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당신과 만나고 싶어요
백금발의 남자는 제법 못마땅한 기색으로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날카롭게 뻗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셔츠의 소매 단추를 채우던 남자는 탐탁지 않다는 듯 입술을 씹었다.
“이 정도면 괜찮나?”
깜빡 졸고 있었던 남자의 부관, 디안은 영혼 없는 목소리로 박수를 쳤다.
“예에, 충분히 훌륭하십니다. 어떤 여인이든 공작 각하를 뵈고 설레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백금발의 남자, 가브리엘은 아부성 발언을 짙게 내뱉는 부관을 노려보다가 뒤의 대기 중인 디자이너를 거울을 통해 바라봤다.
노려보는 듯한 그 냉정한 시선에 디자이너의 어깨가 흠칫 뛰어오르는 것도 알지 못하고.
“몇 벌이나 남았지?”
“그, 그게 마지막이십니다. 공작 각하. 그리고 감히 의견을 드리자면 제 눈에는 현재 입으신 옷이 제일 잘 어울리시는 것 같습니다!”
뭘 입어도 별로인데.
몇 번을 봐도 부족해 보였다.
‘로제리엘이 그렇게 말했지.’
언니의 이상형은 넓은 어깨를 가진 남자인 것 같아요, 라고.
힐데아가 자신을 보면 인상을 찌푸리고, 거북해하는 상황이니 겉모습이라도 최대한 멋지고 근사한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어깨가 더 잘 돋보이는 옷은 없나?”
지금도 터질 것 같은데요, 각하.
가브리엘은 자신을 바라보며 창백한 얼굴이 더 파랗게 질려 제발 마음에 든다는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디자이너의 심정을 전혀 몰랐다.
“지, 지금 입으신 옷이 어깨의 선을 가장 잘 살리면서도 과하지 않게 부각시키는 효과가…….”
“그런가?”
“예! 그, 그렇습니다!”
마뜩잖게 바라보던 가브리엘이 툭 말을 던졌다.
“어쩔 수 없지. 이것으로 하지. 나머지는 모두 적은 주소로 보내게.”
빳빳하게 굳은 점원은 적힌 주소를 보며 두 눈을 왕방울만 하게 떴다.
“이, 이 주소로 말입니까?”
“문제가 있나?”
가브리엘은 알 수가 없어 눈썹을 치켜올렸고, 그 잘생겼으면서도 살벌한 모습에 점원은 심장마비에 걸릴 뻔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모습으로 뻐꾸기처럼 외쳤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맡겨주셔서 무한한 영광이었습니다! 주문하신 옷들은 안전하게 주소로 배달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가게에서 나온 가브리엘은 점원이 ‘빅뉴스, 빅뉴스! 전쟁 영웅이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알아?’ 따위를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주군, 생전 안 하시던 사치를 하시고. 정말 봄바람의 위세가 대단하긴 한 것 같습니다?”
“시끄러워. 디안, 넌 왜 그렇게 말이 많은 거지?”
“주군의 유별난 모습을 언제 또 볼 수 있겠어요? 그리고 영애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그렇게 화도 내지 않으시잖습니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요.”
느물거리는 어조로 놀리는 디안을 평상시라면 연무장에서 패주었겠지만, 사실이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가브리엘은 한껏 치장한 이 상태 그대로 빨리 힐데아를 만나러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뺨에 자꾸 열이 올랐다.
“바로 옆에 자리 잡으려 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디안이 삼킨 말이 뭔지 알았다.
그렇게까지 노력했는데, 한 번도 힐데아 영애를 못 만나실 줄도 몰랐고요.
그따위 말을 하려 했던 것이겠지.
가브리엘도 승전 후 돌아오면서 고민이 많았다. 멀어져 있던 기간이 12년이다. 만났던 순간보다 떨어져 있던 기간이 훨씬 길었다.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또 무엇을 말씀입니까?”
“상대에게 호감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되는 건가.”
그것이 문제였다.
대뜸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런 고백을 하면 그렇게 저를 보면 불편한 기색을 가득 비쳤던 힐데아가 네, 그러겠습니다, 하고 수긍을 할까?
“음……. 일단은 그렇지요? 워낙 마주친 적이 없다보니, 친해지는 것이 우선이겠습니다만. 힐데아 영애는 워낙 조용하신 분이라, 접근하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조용한.”
“네, 조용한. 친구도 딱히 없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도 없고, 사용인들과도 거리가 있어 보이고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가브리엘은 떠나기 전에 봤었던 힐데아를 떠올렸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힐데아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었는데.
“나름 조사했는데 나오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면 역시 로제리엘 영애겠지요.”
가브리엘은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한 한 여인의 이름에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가 여러 가지 알아본 결과, 힐링턴의 빈 저택에 머무르자 결심한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머물 방법이 없었다.
시어스 폰 힐링턴 공작은 고집불통이었고, 딸바보였다.
갑자기 보낸 그의 청을 단칼에 묵살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그것을 위해 로제리엘에게 보석을 상납했다.
지난 12년 동안 내내 편지와 함께 보석을 한가득 상납했었던 것처럼.
그래, 그건 선물이 아니라 상납이었다…….
“로제리엘이 부럽다고 하면, 믿겠나?”
디안은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로제 영애는 힐데아 영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강아지처럼 굴더군요.”
정말 부러웠다. 깔깔 웃으면서 힐데아에게 편하게 말을 걸 수 있는 로제리엘이.
편히 말을 걸고, 손을 잡고, 애정을 담아 이름을 부르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들.’
만나는 것이 당연한 사이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약속하지 않아도 응당 곁에 상대가 있는 관계라는 것은, 정말 어떤 기분일까.
‘힐데아.’
곱고 흰 그 손을 잡고 정중하게 자신을 보게 하고 싶었다.
분명 그 고요한 눈동자를 보면 또 망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한심한 상태가 되고야 말겠지만.
‘그래도 행복하겠지.’
그 손을 잡고, 정중히 손등에 입맞춤할 수 있다면.
“말해 봐라, 디안.”
“네? 무엇을 말씀입니까?”
“사랑하게 하는 법.”
“그, 그으걸 제가 알면 여태까지 결혼도 안 하고 주군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겠습니까…….”
“쓸모가 없군.”
“아, 주군! 제가 고민 다 들어드렸었는데 어찌 이렇게 야박한 말씀을 하세요?”
가브리엘은 부채를 살랑이며 지나가는 거리의 여인들을 보았다.
일관적인 유행에 따라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이는 특색 없는 여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치장을 한 모습이었다.
“연애 책도 읽어봤다.”
“푸흡!”
디안은 침을 삼키다 사례가 들려 그대로 계속 기침을 했다.
“나, 나름 공부를 하셨군요?”
“너 지금 비웃나?”
“아,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크, 크흡!”
그러든가 말든가 가브리엘은 성큼성큼 걸으며 생각을 계속했다.
연애 책에 적힌 것들은 단순했다.
값비싼 보석, 드레스, 상대를 위한 선물, 고급 향수, 우아한 곳에서의 데이트 초대,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들이 담겨 있는 편지.
모두 그가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편지였다.
그 편지.
‘엉망진창이었을지도.’
가브리엘은 머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편지의 한 줄 쓰는 것도 어려웠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살육의 신도 아니고, 가브리엘도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꽤 고난을 겪었다.
더군다나 아주 어린 공작이 상관으로 왔으니 무시하는 것들까지 있던 터였다.
물론 그런 것들은 뼈저린 맛을 보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피곤한 와중에도 가브리엘은 편지에 들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힐데아는 어떻다고 하지?’
‘저, 주군. 그것이…….’
그러다 힐데아가 편지를 받으면 바로 읽지도 않고, 서랍에 넣어버린다는 것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좌절했다.
내 편지는 바로 볼 가치가 없나?
그래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희망을 가지며, 하나씩 마음을 최대한 담아 물어보았다.
힐데아가 궁금했다.
행복한지. 괴로운 일은 없는지. 못살게 구는 사람은 없는지. 지금 마음은 어떠한지.
그때였다.
“저, 바쁘지 않으시면…….”
“혹시 이름을 알 수 있을…….”
“흑, 아무래도 당신이 제 운명…….”
빠르게 걸어가는 와중에 자꾸 말을 걸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브리엘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비켜.”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완벽한 상태로 힐데아 앞에 서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막는 인간들이 많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구겨질까 봐 마차도 타지 않은 상태였다.
신경질 가득한 얼굴로 당장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미남에 질린 사람들이 다가온 것처럼 빠르게 흩어졌다.
지켜보던 디안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이 모습을 힐데아 영애가 보시면 기겁하며 도망가실지도.”
“힐데아에게 보일 일 없다.”
“……그래도 주군이 여지껏 열심히 노력하신 보람이 있는 것 같은데요.”
디안의 어설픈 웃음과 내뱉어진 말에, 바쁘게 걸어가던 가브리엘이 제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디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디안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남자가 봐도 반할만큼 멋진 얼굴이긴 했지만, 저 미친 주군이 웃다니! 웃다니! 꿈에 나올까 무서워!
“역시 네가 봐도 그런가?”
“…….”
“그래. 오늘은 다르지.”
드디어 도착한 힐링턴 저택을 바라보며, 가브리엘은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턱을 치켜올렸다.
“오늘 드디어, 힐데아가 내 방문을 허락했으니까.”
*
도대체 무슨 일일까.
난 지금 심각한 고민과 후회에 빠져 있었다. 지난 며칠간, 꾸준히 보내온 누군가의 요청에 결국 오늘 허락을 하고야 말았다.
다름이 아닌.
‘가브리엘.’
가브리엘이 자신과의 만남을 원했다.
그와 마주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편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그를 단둘이 만나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것도 한두 번 거절이지…….
‘아가씨, 이렇게 계속 거절 답변을 보내도 괜찮을까요?’
‘리라. 난, 가브리엘을 만나 할 이야기가 없는데.’
‘하지만 같은 저택 안에 계시다보니, 나중에 마주치면 불편한 사이가 되지 않으실까요?’
‘…….’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어놓고 왜 서신을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