고 바로 물었다.

“영지로 돌아가시지 않고요?”

“네. 이곳이 수도에서 더 가까워서.”

“그게 아니시겠죠.”

거짓말도 잘했다. 로제를 보기 위해서라고 해야 맞는 것 아닌가?

나도 모르게 툭 내뱉고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가브리엘은 내 말을 들은 직후였다.

“영애?”

그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게 무슨, 설마. 영애, 이미 알고 계셨던 겁니까……?”

난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내가 뭘 알아. 지금 봤는데?

“그래서 그렇게 화를…….”

기가 막혔다.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화는 자기가 여태까지 내고 있지 않았던가?

난 당최 알 수가 없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랑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내가 듣기에도 제법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들렸다.

상대에게도 그랬는지 가브리엘의 얼굴이 한층 더 냉랭해졌다.

“상관이 없, 습니까?”

우리 사이에는 냉동고가 들어서도 괜찮을 만큼 차가운 기운이 풍겼다.

이게 아닌데.

어쩐지 기분이 더욱 안 좋아졌다. 꼭, 대화를 망쳐 속상한 것처럼.

“……그래요.”

저 저택에 누가 머무르는 것이 나랑 상관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저런 얼굴을 하는 거지?

‘어쨌든.’

한숨이 나왔다.

‘로제가 그렇게 좋은 거구나.’

가브리엘을 보자마자 강제로 깨달아야 했던 것은 그가 로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였다.

황제를 알현하지 않아 체면을 구기는 것도, 제대로 된 승전식을 치르지 않고 몰래 돌아와 손가락질받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듯 구는 그의 행동들 모두가 하나를 가리켰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로제를 위해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증거라는 것.

‘아.’

그런데 어째서일까.

흐뭇하게 바라봐야 할 내 동생에 대한 그의 애정이, 오늘따라 따끔하게 느껴지는 것은.

*

“오늘도 영애는 완벽하시군요.”

“가르칠 게 없는 수준입니다.”

“공작께서도 자랑스러워하시겠어요.”

데뷔탕트를 앞두고 교육에 더 열내고 있는 선생님들은 저렇게 칭찬하곤 했다.

하지만 이상한 말들이다.

‘자랑스러워한다고?’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당연한 것을 노력했을 뿐이다.

마음이 복잡했다.

데뷔탕트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내겐 무척 중요했다.

데뷔탕트 전, 내 정확한 축언에 대해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귀족의 아이가 태어나면, 대다수는 그 아이의 축언이 그들 부모에게는 전달이 된다.

하지만 정확한 그 내용을 알게 되는 것은 귀족 자제가 데뷔탕트를 하거나, 혹은 정식으로 작위를 갖게 되었을 때.

‘가브리엘이 그랬던 것처럼.’

내 축언을 생각하면 식은땀이 났다.

‘불길한 축언.’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 시종의 말. 그리고 여태까지 누구도 내게 이야기도 언급도 해주지 않는 내용.

“언니, 자?”

바로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양쪽으로 머리를 땋아 내린 로제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주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내 동생일 것이다.

“잠이 안 와?”

“응! 언니는, 안 자?”

“보다시피. 들어오렴, 로제.”

상냥하게 웃어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 점은 퍽 아쉬웠다. 전생의 기억 때문에 아직도 환하게 웃는 것이 어려웠다.

얼른 달려온 로제가 어린아이처럼 히히 웃으며 침대 위로 점프했다.

그리고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내가 떠나게 되면 이 애는 슬퍼하겠지.

“우리 곧 축언을 듣게 되잖아. 막 무서운 축언이면 어떡하지? 그래서 잠이 안 와.”

난 깜짝 놀라서 중얼거리는 로제를 바라봤다. 언제나 씩씩하고 밝기만 했던 내 동생이 그런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정말 말도 안 되는 걱정이라는 것을 알아, 속으로 웃음도 나왔다.

“그럴 리가.”

“으응?”

“로제. 네 축언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따뜻할 거야. 걱정하지 마.”

자신하듯 말하니 불만이 있을 때의 습관대로 로제는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그런 게 어딨어, 언니.”

“여기 있어. 로제는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쁘니까, 좋은 축언을 가지고 태어났을 거야. 모두가 널 좋아하잖아.”

“헤헤. 그럼 언니도!”

“응?”

“언니도 무척 예쁜 축언일거야. 우리는 같이 태어난 쌍둥이잖아.”

수줍게 웃는 모습이 정말 어여뻤다.

로제는 모르겠지만, 이 애는 정말 신기한 아이였다.

“그랬으면 좋겠다…….”

“맞다니까! 언니 축언이 나보다 몇 배는 더 좋을 거야. 언니는 항상 나보다 더 똑똑하고, 열심히 하고, 멋있잖아.”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로제의 열렬한 위로에 절로 마음이 푸근해지려고 할 때,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뜬 로제가 말했다.

“근데 언니. 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는데.”

“뭔데?”

로제가 눈을 깜빡였다.

“언니, 가브리엘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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