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적의는 모르는 곳에서 싹튼다.
“이제 곧 소문 속의 귀신 공작을 볼 수 있게 되겠군요?”
“뿐인가요. 그 힐링턴의 쌍둥이도 얼굴을 보게 되겠네요.”
부채를 살랑이며 은밀히 이야기하며 웃던 영애들이 은근히 이 모임의 주최자 안색을 살폈다.
귀신 공작.
패배를 모르는 강렬한 축언의 소유자.
모두가 탐내고 있는 사교계의 보물.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
그 사내와 황궁에서 마주친 황녀 라피이아가 꽤 큰 모욕을 당했다는 소문은 이미 알음알음 퍼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 모임의 주최자가 바로 황녀 라피이아였다.
“전하. 어찌 생각하셔요? 데뷔탕트의 꽃은 첫 춤, 그리고 파트너가 아닐는지요?”
짐짓 너그러운 얼굴을 한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황녀의 입술로 향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살피겠다는 듯이.
“그래요.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군요. 첫 춤을 누구와 추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지니.”
까르르 웃은 여인들이 눈치를 살피다 아부를 떨 듯 황녀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전하께서는 누굴 파트너로 들이실 것인지요? 소녀들의 관심은 모두 그곳에 쏠렸답니다.”
“가장 고귀하신 분이니 상대는 역시 황제 폐하이실까요? 아니면…….”
“혹 저희가 생각하는 그분이실까요?”
황녀의 웃음이 잠시 멈췄다.
“그분?”
긴장이 주변 영애들 사이를 감돌았다.
그녀들은 아직 황녀가 원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일전에 벨키우스 공작에게 받은 모욕에 따라 귀신 공작을 욕해야 하는지.
아니면 고귀한 황녀가 흥미를 보이고 있는 사내를 칭송해야 하는지.
전자라면 힐링턴과 싸잡아 욕을 하면 될 것이고, 후자라면 힐링턴은 공격하되 황녀와 벨키우스 공작이 둘만 얽힐 수 있는 일을 만들면 된다.
“글쎄…….”
라피이아의 눈이 재밌다는 듯 가늘어졌다.
“미엘르 제국의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될 사내와 가장 고귀한 여인의 첫 춤이라면 얼마나 근사하겠습니까, 전하.”
은근 떠보는 말에 황녀의 눈이 퍽 재밌다는 듯이 휘어졌다.
“그런가. 그가 그리 값진 사내인가? 그대들이 말해봐요.”
그러나 그것은 마냥 즐거운 기색은 아니라 말을 꺼낸 이들은 어깨를 움츠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 값진 사내가 황녀를 모욕했지 않은가.
탁, 탁.
황녀의 길게 다듬어진 손톱 끝이 테이블을 한참 두드렸다.
“뭐, 그대들의 마음을 내 모를까.”
이윽고 감정을 억누른 듯 황녀의 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장 값진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내게 잘 어울리는 것 같긴 하군요, 그게 보석이든 물건이든, 그리고…… 사람이든.”
영애들은 반색했다.
“그럼요, 전하!”
“그대들도 그리 생각하나요?”
“당연한 일이지요! 누구든 제 품에 가진 가장 귀한 것도 전하를 보면 진상해야 하는 것을요.”
황녀가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에게 관심이 있다.
그것은 곧 황궁이 벨키우스 공작을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여인들은 머리를 굴렸다. 가문에 전달해야 하는 정보와 그리고 앞으로의 노선을 위해.
그렇다면 여기서 치워야 할 것은 오로지 단 하나가 남았다. 힐링턴.
그러나 그 고결한 힐링턴을 어떻게 상처입혀야 가장 효과적일까?
악의적인 눈을 빛내며 영애들은 머리를 굴리고 입을 놀렸다.
“들으신 분 계신가요? 그 쌍둥이에게 흠결이 있다는 말이 있답니다.”
한 영애가 입을 열자, 다른 영애가 얼른 따라 말을 붙였다.
“어머, 뿐인가요? 얼마나 염치없고 수치도 모르는지 공작을 유혹해 수도 저택에서 함께 머물게 하였다지 뭐예요!”
“오, 맙소사. 그게 정말인가요?”
“정말이랍니다. 벨키우스 공작의 옷을 그쪽 주소로 배달했다는 것을 확인했는걸요. 후우, 정말 체면이고 품위고 없는 행동이 아니겠어요?”
그들은 벨키우스 공작이 자진하여 머물렀다는 것은 고려하지도 않았다.
본래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소문은 더욱 부풀려지는 법.
은밀히 주변을 살피던 한 영애가 부채를 살랑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앞으로 이야기할 것이 너무 예민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 쌍둥이 중 첫째의 축언과 이능이 불길하다는 소문은 너무 유명하답니다.”
일제히 숨을 죽였다.
황녀의 눈도 한층 가늘어졌다.
축언과 이능.
그것은 현 황가에 있어서 가시나 바늘과 같은 것이었다.
본래 가장 고귀하고 유능해야 할 황족들. 그러나 현 황족들 중 축언과 이능을 타고난 것은 황제 디트로이아밖에 없었다.
“그대, 더 이야기해봐요.”
황녀의 눈에 즐거움이 서렸다. 지목받은 영애의 목소리가 힘을 받고 한껏 치장하듯 부풀었다.
“오, 고귀하신 황녀 전하. 사실이랍니다. 그래서 어미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는걸요? 그런 불길한 가문과 전쟁 영웅이 어울리다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후에도 그녀들은 여러 말을 보탰다. 힐링턴을 공격할 황녀를 위한 정보들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듣고 있던 황녀 라피이아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참으로 바쁘군요, 그대들의 입은. 내 이러니 그대들과의 만남을 저어할 수가 있나.”
그 칭찬에 여인들이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이 웃음은 곧 등장할 누군가에게 날아갈 칼과 화살이 될 터였다.
“전하께 너무 충성스러운 탓이지요. 이것만 알아주시면 되어요. 전하께서 갖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그것은 바로 전하의 것이랍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저희들이 함께할 것임을.”
사교계의 정점이자 가장 고귀한 꽃인 것이 분명한 황녀 라피이아.
황제의 지극한 총애를 받는 유일한 황녀.
그런 그녀가 가브리엘 폰 벨키우스를 갖고자 한다면, 힐링턴의 쌍둥이 영애와는 불꽃 튀는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싸움과 분란을 상상하며 즐거워한 영애들은 은밀한 미소를 교환했다.
“좋군요. 오랜만에 피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야. 힐링턴이라, 부디 손쉬운 상대가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그럴 것이옵니다, 황녀 전하.”
황녀 라피이아가 구미가 당긴다는 듯 붉은 혀로 입술을 할짝였다.
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벨키우스 공작에게 받았던 모욕을 되새기는 것일까.
황녀는 웃었다.
아무리 무서운 것 없는 젊은 공작도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황녀를 무시할 수는 없을 터.
“하지만 전하. 전하께서는 직접 움직이실 필요가 없으시답니다. 모든 것은 충성스러운 이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까요.”
이를테면, 힐링턴의 쌍둥이 누구도 공작의 손을 잡고 첫 춤을 출 수 없게 만든다든지.
“후후, 이리 충성스러워서야.”
천천히, 황녀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바로 그것이 듣고 싶었던 말이라는 듯이.
*
먹음직스럽게 구워져 침이 고이는 향을 풍기는 오리 구이, 허브와 버터로 향을 낸 스테이크.
얇고 길게 썰려 한입 가득 먹으면 행복할 것 같은 훈제 연어.
갓 따낸 듯 싱싱한 바다향을 풍기는 굴찜.
유혹적으로 빛나는 포도주까지.
만찬이라고 해야 할 음식을 앞에 두고도 마음이 편하진 못했다. 나는 가까스로 포도주로 입을 축이고 속으로 한탄했다.
‘대체 왜 저렇게 보는 거야? 이게 몇 번째냐고.’
자꾸 시선이 한 번씩 마주치는 상대 때문이었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지금 벌써 14번째 마주치는 것이었다. 상대는 명확히 로제가 아닌 날 보고 있었다.
그 상대는.
‘대체 왜?’
가브리엘이었다.
신발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발끝이 오므라드는 것 같았다.
집요하기까지 한 그 시선을 이곳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눈치챌까 봐 식은땀이 등이 축축해졌다.
그래서 스테이크를 자르던 나이프에서 끼익 소리가 살짝 나 이를 악물었다.
아무도 눈치 못 챘기를 바랄 때, 옆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맞다. 언니?”
“응?”
마침 오리 구이를 큼직하게 자르고 있던 로제가 눈을 빛내며 내 쪽을 보며 말을 건 것이다.
난 눈을 끔벅거렸다.
평소처럼 사랑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왜일까. 불길한 기분이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로제, 너 아무 말도 하지 마. 응?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하지 마!
로제는 생글 웃으며 폭탄을 던졌다.
“언니, 파트너는 어떻게 할 거야?”
파트너.
쿨럭, 하고 목으로 넘어가던 고기가 걸리는 화제였다.
살벌한 기색으로 눈빛을 주고받으면서도 정치적인 이야기가 오가던 아빠와 가브리엘의 시선이 일제히 내 쪽으로 돌아온 것도 그 순간이었다.
“파트너라 하시면.”
가브리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난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왜. 뭐. 내 파트너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이번에는 아빠가 턱을 쓰다듬으며 낭패라는 듯 신음을 흘렸다.
“그렇구나. 파트너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었군. 힐데아, 염두에 둔 사람이 있느냐?”
난 좀 억울해졌다. 명백히 이곳의 화제가 내 파트너 문제로 쏠렸기 때문이다. 바로 누구누구 때문에.
로제, 너 지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난 냅킨으로 입을 톡톡 두드린 뒤 침착한 목소리로 응대하려 노력했다. 제발 목소리에 당황이 서리지 않았기를.
“아버지,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요. 당장 준비할 것도 많은데요. 식사 자리에서 급히 이야기할 만한 화제는 아니라고 생각…….”
“아니지, 힐!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첫 춤이 걸려 있는데 중요하지 않다니? 그 무엇보다 중요하지. 무심한 아비의 탓이다.”
“아니 그게…….”
이게 아닌데.
“파트너는 곧 체면의 문제이기도 한 것을. 이 아비가 많이 모자라구나…….”
가뜩이나 바로 며칠 전부터 가브리엘이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된 저녁 식사 때문에 매번 체할 것 같은 기분인데.
“게다가 그리도 춤 연습을 열심히 하지 않았더냐. 여차하면 흠흠, 이 아비가, 흠흠, 춤을 좀.”
나는 잠시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아빠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시는지 알 수가 없어서.
게다가 아빠가 뒷말을 웅얼거려서 잘 들리지 않았다.
“크흠, 흠!”
주먹으로 입을 막고 있었는 데다가 아빠가 말을 할 때마다 우연인지 가브리엘이 얕게 기침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지만 내 부름은 무참히 씹혔다.
아빠는 살벌한 눈으로 가브리엘을 노려봤고, 가브리엘도 만만치 않게 응수했다.
“자네는 왜 내가 말을 할 때마다 기침을 하는 것이지? 건강이 안 좋으면 의원에게 찾아가야지, 왜 엉덩이 무겁게 여기서 식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만. 음식물을 삼키고 말씀을 하셔야지, 그리 웅얼웅얼하니 상대가 듣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치사하게 나오는 게 지금 누군데요. 자식에게 너무 집착하는 부모는 좋지 않습니다.”
“집요한 어떤 놈도 마찬가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