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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26화 (26/155)

26화. 최고 신관, 크라이스

사실 모두가 신관을 처음부터 철석같이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일 뿐인데, 저것들이 신의 축언을 속이고 잘못 전달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축언을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받더라도 지독하고 저주와 같은 것을 받게 될 바엔 차라리 받지 않는 게 나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축언을 속이게 되면?

불신은 뿌리 깊었다. 하지만 긴 세월동안 신관들은 자신들의 결백함을 증명해왔다.

그 믿음에 대한 보상이라는 듯 사람들은 차츰차츰 신관들이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입은 진실만을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축언은 오로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의심하는 자들이 있긴 있었다.

“그, 그게 밖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아기 신관은 그대로 와앙 하고 울어버릴 기색이었다. 어깨가 서럽다는 듯 들썩였다.

크라이스는 그런 아기 신관을 달래듯 눈을 휘었다.

그 눈빛이 퍽 부드러웠는데도 어째서일까?

아기 신관들은 조금 무섭다고 느꼈다.

“그래요. 틀리진 않아요. 우린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당신들 중 누군가가 내 뒤를 이어 최고 신관이 된 이후에는 더욱 그렇지요.”

방금까지 숨죽이고 있던 아기 신관들의 눈이 다른 의미로 반짝였다.

최고 신관의 자리!

그들 모두는 저 영광된 자리에 앉기를 바라며 이곳에 모였다.

“크, 크라이스님은 최고 신관이 된지 20년이 넘으셨잖아요! 진짜, 진짜 멋져요!”

“맞아요. 우리는 아직 아기 신관인데요!”

최고 신관 크라이스.

그는 무려 4살의 나이에 자신의 축언을 훌륭히 읽어내고, 몇 년 뒤 모두의 동의를 받고 최연소 최고 신관이 되었다.

<너의 것처럼 다룰 수 있으리라>.

성스러운 자. 축언의 대리자.

신을 가장 사랑하는 자.

최고 신관이란 미엘르 제국의 황제도 함부로 끌어내리거나 욕보일 수 없는 자리였다.

“그러니까 아기 신관님.”

아까 축언이 무섭다고 했던 아기 신관은 이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창피하고, 속상해서.

꼭 자신의 말이 최고 신관을 의심하고 축언을 모독한 것처럼 느껴져서.

“그런 얼굴 할 필요 없답니다. 그대의 우려와 걱정이 맞으니까.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답니다.”

아기 신관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무, 무슨 일이요?”

“내가 최고 신관이 되던 해. 하지만 아직 이전 최고 신관님이 있었을 때입니다.”

크라이스는 꿈을 꾸는 듯 눈을 빙긋 휘었다.

“한 아이가 태어났지요. 아이는 언뜻 듣기엔 불길한 축언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축언이 불길하다는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어요.”

“시, 신관은 축언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다니면 안 되는데…….”

크라이스는 빙긋 웃었다.

“그래요.”

그건 이전 최고 신관을 모독하는 말일 수 있기 때문에 아기 신관들은 겁에 질린 듯 눈을 굴렸다.

“아이의 엄마는 무척이나 몸이 약해졌어요. 저택에도 불길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지요. 자, 그러면 주변에서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어, 하지만.”

눈을 동그랗게 뜬 아기 신관들을 바라보며, 크라이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세상에는 나쁜 축언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신의 사랑이니까요. 단지 같지 않을 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가끔 제 입맛에 맞추어 해석하고 받아들인답니다. 주변에서는 그 불쌍한 아이의 탓으로 몰아갔어요.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사랑했지만.”

불행해졌지.

크라이스는 말을 삼키며 말했다.

“그리하여 신전에서는 아이를 신전으로 데리고 오는 방법을 선택했지요. 정말 문제가 있다면 그 축언을 정화한다는 목표였답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어떻게 됐나요? 신전에 있어요? 축언은 정화되었나요?”

아니.

크라이스는 온화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그 아이는 그렇게 신전의 것이 되었으니, 언젠가 되찾아와야지.

“어쨌든, 그것 때문에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거랍니다. 사람들은 나쁜 축언으로 인해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진다 오해할 수 있으니까요.”

크라이스는 손을 짝 쳤다.

절로 우울하게 물들어 있던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군요. 자,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요?”

“저, 크라이스님!”

다시 아까의 아기 신관이었다.

“아기 신관님은 질문이 많군요. 그래요, 이번에는 무엇인가요?”

“그…… 힐링턴 공작가에 가신다던데, 축언을 직접 말씀해주시러 가는 거예요?”

어린 신관들이 소문에 밝구나.

크라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휘었다.

“네, 조만간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 역시, 그 소문의 대상을 만나길 기대했다.

‘신전의 보물.’

힐데아 폰 힐링턴.

이전의 최고 신관이 억지를 부려서라도 신전에서 품으려고 했던 그 아이를, 보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확인을 한 후에.

‘다시 신전의 보물이 되게 할 수도 있겠지.’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데뷔탕트의 준비와는 별개로, 아침부터 무척 어수선했다.

“아가씨들, 일어나세요!”

촤락-커튼이 쳐지고, 리라의 명랑한 소리가 울렸다.

난 들이닥친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했다.

고개를 돌리니 옆에는 방만한 자세로 이불을 걷어차고 자고 있던 로제가 보였다.

아아, 그랬지. 밤까지 한참 동안 로제와 떠들다가 잠들었는데…….

“리라, 좋은 아침.”

무표정한 얼굴의 리라가 나를 한번, 그리고 로제를 한번 바라봤다.

“으으, 벌써 아침이야?”

그때, 로제가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눈은 아직 감겨 있었다. 난 어설프게 입꼬리를 흔들며 내 나름의 웃음을 흘렸다.

“어서 움직이세요. 오늘 일정이 많아요, 아가씨들!”

그랬지. 난 눈에 힘을 딱 주며 일어났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드디어 오늘.

‘최고 신관이 방문하는 날이야.’

그리고 나는 내 축언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치장을 마치고 손님을 맞이하러 내려갔을 때.

‘다들 모여 있었네.’

아빠, 그리고 자주 얼굴을 본 사용인들 대다수가 그곳에 모여 있었다.

나 못지않게 딱딱한 얼굴을 한 시엔이 그들이 모여 서 있던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가씨들, 최고 신관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답니다. 한 분씩 들어가시면 되세요.”

나와 로제는 아빠를 봤다.

굳은 얼굴의 아빠는 나를 한 번, 그리고 로제를 한 번 바라봤다.

‘걱정하고 계신 것, 같은데. 착각일까?’

무슨 말이라도 해주실까 긴장한 상태로 침을 삼켰는데, 아빠는 다른 말은 하지 않으셨다.

그저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아주 조금 실망했던 것도 같았다.

“저 먼저 들을래요!”

그런 날 알아챈 것처럼,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로제가 먼저 나섰다.

멍하니 바라보니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로제가 망설임 없이 방에 들어갔다.

<화려하게 꽃피리라>.

분명 그 축언을 듣고, 로제의 뺨은 장밋빛처럼 기쁨으로 물들 것이다.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난 내 일만으로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만약에라도 그 소문이 사실이면.’

어깨에 누군가 손을 올려 깜짝 놀라 바라보니, 무표정한 리라였다. 뒤에는 어느새 이동한 것인지, 시엔도 있었다.

왜 저렇게 보는지 알 수가 없어 눈을 깜빡이니 리라가 말했다.

“숨을 천천히 내쉬세요.”

아, 그때야 내가 가쁘게 숨 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사용인들이 불편하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알았다.

부끄러워졌다. 아마 첫째 아가씨는 대범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미, 미안.”

“로제 아가씨는 금방 나오실 거예요. 축언을 듣는 일은 긴장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아프거나 한 것은 아니니까요.”

아니, 리라. 아플지도 몰라.

정말 아플지도 몰라.

*

젊은 귀족들은 아는 사람이 드물겠지만, 당대 고위 귀족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시어스 폰 힐링턴과 신전의 사이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소중한 아이 중 하나를 축언의 정화를 이유로 들며 납치하듯 데려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기의 로맨스로 이어졌던 힐링턴 공작 부부는 울부짖었다. 아이를 찾기 위해 피를 토하며 노력했다.

그러나 신전의 권력은 막강했고,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러다 사건이 발생했다. 신전에서 꽁꽁 싸매듯 감추고 있던 힐링턴의 아기를 웬 납치범들이 납치했던 것이다.

신전이 움직이기 전에 항상 주시하고 있던 힐링턴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이런 아기 하나 지키지 못하는 신전에 내가 어찌 내 딸을 의탁할 수 있겠습니까?’

시어스는 그렇게 주장했다.

명분은 명확했고, 황제도 이때다 싶어 힐링턴의 손을 들어줬다.

‘옳은 말이오. 힐링턴의 첫째는 자신의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네.’

마침 최고 신관의 후계자로 크라이스 자신이 등장하면서 전대 최고 신관은 아쉽게도 힐링턴의 아이를 포기하게 되었다.

이후엔 겨우 되찾아온 쌍둥이를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하고, 몸이 약해진 공작부인이 죽었다던가.

공작부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자연사가 아니라 누군가의 수작이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어쨌든, 크라이스는 사건의 내막에는 관심이 없었다.

빼앗긴 신전의 물건이라면 언젠가 힐데아를 데리고 올 생각은 하고 있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전대 최고 신관과 사이가 좋지도 않았었고, 그에게는 당장 더 중요한 목표가 있었으니 오늘은 살피기 위해 온 것이었다.

좋은 기회이지 않은가.

“안녕하세요, 최고 신관님!”

크라이스는 생각을 끊어내며, 당차게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을 바라봤다.

활짝 웃는 미소가 무척 싱그러웠고, 인상 깊었다. 마치 바라보는 모든 이의 호감을 끌어낼 듯이.

“크라이스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로제리엘 영애.”

“어? 제 이름을 알고 계시네요.”

크라이스는 눈앞에 선 여인을 보며 눈을 휘었다.

소녀라고 해야 할 정도로 앳된 여인. 유독 선명한 분홍색 머리카락이 특이했다.

‘둘째.’

소문과 비슷해 보였다.

첫째 힐데아는 조용하고 어두운 성격으로 주변에 사람이 없고, 둘째 로제리엘은 밝고 화사한 성격으로 사람이 줄처럼 따른다지. 대신 발랄하고 해맑아 별 생각이 없다고.

‘소문이 진실만은 아니로군.’

대부분은 그의 눈웃음에 경계를 풀고 마음을 보이기 마련.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달랐다.

“제 축언을 얘기해 주세요.”

당당한 태도로 손을 내미는 모습은 특이했다.

누구도 축언을 들을 때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는데.

재밌다는 생각이 스칠 찰나였다.

‘음?’

크라이스는 로제리엘에게서 느껴지는 어떠한 이질감에 얼굴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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