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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25화 (25/155)

25화. 축언의 전달자

난 잠시 멈칫했다.

들었다는 건 분명 가브리엘에게서 직접 들었을 것이다. 나도 만났으니 로제는 당연히 이후에 만났을 테니까.

하지만…….

‘왜 지금. 왜 하필 그 화제야?’

내가 선택한 것은 모른 척이었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 수 없다면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내 복잡한 속을 모르는 로제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다시 물었다.

“만난 거 들었는데, 진짜 오랜만이잖아. 느낌이 어땠어?”

난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느낌 말이야, 느낌! 계속 편지만 오가고 벌써 12년이잖아.”

그건 내가 로제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네 약혼자에게 내가 무슨 느낌을 받길 바라는 거야?

반짝반짝 빛나는 로제의 눈을 바라보기 거북해졌다.

추궁하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알 수 없는 기대를 품은 것인지 읽을 수가 없어서.

“그래. 만났어. 하지만 우연히 만난 거고, 별다른 느낌이 있을 리 없는 상대잖아.”

그러니 네가 오해할 것도 없단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을 때, 무언가에 흥분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로제가 빠르게 속삭였다.

“그게 아니라. 가브리엘 많이 변했지? 막 오랜만에 만나니까 어, 첫인상도 바뀌는 것 같지 않아, 언니? 눈빛이 막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고 그렇게 말이야.”

난 로제의 불꽃 같은 기세에 당황했다. 얘, 얘가 갑자기 왜 이래?

하지만 로제의 말 때문일까.

‘확실히.’

마주쳤던 가브리엘의 모습을 나도 모르게 떠올렸다.

‘많이 변하긴 했지만.’

가브리엘은 어렸을 때도 인형처럼 예쁜 소년이었다. 눈물의 역변 없이 고스란히 잘 자란 케이스다.

난 고민하다가 툭 내뱉었다.

“별로 바뀌지 않았던데.”

“그, 그래?”

“응.”

로제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모습이 꼭 당황한 것 같아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왜 그러지? 원하는 대답이 이게 아니었나?

정말 의도하지 않은 방향이었지만, 생각의 방향이 다시금 가브리엘에게로 향했다.

선이 굵어지고 단단해졌지만, 얼굴 자체는 화려한 이목구비 그대로였던 남자.

‘그리고 근육이 탄탄했…….’

그러다 얼굴을 굳혔다.

내가 왜 가브리엘을 이 정도로 자세히 기억하고 있지?

관심 없는 것에는 제대로 기억도 못 하는 내 평소 성격을 돌아보니, 괜히 귓가가 홧홧해졌다.

“어, 막 되게 잘생겨지고, 심장이 뛰거나 이러지는 않았…….”

“아니. 내가 왜?”

난 다급히 거부의 말을 쏟았다. 로제는 두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래도 그 뭐더라, 다 제치고 여기에 온 것은 감동…….”

“아니지. 그로 인해 황궁에서 질책 받으면 어쩌려고? 홀로 돌아오는 사령관이 어딨어.”

“그, 그래?”

난 얼굴을 구겼다.

그런데 너무 정색했던 것일까.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좋아하는 상대를 욕해서 기분이 나빴던 건가 싶어 로제를 봤는데, 퍽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표정을 읽기 어렵네. 우리 로제, 그래도 기분 나쁜 것 같진 않은데…….’

로제는 뺨을 긁으며 돌연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언니, 나는 그만큼 힐링턴과 벨키우스가 가까운 사이인 거라 생각했어. 우리 수도의 저택에 머물 정도로 말이야.”

어쩌면 아빠에게도 그런 뜻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지금도 왜 그 저택을 가브리엘에게 허락했는지, 하필 그곳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지나치게.’

염치없고 가깝다.

‘바로 옆에 붙어 있지 않곤 못 배기겠다는 태도 같잖아. 아직 제대로 약혼도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동시에 귀족들은 그 소식을 듣고, 힐링턴과 벨키우스가 소문과는 달리 퍽 사이좋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가까워진 건 아니야. 같은 공작가라지만 그는 이제 전쟁 영웅이고, 다들 이 혼담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어.”

“으음, 그렇구나…….”

난 고뇌했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었다.

‘그건 로제에게 힘이 되는 동시에, 독이 될 거야.’

난 로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 불쌍하고 애틋한 동생.

이 발랄한 애가 전투력 만렙인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고상한 말다툼이나 하며 잘 버틸 수 있을까?

‘주먹질하면 안 될 텐데.’

결론은 하나였다. 아는 것이 힘이다.

난 주먹을 야무지게 쥐었다가, 로제의 손을 맞잡고 힘을 꾹 주었다.

“로제.”

“으응?”

“그러니 이제부터 더 수업을 열심히 받자.”

“어? 왜 얘기가 그렇게 튀는…….”

“이리저리 핑계 대면서 수업 안 듣고 사라지는 일 그만해. 언니 말 들어줄 거지?”

로제는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불만을 토했다.

“하, 하지만 언니야! 나도 나름 바빠. 정말이야. 나 진짜 바쁜데?”

“시끄러워. 너 무도회에서 춤은 제대로 출 수 있겠어?”

“방법이 있어!”

“뭐?”

로제는 씩 웃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말을 아주 자신 있게 내뱉는 것이 아닌가.

“안 추면 그만이지, 악!”

“너 정말!”

어깨를 찰싹 때리니 죽겠다고 침대 위를 나뒹굴었다.

내가 지금 다섯 살과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아니면 스무 살 쌍둥이 여동생과 대화하고 있는 거야?

말하다보니 새삼 걱정이었다.

‘가브리엘과 춤추다 힘만 무식하게 세서 넘어뜨리면? 그러다 발등을 박자대로 밟아버리면?’

누가 내 동생 욕하는 건 절대 못 참는다.

원래 <영애는 달콤하다>의 줄거리를 떠올려보면, 힐링턴의 로제와 약혼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주인공들의 혼약을 무너뜨리려고 수작을 부렸다.

그 과정에서 원작의 로제리엘은 적잖은 수모를 겪는다.

‘납치당하는 에피소드도 있었고.’

난 얼굴을 굳혔다.

“언니는 그런 꼴 못 봐.”

“엥?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 애가 내 삭막할 수 있었던 이번 생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얼마나 큰 햇살이 되었는지는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로제가 없었다면 내가 이 가족들 사이에서 이렇게 지낼 수 있었을까?

어쩌면 아빠와는 제대로 쳐다도 보지 못하는 사이로 남았을 수 있었다. 지금도 아빠나 집안 사용인들과 그렇게 살가운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로제. 마음고생할 일 없게 언니가 도와줄게. 난 내 동생이 누구보다 좋으니까.”

얼떨떨한 얼굴을 하던 로제가 빙긋 웃었다. 그야말로 <화려하게 꽃피리라>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나도 언니 좋아. 그리고 언니도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냐면 다들 언니를 좋…….”

“고마워.”

로제는 사람들이 내게 살갑게 굴지 않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가끔 저리 거짓말을 해주었다.

“착해, 착해. 우리 로제.”

“아니, 언니, 진짠데…….”

그런 것들에 굳이 신경 쓰지 않게 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상냥하기도 하지.

난 부드러운 로제의 머리카락을 한참 쓰다듬으며 안정을 찾았다.

*

미엘르 제국은 축언과 그 축언을 통해 내린 이능으로 인해 많은 이득을 보아온 국가였다.

그렇기에 축언과 이능을 내려준 신을 모시는 유일신 신앙이었다.

또한 정확한 신의 기원도, 신의 언어 역시도 일반인들은 알 수 없었기에 오래 전부터 축언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전달하는 이는 정해져 있었다.

최고 신관.

그리고 최고 신관들은 유일신을 그리 불렀다.

“연님.”

둥글게 둘러 앉아 있는 앳된 얼굴의 아기 신관들은 오랫동안 신관에서 생활해 온 현재의 최고 신관 크라이스를 보며 경청 중이었다.

“궁금한 것을 물어봐도 좋습니다.”

“저요, 저요! 최고 신관님, 저요!”

유달리 활발한 아기 신관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웃은 최고 신관 크라이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기 신관은 두 눈을 반짝였다.

“왜 하필 여언-님인가요? 발음 너무 힘들어요. 어디서 온 단어예요? 뜻은 뭐예요?”

아이다운 열정에 낮게 웃은 크라이스는 아기 신관의 동그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유독 나긋나긋한 그 손길에 아기 신관은 부끄럽다는 듯이 뺨을 붉혔다.

“그건 모르지요.”

“어, 최고 신관님도 모르는 게 있어요?”

“신의 언어를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추측할지언정 확언하고 재단할 순 없답니다.”

아기 신관들은 일제히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기억할 건 그것이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을 사랑하는 자. 신의 이름조차 내뱉지 못한다면 부끄러운 것이라는 걸요.”

아기 신관들은 일제히 연님, 연님을 중얼거려 보았다. 그래도 역시나 어렵다. 꼭 사용할 수 없는 언어인 것처럼 낯설지 않은가.

그러다가 서로를 바라보며 아기 신관들은 키득키득 웃었다. 최고 신관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고, 뜻을 전달 받는 자신들이 뿌듯해서였다.

“많이 어려운가요?”

“그래도 좋아요! 재밌어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거 아니잖아요.”

“좋은 태도로군요.”

이곳에서 오간 이야기는 결코 밖에 새어나갈 수 없다.

신관은 날 때부터 신관이지만, 그들은 몸에 새긴 것처럼 신에 대한 사랑과 경애를 품고 태어났다.

그리하여 최고신관으로부터 지식을 배우고, 신의 지식을 전달하고, 탐닉하는 건 나이를 불문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은 신을 숭배하고, 사랑한다. 신관이기 때문에.

“축언을 말할 때 두려우신 적은 없으세요, 크라이스님?”

그때 수줍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조용한 아기 신관이 손을 들고 물었다.

아기 신관들은 일제히 눈을 껌뻑거리며 숨을 죽였다.

축언. 결국 신관들의 가장 큰 업무는 바로 신의 언어로 내려오는 축언이었다.

“저는, 저는 두려워요.”

아기 신관들은 서로의 손을 꼬옥 잡으며 웅성거렸다. 사실 나도 그래. 나두, 나두!

아주 짧은 시간이 흐른 뒤, 크라이스가 말문을 열었다.

“왜요. 축언을 내뱉으면,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 지어지는 기분이라서입니까?”

크라이스의 눈이 가늘어졌고, 시선을 받은 아기 신관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아기 신관님. 우리는 신의 축언을 전달할 뿐이지요. 우리가 없는 축언을 만들어낸 적이 있었나요? 그게 아니라면, 왜 두려워해야 합니까?”

아기 신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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