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당신이 뭔데 나를 흔들어?
최고 신관이라고 경애 받는 자.
하지만 크라이스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비틀려 있었고,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신을 가장 사랑하는 자인 것은 맞지만, 신을 사랑하는 만큼 가장 증오하는 자일 것이다…….
문을 닫고 나온 크라이스는 지켜보는 힐링턴의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저 걸음을 재촉했다.
잡는 사람은 없었기에 금세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내가 왜 그랬지? 대체 왜?”
그는 멍하니 하늘을 봤다.
항상 원하는 대로 해왔었는데.
순조롭게, 목표를 향해.
“엇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대체 무슨 말들을 지껄인 거야. 그 여자가 대체 뭐라고?”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꼭 술이라도 먹고 홀린 기분이었다.
그는 의심했다. 설마 그게 그 여자의 숨겨진 이능인 건 아닌지를.
크라이스가 힐링턴에 오면서 원했던 것은 간단했다.
혼란, 상처, 원망, 그리고 오해.
처음 힐데아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생각난 것은 나약하게 꺾인 식물이었다.
뿌리가 단단하지 못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마르고 낡은 식물.
‘조금만 떠들어도 자멸하겠군.’
자애, 사랑, 애정?
웃기는 말이다.
나쁜 소문을 달고 다니는 여자였으니 조금만 들쑤셔도 오해하고, 휩쓸려서는 안 될 말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리라 생각했다.
사교계에서 자신의 빛나는 여동생과는 달리 칙칙한 곳에 서서, 자존심이 짓밟힐 대로 짓밟힌 힐링턴의 직계가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하면 신전에서 도망간 힐데아를 훗날 손에 넣기도 쉽고, 무엇보다 그의 복수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 이상해진 것은, 힐데아를 제대로 마주한 순간부터였다.
말갛게 저를 바라보는 그 고요한 붉은 눈과 마주치는 순간, 크라이스는 원래의 자신을 잊었다.
“회오리 속에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면 비슷할까.”
힐데아를 마주치기 전과, 마주하고 난 뒤의 자신이 둘로 갈라진 듯했다.
“대체 저 여자 정체가 뭐야.”
축언을 듣고 흔들리는 눈을 보니, 힐데아가 아니라 자신이 죽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따위의 말을.”
크라이스는 으르렁거렸다. 생각을 잊으려는 듯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어떻게든 퍽 자존심이 상했다. 발은 빠르게 힐링턴 저택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아주 두려운 것을 피하듯.
“난, 변하지 않아.”
힐데아의 손을 잡았을 때 느꼈던 충만한 환희, 기쁨.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공포와도 비슷했다.
*
“섭섭하더군, 벨키우스 공작.”
참변을 겪었던 당시, 어린 가브리엘이 죽지 않게 비호한 사람은 바로 눈앞의 군주였다.
황제 디트로이아. 성질이 불같은 그는 그야말로 들판의 사자 같은 인물이었다.
저릿저릿하게 닿아오는 공기가 날카로웠다. 그건 가브리엘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는 입술을 비틀었다.
“궁에 입궁하지도 않고, 바로 힐링턴 영지로 내뺐다지. 무엇이 그리 급하여 체면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냐?”
어려서부터 비호를 받았다는 것은 즉, 가브리엘이 황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의 아낌없는 헌신 관계라기보다는 서로 이득을 주고받는 거래 관계였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황제의 속을 잘 알았다. 이렇게 운을 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황제의 뜻이 바뀌었다.
힐링턴과 벨키우스의 혼담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
‘혼담을 깨려는 건가?’
생각만 해도 살기가 일었다. 결혼하라 닦달을 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꾼단 말인가.
가브리엘의 입술이 성질 사납게 비틀렸다.
“공기가 따가워 목이 졸릴 지경입니다, 폐하. 송구하게도 지난 세월이 녹록지 않아 이렇게 신을 시험하지 않으셔도 충분합니다.”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는 그런 적 없다는 듯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기세를 거두었다.
“그래, 좋다. 시간만큼 좋은 밑거름이 없다는 말이구나. 그것이야 좋다만, 이전 물음에 대해서는 답할 생각도 없는 것이냐?”
“급했습니다.”
가브리엘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 물색없이 솔직한 말에 황제의 눈이 꿈틀거렸다.
“무엇이.”
“승리했고. 원하시는 것을 드리기 위해 노력했으니, 바라던 것을 쥐는 것만 남지 않았겠습니까?”
“그 바라는 것이, 혼담이다?”
12년이다. 무려 12년.
구해주었다는 이유로 이리 알차게 써먹었으면 이후에는 군주가 염치를 알아도 좋지 않나.
그 시간은 가브리엘에게 있어서 힐데아 곁에 오지도 못하고, 말을 걸지도 못하고, 무엇을 주지도 못하는 고문의 시간이었다.
“잊었느냐, 가브리엘.”
황제의 단련된 두꺼운 손가락이 불쾌를 담아 그가 앉아 있는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황좌.
“내 너에게 이 자리를 주겠다 했을 터인데.”
가브리엘은 시큰둥했다.
그런 건 줘도 안 먹는다.
“필요 없다 하였을 텐데요. 그 자리 갖고 싶어 안달이 난 분이 따로 계실 텐데, 그분이나 주십시오.”
황태자를 일컫는 말이었고, 그건 현 황제의 약점이었다.
부지불식간에 옆구리를 찔린 것 같은 표정을 한 황제가 주먹을 쾅 내리쳤다.
“어찌 변한 것이 없어? 그리 말하는 것은 네놈뿐이다.”
“염치를 아는 것이고, 주제를 아는 것입니다. 제가 황자입니까, 저는 그냥 공작가 핏줄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닐 터인데. 그걸 아는 놈이 어디 황제의 자리를 두고 그따위 망발을 하지?”
가브리엘은 시큰둥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미간을 문질렀다. 사실 그들의 대화는 항상 이러했다.
가브리엘의 무례를 황제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고, 황제 역시 가브리엘의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쑤셨다.
“폐하, 저 무척 피곤합니다. 언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네놈이 무례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지만, 꿀단지 숨겨 놓은 곰처럼 구는구나. 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도 아무렇지 않다 이것이냐?”
일순간, 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폐하, 소신 감히 말씀 올리건데 다른 것은 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러나 그것은 안 되십니다. 제가 미쳐버릴지도 모르고, 미친개가 무엇을 물어버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팽팽한 대치가 이어졌다.
황제에게는 대단한 사이인 척 뻗대었지만, 진실은 어떠한가.
가브리엘이 당장 힐데아에게 제 마음을 고백해도 그녀에게 경멸의 시선이나 보내지 않으면 다행이다.
잘보인 것도 없는 이 시점에 황제가 방해까지 한다고?
‘다른 혼담이 들어오셨다고 하니, 가문 간의 혼약은 없던 일로 하지요. 그럼.’ 하고 차갑게 돌아서는 힐데아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르는 것 같아 그는 입 안의 살을 씹었다.
절대 안 돼.
“황녀와의 결혼은 어떠냐.”
늙은이가 미쳤나.
그래도 황제에게 해서는 안 될 불경스러운 생각을 불쑥 떠올리며, 가브리엘은 얼굴로 욕했다.
“내 뜻은 그러하다.”
“권력 남용이십니다.”
그의 연심. 사랑. 애정.
그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다.
‘힐데아.’
그녀가 허락만 한다면 가브리엘은 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힐데아가 자신을 진심으로 거절한다면, 결국 닿으려 애쓰던 손을 내려야 할 것이다.
“다른 하명하실 것이 없다면, 소신 물러나겠습니다.”
황제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 다만, 고요한 미소가 속을 뒤집어 놓았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황녀와 결혼? 정말 미친 소리 아닌가.
문을 닫고 나왔을 때, 가브리엘의 얼굴은 다시 한번 무참히 구겨졌다.
“오랜만이로군요, 벨키우스 공작.”
여인은 수컷 공작새처럼 화려한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린 듯 반짝거리는 화장에, 반사되는 빛으로 눈이 아플 만큼 휘황찬란한 드레스가 파티장 한가운데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여인의 시선은 정확히 가브리엘을 향해 있었다.
“하마터면 그대로 지나칠 뻔했습니다, 공작. 그대는 몰라볼 정도로 변했네요.”
몰라보긴 무슨, 기다리고 있었지 않았나?
‘차라리 전쟁터가 낫겠군.’
시선이 닿자 사르르 휘어지는 눈웃음의 뜻은 명백했다.
그러나 오만했다. 가브리엘은 그 눈을 보는 순간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저런 눈을 할 수 있는 자가 또 있진 않지.’
황녀 라피이아.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죠, 공작? 눈앞의 미에 눈이 멀었나요? 후후.”
요염한 목소리는 교태가 있었지만, 미추의 모든 기준이 힐데아 한 사람이 된 가브리엘에게는 길가의 돌멩이보다 못했다.
내뱉는 소리도 헛소리였다.
그는 고개만 까닥하고 지나치려했다. 여인의 날카롭게 뻗어진 눈썹이 사납게 씰룩였다.
“잠깐. 그대, 지금 뭐하는 거죠?”
가브리엘의 앞을 가로막은 부채를 보며 그는 부채깃이 닭털 같다고 생각했다.
가브리엘은 무심하게 말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어서.”
“뭐, 라고요?”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해야 합니까.”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이 당장 따귀라도 올려칠 것 같은 모양새였다.
가브리엘은 입술을 비틀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뉘신지 모르나 용건도 없이 상대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큰 무례입니다. 아셨으면 좋겠군요. 그럼 이만.”
“감히, 내게!”
원래도 호감이 없는 상대였다. 어릴 적, 이 황궁에서 저 여자가 얼마나 쥐잡듯 그를 잡았던가.
비루먹은 쥐새끼도 너보다는 낫겠다며, 아바마마의 사랑을 독차지 할 거란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상황이 이렇게 바뀐 것이 퍽 웃기기는 하다만, 즐겁진 않았다.
“귀중한 약속이 있어서, 그럼 이만.”
저를 씹어먹는 듯한 시선을 무시하며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힐데아. 오늘 힐데아를 보지 못했다.
*
뒤에 남겨진 황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바마마께 이미 그렇게 말했었지만, 그녀와 벨키우스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살랑살랑 웃으며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할 생각은 없었다. 그랬는데.
“제까짓 게 감히 나를 무시해?”
황녀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