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운명이 없다
그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정의하기가 힘들었다. 크라이스는 손을 잡았고 느낀 그대로 로제리엘의 축언을 전달했다.
“영애의 축언은…….”
보통 축언을 들은 자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뉜다. 세상을 가진 듯 기뻐하거나, 땅이 무너진 듯 절망하거나.
그런데 로제리엘은.
“감사합니다!”라고 발랄하게 외쳤다.
“?”
“그럼 나가도 되나요?”
그게 다였다. 그 태도는 무척이나 산뜻했고 담백했다. 충격적일 정도로.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잡았던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는 그녀를 눈에 담았다.
‘이상해. 꼭 당연한 것을 들었다는 것 같지 않나?’
부모에게 미리 축언을 들었다고 하기에는 주변의 긴장된 태도가 걸렸다.
그때, 시선을 들어올린 로제리엘과 눈이 마주쳤다.
“최고신관님.”
아주 잠깐 얼음처럼 차가웠던 것 같았던 그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설탕처럼 부드러워졌다.
“그럼 저희 언니 축언도 잘 부탁드려요, 최고 신관님!”
“축언 앞에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저희 언니 불러올게요!”
문이 닫히고,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문이 열렸다. 크라이스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전 최고 신관이 노렸다는 보물.’
크라이스의 눈이 호기심과 흥미로 물결치려는 찰나, 마주친 여인과 시선이 얽혔다.
그리고 그는 알 수 없는 충격을 받아, 순간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렸다.
그건 축언이나, 이능의 느낌을 감지한 것이 아니었다.
보는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이건, 뭐지?’
*
덜덜 떨리는 다리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리라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자 집중한 채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던 시어스 폰 힐링턴 공작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왜.”
“다리 좀 그만 떠시면 안 됩니까, 공작 각하? 지금 계속 그러고 계십니다.”
시어스는 미간을 찌푸리고, 리라의 요청을 묵살했다. 그리고 자신의 용건만 꺼냈다.
“리라, 넌 어떻게 생각하지? 그 아이를, 항상 지켜봐 왔으니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도 모르겠군.”
“무엇을 말씀입니까?”
“그야.”
시어스는 망설이다가 꽤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힐의 축언, 그 아이가 불길하다고 생각할 것 같은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지? 만약, 좌절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이렇게 겁쟁이였나 싶군…….”
<정해진 운명이 없다>.
힐링턴 공작은 워낙 대쪽같이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래서 다른 귀족들이 그 주둥이로 험담하고, 손가락질하며 떠들던 말든 그런 것들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제가 아는 힐데아 아가씨는 강한 분이세요. 문제는 최고 신관이 어찌 나오는지 아니겠습니까?”
“그가 일을 벌일 것 같나?”
“선대 최고 신관과 뜻이 같을 수도 있겠지요. 신전 안은 조사할 수가 없어 크라이스에 대해 아는 것이 극히 적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힐데아, 본인이 어떻게 생각할지였다.
“신관들은 그리 말하죠. 불길한 축언은 없다고. 하지만 그래놓고 선대 최고 신관은 아가씨를 강탈해갔습니다.”
시어스는 이를 까득 갈았다.
“그랬지.”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두 아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아프고 아프다 세상을 떠났다.
“이번 최고 신관도 그런 인물이라면 아가씨의 귀에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을 테고, 만약 다르다면 있는 그대로 조언할 겁니다.”
만약 전자라면 또다시 힐링턴과 신관은 척지게 되리라.
“그렇게 불안하시면 아까 무슨 말씀이라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리라의 타박에 시어스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앓았다.
다시 생각해도 한심했다. 이 순간을 계속 미뤄왔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미리 힐데아 본인에게만 축언을 언급하고, 사정도 모르는 것들이 떠드는 것처럼 넌 저주받은 아이가 아니다, 그리 말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힐데아가 믿었을까?
괜히 더 의심하지 않았을까?
“리라, 혹시 표정제거술이 풀렸나?”
리라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살짝 미간만 찌푸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게 쉽게 풀리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너, 로제를 볼 때 웃더군.”
리라는 잠시 숨을 멈췄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진 눈도 함께였다.
“제가요? 제대로 보신 것 맞습니까, 각하?”
“그래. 간혹. 너도, 시엔도 그러했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로제 아가씨의 이능이 모든 이의 호감을 사는 강력한 것이라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렇다면, 아예 표정제거술을 없애는 건 어찌 생각하지?”
“…….”
잠시 서늘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리라는 아주 풀기 어려운 숙제를 떠안은 사람처럼 복잡한 눈빛으로 공작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왜 의미가 없지?”
“저는 항상 성심성의껏 아가씨들을 돌봐왔습니다. 힐데아 아가씨도, 로제 아가씨도 그 마음을 알아주실 거라 생각해요.”
시어스는 코웃음을 쳤다.
“사람은 보이는 것을 가장 믿는 법이다. 나는 지나치게 딱딱하여 알게 모르게 두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나 걱정하고 있지…….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리라의 얼굴이 굳었다.
“너는 그러지 않았을 것 같나? 네가 간혹 그런 표정을 로제에게만 보여줬다면.”
“…….”
“힐데아는?”
그녀는 한참동안 손가락을 굴렸다. 그리고 망설이듯이 속삭였다.
“제가 자연스럽게 웃게 된다면, 아가씨들께서도 좋아하실까요?”
퍽 자신이 없는 목소리였다.
시어스는 그 답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본인도 제 딸들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으니.
“일단은…… 축언을 들은 힐이 밝게 나오기를 바라야겠군.”
*
최고 신관이라고 하는 남자는 원작 소설에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축언을 읊는 자 정도로만 언급되어 있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대였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자마자 나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왜냐고?
‘이렇게 예쁘게 생긴 사람은 처음 봐.’
분명 성인 남자라는 것을 알겠는데도, 그는 정말 예쁘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닥까지 끌릴 듯 늘어진 머리카락은 내 것과 비슷한 색이었지만, 내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부드러워 보였다.
‘전생의 배우들보다 예쁜 것 같은데.’
하얗고 고운 피부로 여인보다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까 전의 상냥했던 표정과는 거리가 있었다.
뭐야. 설마 신관도 날 싫어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이런 상황에 아무리 익숙한 나라도 좀 우울해질 것 같다.
“어서 오세요.”
떨떠름하게 바라보는데,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힐데아. 맞지요?”
당연히 맞다. 로제리엘 말고 나밖에 더 있나.
얼떨떨하게 바라보는데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입술이 무척이나 붉었다.
“축언을 바로 듣고 싶습니까? 만약 당장 듣지 않길 원한다면 시기를 미룰 순 있어요, 힐데아.”
원래 이런 것도 묻나 싶었다.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가 듣지 않는다고 해도 어디서든 새어나갈 수 있고, 데뷔탕트 자리에서 공표할 수도 있다.
이곳에서 먼저 듣는 것이 낫다.
그건 알고 있지만…….
“친절, 하시네요.”
“제가 말입니까?”
“네, 친절하세요. 도망칠 기회를 주신 것 아닌가요? 제 소문을 들으셨을 테니까요.”
“…….”
분명 염려하는 시선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무척이나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전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최고 신관의 앞에 다가가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뒤 손을 내밀었다.
“제게 가르쳐주세요. 이곳에서 듣겠습니다.”
“의외, 로군요.”
뭐가 의외라는 거지?
어째서인지 살짝 내리 깐 크라이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는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세상에 나쁜 축언은 없습니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시니까요.”
“…….”
나쁜 축언은 없다. 지금까지 아무도 내게 해주지 않은 말이었다.
물론 책에 적혀 있던 말이었으나, 실제로 입 밖에 낸 사람은 처음 봤다.
절로 가슴이 따뜻해져 입술에 힘이 빠졌다. 작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다시금 손을 앞으로 더 내밀었다.
“들을게요. 가르쳐주세요, 최고 신관님.”
“……크라이스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어쩐지 아까보다는 유순해진 눈빛이었다.
원작에 없는 사람이라서일까?
나도 아까보다 한결 긴장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크라이스님.”
“자, 그럼.”
손이 얽혔다. 무척이나 길쭉하고 선이 고운 손가락은 나무덩쿨처럼 느릿하게 마디 사이로 엉켜들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손이 간지러운 것 같은데, 움직이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몰랐다.
입술을 깨물고 바라보는데 그가 말했다.
“영애의 축언은 <정해진 운명이 없다>군요.”
느릿하게 내뱉어진 말에 나는 한순간 멍해졌다.
정말 상상 최악의 축언도 상상해보았고, 내 이능이 치유였으니 그에 관련된 것이 아닐까 희망 회로도 돌려 보았었다.
그런데 저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말이다.
‘운명이 없다고?’
설마, 내가 소설 속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걸 가리키는 말일까.
그렇다면 내게 이 세계에서 살 운명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건 아니리라 생각해요.”
아주 진지한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크라이스라는 최고 신관은 정말 친절한 사람이구나.
복잡하게 뻗어가던 생각이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거짓말처럼 멈췄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원작 인물들의 축언을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묘한 점이 있었다.
<화려하게 꽃피리라>.
<그 어느 것도 뚫지 못하리라>.
<가장 높은 곳에 서리라>.
그런 것들은 듣기만 해도 좋은 이능을 타고나겠다,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 것은?
“힐데아.”
조곤조곤 아이를 달래듯, 아직 잡혀 있는 손등을 크라이스가 도닥였다.
하지만 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지? 지금 이 사람, 손을 떤 것 같았는데……?
“네, 크라이스.”
이름을 부르니 잘했다는 듯이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역시 잘못 느낀 것이었나 보다. 손을 왜 떨겠어?
가만히 바라보니 그는 늦된 아이를 가르치는 인내심 깊은 선생님처럼 말했다.
“그냥 문장의 의미를 생각해보세요. 언제나 판단은 오로지 당신 몫일 테니까.”
편안한 사람이다. 근거 없는 호감이 가슴 속에 자리 잡는 것이 느껴졌다.
“저를 위로해주시는 것이군요.”
“위, 로? 제가 말입니까?”
“네, 지금 계속 좋은 말만 해주시고 계시니까요.”
항상 사람을 대할 때는 얼굴 근육이 망가지기라도 한 듯 딱딱하기만 했었는데 어쩐지 눈에 힘이 풀리고 입매가 경직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주 고마운 사람.
“문장의 의미 그대로. 그렇게 생각해볼게요.”
“……좋아요, 힐데아. 아, 저도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우물에 갇힌 듯 차갑고 무서운 순간이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따뜻했다.
그게 눈앞의 신관님 덕분인 것 같아서 예의를 다해 감사를 전했다.
“다시 뵐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사실 또 볼 일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마음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