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천사가 떨어졌다
“만나자고 허락 받는 것도 웃기잖아.”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몰래카메라 이런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면 왜 이러는 건데.’
저택을 아빠한테 양도받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로제를 위해 언제든 힐링턴을 방문할 수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가브리엘은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것도 꼭 내게 방문하고 싶을 때만.
로제는 아무렇지 않게 만났다고 하던데, 이게 날 놀리는 게 아니고 뭐란 말이야?
‘나도 힐링턴인데.’
그의 속마음이 뭔지는 모르지만, 가브리엘을 떠올리면, 그가 보낸 편지를 떠올리면 이상하게 등허리가 딱딱해지고 평소보다 심장이 조이는 듯 불안하게 뛰었다.
이게 다 말에 치일 뻔한 날 그가 구해줬을 때부터 생긴 일이었다.
아니. 아니다.
난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알고 있다. 그 순간이 아니라, 편지를 주고받던 어느 순간부터…….
‘아니야. 그건 가상의 인물을 상상하며 친밀감을 가진 것 때문에 일어난 후유증이라고!’
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나가자. 이게 다 집에만 있어서 그런 거야.”
오늘치 운동을 못했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 한참 남아 있었으니, 답답한 속이라도 해소하려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에.
가브리엘에 관한 것은 그 다음에 고민해볼 생각이었다.
*
“……이 나무였지.”
높다란 나무 앞에 서서 고개를 올렸다.
아무도 없기 때문인지, 입꼬리에 힘이 풀리며 웃음 비슷한 것이 새어 나왔다.
그때 내가 가브리엘을 깔아 죽일 뻔했었는데. 바로 여기서.
그다지 아름답진 않은 추억이었지만, 그 소년은 물었었다. 내가 괜찮은지를, 다치지 않았는지를.
아마 가브리엘에게서 처음 목격한 친절이었을 것이다.
난 나무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너도 많이 자랐구나.”
틈날 때마다 정원에 들러 이능을 뿌리며 실험해왔기 때문인지, 나무는 이전보다도 훨씬 더 크고 울창하게 뻗어 있었다.
“……오랜만에 올라가 볼까?”
갑자기 충동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도 과거의 내가 아니었다. 지금 올라간다면 예전처럼 실수하며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왠지 오기도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거 아는데.”
이 위에 올라가는 것이 무엇이라고, 저 나무 위에 올라가면 다 괜찮을 것 같았다.
“여기에만 올라가면, 앞으로 모든 일들이 다 잘될 것 같아.”
나는 주변을 살폈다.
마침 외부의 일정이 있어 저택 안에는 소수의 인원 외에는 인력이 빠져나간 상태였고, 아빠나 로제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가브리엘의 방문 요청을 더 이상하게 여긴 것이지만.’
어쨌든 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침 움직이기 간편한 실내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걷어 올리면 나름 움직일 수 있을 만했다.
“해보자.”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나무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뒤 일어날 일을 알았다면, 그러지 말걸.
*
“와, 여전히 멋있다.”
나무 위는 지독하게 시원했다. 맨발로 올라가 보는 풍경은 위대한 탐험가가 된 기분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아주 한순간, 예전 생각이 났다.
전생. 막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 그때도 이렇게 높은 곳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윽!”
갑자기 알 수 없는 날카로운 두통이 관자놀이를 때리는 것 같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머, 머리가.”
뭐지? 미간을 찌푸리고 흐릿한 기억을 떠올리려 한 순간이었다.
파삭, 하는 소리가 발 아래에서 들렸다. 설상가상, 그 순간 강한 바람이 불었고 몸의 균형을 잃었다. 몸이 훅 넘어갔다.
“앗!”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꺄아악!”
어느새 난 추락하고 있었다.
아득한 느낌. 멀어지는 하늘과 나무를 바라보며, 한순간 생각했다.
‘또……야?’
이번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때처럼 날 받아줬던 소년도 없는데.
난 눈을 질끈 감았다.
*
부끄러웠다. 의기양양하게 디안까지 떨구어 내고 들어왔는데.
‘시간을 잘못 봤군.’
너무 급히 서둘렀던 탓에, 시간을 잘못 보고 너무 이르게 도착했다는 것을 안 것은 왜 벌써 오셨어요? 라고 멀뚱하게 묻는 힐링턴의 한 시녀 덕분이었다.
약속 시간에 너무 맞지 않게 도착하는 것도 예절이 아니었다.
시녀 역시 바라보는 시선이 그래서인가 뾰족했다.
불손한 눈초리긴 했지만, 가브리엘은 힐데아와 관련된 일만 있으면 허술해지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물론 티는 전혀 나지 않았지만.
“……다시 오지.”
“어, 네? 각하?”
일단, 돌아갔다가 제시간에 다시 오자.
시무룩하게 그리 생각하며 힐데아의 시녀들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도록 정원 쪽 길로 몰래 빠져나오는 때였다.
“아.”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가브리엘은 걸음을 멈추며 그 앞에 섰다. 익숙한 풍경에 잠시 상념에 젖었다.
“저 나무였지.”
바로 여기에서 하늘에서 무언가가 내려와 그를 덮쳤다. 그때는 가브리엘도 깜짝 놀랐었다.
‘꺄아악!’
‘……주군!’
그때는 아득한 고통과 함께 순간 의식이 까맣게 단절되었었던 것만 기억난다.
정신을 차렸을 때, 저를 굳은 채 바라보고 있던 여자아이도.
얌전하고 상냥한 아이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무도 탈 줄 알 줄이야. 물론 떨어졌지만.
‘미…….’
차갑고 냉정한 무표정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여자애가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기색을 읽었다.
미안해요, 그렇게 말하려던 것 같았다.
가브리엘 또한 화가 나기는커녕, 창백히 굳은 얼굴의 어린 힐데아를 보자마자 심장이 철렁했다.
혹시라도 저 가녀린 아이가 어디 다친 건가 하여서.
그래서 스스로의 고통도 상관없이 힐데아의 안부부터 물었었다. 나는 괜찮으니,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그때의 나무가…….”
가브리엘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나무가?”
뭔가 이상했다.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나무가 지나치게 울창한 것 같았다.
이럴 수가 있나? 꼭 식물 관련 이능을 받은 것처럼…….
하지만 식물 이능은 무척 드물지 않은가. 그런 드문 이능을 지닌 인재가 정원사나 하고 있을 리도 없고.
의심과 의구심이 떠오른 바로 그 순간이었다.
“꺄아악!”
그가 바라보고 있던 나무의 위쪽에서, 천사가 떨어져 내렸다.
그의 품을 향해.
*
익숙해. 지나치게 익숙해.
‘수, 수치사.’
예전 이 나무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떨어져 죽을 뻔했을 때, 그때와 지나치게 닮은 상황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흐, 흐으…….”
난 눈도 뜨지 못하고 날 받은 무언가에 기댄 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분명 이건, 사람의, 사람의 체온이다.
‘하지만…….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같지만 다른 것도 있었다.
과거와는 달리 온몸에 찡한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고, 어떤 어린 소년이 내게 깔려 넘어진 상태도 아니었다.
난 허공에 떠 있었고,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안겨 있었다.
“…….”
“…….”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의 바위처럼 단단하게 단련된 팔에 안긴 상태라는 것을 확인했다.
누, 누구?
시선을 올리는 순간, 상대와 눈이 마주쳤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놀란 듯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있는 남자. 살짝 헝클어진 백금발이 무척이나 예쁜…….
가브리엘. ……가브리엘?
‘헉.’
왜 하필.
왜 하필 이 남자야?
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마도, 내 이름인 것 같았다.
“…….”
“…….”
얼마나 지났을지 모를 침묵이 흘렀다. 몇 초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이하게 한 시간도 넘는 시간동안 그렇게 있은 것 같았다.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터질 것 같았다. 왜, 왜 이러지?
팔과 닿아 있는 등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욱신거리는 것도 같았다.
단단한 팔이 주는 안정감과 온기에 이상하게도 코끝이 찡한 것도 같았다.
꼭 울고 싶은 것처럼.
‘내가 너무 놀랐나 봐.’
그래서 그런 것이다.
‘심장 소리가 들리면 어떡하지?’
나도 모르게 그의 가슴팍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놓았다.
시선이 다시 한번 얽혔다. 옷에 주름진 자국이 선명해 미안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쩐지 가브리엘의 시선이 잘근거리며 씹고 있는 내 입술에 닿은 것 같았다.
‘근데 왜 날 안 내려놓지?’
“힐.”
기이한 긴장감은 그가 입을 열면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이 뚝 끊어지는 것처럼.
“힐, 데아.”
갈라진 목소리가 꼭 무언가를 참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무거워서 그런 것인가 싶었다.
얼른 내려가려고 했는데 어쩐지 팔이 미동도 없었다.
“저, 내려…….”
그렇게 말하려고 했을 때, 그가 참았던 것처럼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실내 드레스라고 하지만, 드레스를 입고 나무에 오르는 건 무척 위험할 것 같습니다.”
“어, 그, 그건.”
어쩐지 평상시 로제가 들어야 할 말을 들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당황했다. 나무 타는 건 몇 년 전에 그만뒀거든요!
“그게, 평소에는.”
“힐.”
그런데 그렇게 말해도 믿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런 모습을 두 번이나 봤는데 믿어달라고 하면 그게 거짓말이지.
“제가 이곳을 지나지 않았다면.”
확실히 아찔한 일이었다.
“정말 큰일이 났을 겁니다.”
“그게…….”
“크게 다쳤을 거예요. 당신이 다치면, 전…….”
무척 낮고, 갈라진 그의 목소리가 꼭 무척 놀랐다는 것처럼 들려서 민망했다.
멋쩍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귓가를 문질렀다. 화가 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당황하면 굳어지는 평소 습관대로 얼굴 근육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고맙고, 미안하고, 둘 다인데.
“질책하려는 것이…….”
“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는데, 다시 한번 시선이 입술에 닿았다.
“아닙니다.”
난 깜짝 놀랐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아까보다도 한껏 낮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지. 괜히 눈치를 보고 있는데 그가 작은 한숨과 함께 나를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내려놨다.
깃털이라도 손에서 내려 보내는 것처럼 무척이나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 손을 떨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