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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31화 (31/155)

31화. 감정은 참을 수 없는 것

하지만 곧 나는 내 생각을 비웃었다.

‘저 사람이 손을 떨 리가 없지.’

상대가 누구인가.

온갖 일을 다 겪고 돌아온 의지의 남자주인공, 바로 가브리엘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하지 않을 사람이 나무에서 떨어진 여자 때문에 손을 떤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망상이지.

‘내 행동을 어리석다고 생각했으면 몰라도.’

예전에도 그렇고 성년이 된 지금도 나무 위에 올라 위험한 짓을 하는 사람이란 인식이 박혔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새삼스러울 정도로 속상한 기분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한순간의 충동이었을 뿐인데.’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은 기분을 꾹꾹 눌러 삼켰다.

대체 가브리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라고.

“발을 조심하십시오.”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그제야 풀렸다.

어쨌든 난 그제야 제대로 땅을 디디고 섰고, 내게서 멀어지는 그의 커다란 손을 의미 없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손가락이 참 가지런하네.’

닿는 느낌은 단련되어 단단하고 거친 느낌이었는데, 보는 것은 길쭉하고 섬세하게 생겨 예쁜 손이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의 손을 따라, 팔을 따라, 넓은 어깨를 따라, 마침내 얼굴에 안착했을 때.

‘!’

난 가브리엘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와락 구겼다. 너무 깜짝 놀라서.

‘뭐, 뭐야.’

지금 저 사람, 빛이 난 것 같은데?

‘오늘따라 왜 저렇게 잘생겼어?’

가브리엘은 원래도 잘생긴 사람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번쩍번쩍한 느낌이었다.

원래는 모처럼 단정했을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져 있었으나, 그 모습이 오히려 아찔함을 선사해주었다.

또한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는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심장을 술렁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의복이.

‘누가 보면 연회장이라도 가는 줄 알겠네.’

얼마나 잘 차려입었는지, 오늘 가브리엘의 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말 예뻤다.

‘누굴 홀리려고.’

옷걸이가 좋으면 넝마를 걸쳐도 예쁜 법인데, 의복이 공작새라도 되는 것처럼 화려해서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깨달았다.

나와 만나겠다고 저리 차려입었을 리는 없으니, 어딘가를 다녀온 모양이었다.

가브리엘이 신경 써서 다녀올 만한 곳이라면 별로 없다.

로제를 만난 것이 아니라면.

‘아, 황궁에 다녀온 거구나. 그럼 황제 폐하겠네. 근데 저 사람 지금 어딜 저렇게 보는 것……. 아!’

그의 눈을 바라보다 아차 싶었다. 가브리엘의 시선이 물끄러미 내 발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차가운 흙이 느껴지는 발을 확 오므라뜨렸다.

‘아, 나 신발 벗었었지.’

수치심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고, 입술을 마구 깨물었다.

나무에 오르겠다고 신발까지 집어 던진 몇 분 전의 열정이 무척 야속했다.

다, 다 봤겠지?

눈만 살짝 굴리며 치마로 가려보려고도 했지만, 실내 드레스는 발을 덮을 정도로 길이가 길지 못했다.

난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말을 돌리기로 했다.

일단 이 만남은 여기서 끝내고 우아하고 평범한 상태로 약속 시간에 만나는 것이 현명했다.

왜 만나려고 하는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맨발로 용건을 듣고 싶진 않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벨키우스 공작님. 저 때문에 또 다치실 뻔하셨어요.”

“괜찮습니다. 깃털처럼 가벼웠으니까.”

“하지만 감사…… 네?”

나는 혼자 있었다면 눈을 미친 듯이 깜빡이며 들은 말을 곰곰이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방금 이상한 말이 들린 듯하여.”

자신이 무슨 틀린 말을 했냐는 듯 바라보는 시선이 진지해서, 오히려 내가 내 청력을 의심하며 떨떠름해졌다.

잘못 들은 거겠지?

“그런데, 힐데아 영애.”

하지만 그는 오늘 작정하고 날 괴롭히려는 것처럼, 한순간도 안심하게 놔두질 않았다.

“발에 상처가 난 것 같은데.”

“아.”

다시 화르륵 얼굴이 붉어졌다.

미엘르 제국에서 맨발을 연인이나 부부 사이가 아닌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그다지 옳지 못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가리고 싶은 것을 참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 괜찮습…….”

“영애께서 괜찮다면.”

그런데 가브리엘은 이번엔 내 영혼을 후려치는 말을 했다. “제가 살펴봐도 될까요?”라고.

난 눈을 크게 부릅떴다.

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

그녀가 그의 품으로 떨어졌을 때.

힐데아에게 깃털 같았다고 한 말은 입에 발린 말이 절대 아니었다.

과거와 달리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받아낼 수 있는 현실에 안도하면서도, 가볍기만 한 몸을 품 안에 가득 끌어안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으니까.

‘아.’

어딘가에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아마도 스치듯 코끝에 닿았던 힐데아의 머리카락이었던 것 같았다.

‘너무 가볍고.’

덜컥 겁도 났다.

‘약해서.’

진정 너무 가볍고 연약하다.

‘겁이 나.’

힘을 바짝 주면 쩍하고 갈라질 유리처럼 보여, 내려놓는 손길마다 손끝이 바보처럼 덜덜 떨렸다.

바닥을 디디던 힐데아가 저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가 놓았을 때는 벼랑 끝에서 떨어진 것 같은 아찔함 속에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행복하지?’

너무 행복하면 사람이 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것도 깨달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제 속도를 벗어난 것처럼 날뛰고 있었으니까.

디안이 곁에 있었다면 그 얄미운 태도를 고수하며 놀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멍청한 생각 속에 허우적거리느라, 미친 입이 고삐가 풀려 바보 같은 말을 풀어놓는 것을 몰랐던 것이.

그 하얀 발에 난 생채기를 발견했을 때 말이 불쑥 튀어 나갔다.

“제가 살펴봐도 될까요?”

내뱉고 스스로 경악했다.

이 미친 주둥이가.

미친 소리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네?”

황당하다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마 힐데아의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귀족 영애의 맨발을 보고 있는 것도 기함할 무례인데, 그 발을 살피겠다고까지 하였으니.

예쁘게 입고 와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이미 망했다. 식은땀이 맺혔다.

당장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반, 이미 내질러 버린 말을 수습이라도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반.

제법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아뇨, 괜찮아요. 공작님. 시, 신발이 있어서요.”

말을 꺼낸 것은 힐데아였다.

“하지만 상처가 있다면 아프실 겁니다.”

“괜찮아요. 거리가 멀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발을 살피는 것은…… 바,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녀도 퍽 당황한 눈치였는지,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그것조차 귀여워서 이가 악물렸다.

‘나도 중증이군.’

당장 힐데아가 그를 밀치고 도망가지 않았으니, 그도 용기를 내기로 했다.

게다가 긴장이라도 한 듯 꼬물거리고 있는 힐데아의 발가락을 보고 말았다.

숙녀의 맨발을 보는 것이 예의상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염치없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터질 것 같았던 긴장이 사르르 풀렸다. 입꼬리가 비식거렸다.

더는 참을 수 없어 고개를 올려 힐데아의 눈을 마주봤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역시 귀여워.’

차갑게 바라보던 평소와 달리 살짝 무너진 듯한 힐데아의 얼굴에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분명 감정이 보였다.

그를 향한 당황, 당혹, 놀라움.

평상시처럼 싫어하는 티도 내지 못할 만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역시.

그 모든 것이 그의 마음을 혼란하게 했다. 12년간 기다려왔던 기다림은 지금 이 순간만 못했다.

못 보는 동안 더 미화된 것 아니냐며, 어쩌면 직접 보면 달라질지 모른다고 했었던 디안의 말은 개소리였다.

그는 지금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힐데아가 눈앞에 살아 숨 쉬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걷기 힘드시다면 제가 안아서 움직이겠습니다. 부디 그런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벨키우스 공작님. 그러시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걷지 못할 상처가 아니에요. 과한 것은 모자라는 것보다 못한 것이라 생각…….”

“걱정이.”

“……네?”

걱정이 됩니다.

작게 속삭인 말이 힐데아에게 닿았을까? 그랬기에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

곧 그녀의 얼굴은 익숙한 차가운 무표정으로 그 감정조차 금방 덮여 버렸다.

‘내게 항상 보이는 표정이지.’

곧 가브리엘은 목이 마른 사람이 우물을 앞에 둔 것처럼 끔찍한 갈증을 느꼈다.

‘더 보고 싶어.’

한 문장, 한 문장 전해지던 그 잔잔한 편지의 내용들처럼.

‘더, 나를 향한 감정을 보고 싶다.’

12년 동안 가까워졌다고 여긴 것이 온전히 자신만의 착각인가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의 눈이 열망으로 타오를 찰나, 그녀와 대화하고 있는 꿈같은 상황에 설렌 몸뚱이가 또다시 사고를 쳤다.

“가브리엘.”

“네?”

“왜 아직도 공작님입니까.”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도 좋았다. 가브리엘은 눈에 힘을 풀고 배시시 웃어버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용기를 냈다.

“가브리엘이라고 했습니다.”

부드럽게 손을 잡고 힐데아를 이끌 듯 잡은 손을 미약하게 흔들었다.

“부디.”

꼭 저 가판대에서 사는 사탕을 사달라 부모에게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청하고 싶은 것은 사실 애칭이었으나.

“이름을 불러도 될 사이이지 않습니까, 영애. 무릇 청했었듯, 편하게 가브리엘이면 됩니다.”

“그건.”

“오히려 자꾸 거절하시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허락하신다면 저도 같은 방식으로.”

짐짓 점잖은 척 마음을 숨겼다.

“……하지만 공작님.”

“저도, 힐데아. 그렇게.”

힐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허락받지 않은 애칭을 몇 번 은근히 불렀지만, 그런 적 없다는 듯 앙큼을 떨었다.

힐데아의 속눈썹이 치열한 고뇌라도 하듯 파르르 떨렸다.

“마주칠 때마다 그러시면, 편히 부르실 때까지 언급할 수밖에요.”

용기 내어 짓궂게 말하니 힐데아가 질색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그건 좀.”

“……그러니 편하게 불러주시면 됩니다.”

“설마 그게 만남을 청하신 이유는 아니겠지요?”

그러다 뽀얗게 빛나는 힐데아의 이마를 보았고, 아찔해졌다. 이마도 동그랗고 귀여웠다.

그 시선을 느꼈던 것인지 힐데아는 콧잔등을 살짝 찌푸린 뒤 시선을 피했다.

연결되었던 끈이 끊어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가브리엘은 손끝을 떨었다.

아, 제발.

눈빛 하나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제발 그렇게 보지 말아주십시오, 힐데아.

그는 결국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어머, 아가씨! 왜 여기에 계셔요?”

돌아오지 않는 아가씨가 걱정돼 찾으러 나온 시녀가 어색하게 함께 있는 그들을 발견할 때까지.

“그럼 저녁 식사 자리에서 뵈어요. ……가브리엘.”

그 자연스러운 부름에 그녀의 머리카락만 멀거니 보았다.

만남을 청한 이유도, 용건도 설명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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