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자매의 파트너는 누구?
어째서인지 아빠와 가브리엘은 서로를 노려보며 말을 주고받았는데, 그 기세가 제법 살벌했다.
나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정하긴 했어야 했지만.’
첫 춤. 그리고 파트너.
중요한 문제이긴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단순했다.
‘신중하게 정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야.’
벨키우스와 힐링턴 두 가문의 혼담이 오가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첫째 아가씨의 다른 상대까지 입에 오르내릴 필요가 없었고, 딱히 눈길이 가는 상대도 없었다.
로제는 당연히 가브리엘과 파트너를 할 테니, 나는 내가 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적당히 고르려 했는데.’
가문의 기사 중 한 명에게 요청하거나 아니면 요즘 자주 날아오고 있는 다수의 영식들 초대장 중 하나를 고를 생각이었다.
그도 안 된다면, 정말 최후의 최후에는 아빠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분명 좋게 생각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 부탁만큼은 하지 말아야겠다.’
가브리엘과 노려보는 딱딱한 아빠의 얼굴을 보니 그런 생각들이 목구멍 너머로 쑥 들어갔다. 말도 꺼내지 말아야지.
그리고 원래 생각과는 다른 말을 꺼냈다.
“저, 아버지.”
“그래. 힐. 말하거라.”
날 우려하는 아빠와 혼자 선택받게 되어 걱정하게 될 로제.
그리고 자매를 두고 난감할 가브리엘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말씀대로 파트너는 아직 고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후보는 꽤 있어요.”
사실 후보라 할 것도 없었지만.
“뭐?”
그런데 왜 저리 놀라시지.
난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깨달았다. 아무래도 아빠는 내 태도가 걱정스러운 듯했다.
최대한 신뢰를 주겠다는 듯, 나는 턱을 당기며 차분하게 말했다.
“여태까지 받았던 초대장들도 있으니, 청하는 편지를 쓰면 분명 흔쾌히 수락할 상대가 있을 거예요.”
“초대장?”
“네. 그러니 이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채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콰직, 하고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 나는 깜짝 놀라 체면도 잊고 입을 쩍 벌릴 뻔했다.
‘분명히 들었는데……?’
어쩐지 가브리엘의 손에서 난 소리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서 난 소리인지 확인도 하기 전에,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은 아빠의 눈빛에 잊고 말았다.
“어떤, 놈이?”
“아버지? 지금, 화나셨어요?”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니, 아빠가 허공에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 내게 초대장을 보낸 영식 중에 큰 문제가 있었나?
난 얼굴을 굳혔다. 내가 그런 실수를 했다고?
“아니. 내가 어찌 너에게 화를, 그보다 싹 태워버렸는데 어떤 놈, 아니, 어디서 굴러온, 아니. 후보가 있다고 하였느냐, 힐?”
후보를 추리고 있었다는 건 얼추 알고 계셨던 일일 텐데 왜 저런 반응인지 모르겠다.
“네.”
나는 동생을 위해 여태까지 가문의 초대장들을 거르면서, 그래도 가문에 이득이 될 법한 이들의 것은 따로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훗날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혹여 주변 압박으로 인해 정략 결혼하게 된다면 제법 괜찮은 인성에 품격을 갖춘 이와 하고 싶었으니까.
‘당장은 뜻이 없지만.’
그렇게 말하며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다가 다시 한번 쿵.
시선을 얼른 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저 눈빛 뭐야.’
가브리엘. 그의 눈이 문제였다.
볼 때마다 이상하게 심장이 망가진 것처럼 요란해져서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난 어물거리듯 아빠를 향해 말을 돌렸다.
“만약 그 영식들이 거슬리신다면, 저는 딱히 파트너가 필요하지 않아요. 문제가 있다면……. 차라리 혼자 입장하는 편이 낫겠네요. 그렇게 할까요?”
말을 빠르게 이었는데 다시 한번 심장이 따끔했다.
이번엔 가브리엘이 꼭 세상 끝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까지는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살벌한 표정을 했으면서.
“혼자? 힐데아, 지금 혼자라고…… 했느냐?”
“네. 그러려고 했…….”
“네가 왜?”
아빠의 목소리가 꼭 화를 참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내 말 어디에 화낼 만한 구석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어서 관자놀이가 쿡쿡 쑤셨다.
‘하아.’
꼭 이렇게 길게 대화를 하면 엉망이 되곤 하지.
손님의 앞에서이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퍽 속상해졌다.
“하지만 아버지, 로제의 파트너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괜찮지 않은가요?
라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먼저 로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 저요! 저도 할 말 있는데!”
심각한 분위기가 쨍하고 깨지는 순간이었다.
어물어물 올라왔던 서러움과 알 수 없는 억울함에 울컥하던 내 기분 또한 물에 녹는 솜사탕처럼 사라졌다.
언제나 밝고, 햇살 같은 로제.
나는 딱딱했던 입꼬리에 힘이 풀렸다.
나뿐이 아니었다.
그 명랑하고 발랄한 태도에 아빠는 이마를 쥐면서도 헛웃음을 터뜨렸고, 시녀들은 피식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브리엘도 로제를 보고 있…….
아니, 로제가 아니라 나를 보고 있잖아?
당황하여 마주친 눈을 끊어내지도 못하고 있을 때, 발랄한 로제가 눈을 깜빡이며 우리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언니가 파트너 없이 가면 나도 혼자 들어갈래요! 언니야,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지?”
“뭐?”
“언니도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나는 왜 안 돼? 파트너 따위 번잡스럽기만 하단 말이야.”
이번에는 로제가 던진 폭탄에 내가 경악할 차례였다.
“아니, 로제! 너는 달라.”
“응? 언니, 내가 왜 달라?”
“그치만 너는…….”
너는 가브리엘이 있잖아.
너랑 내가 어떻게 같아.
약혼자가 뻔히 있는데 네가 왜 혼자 들어가.
그와 같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말간 로제의 눈을 보니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돌연 로제가 히죽 웃었다.
“그러면 그렇게 결정하는 거다? 내가 파트너랑 같이 들어가고 싶으면 언니도 파트너를 결정하기로 하고. 그게 싫으면 나도 혼자 들어가는 거야!”
이건 고집을 피우기 시작할 때의 로제였다.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제발 도와달라는 듯 아빠와 가브리엘에게 로제 좀 말리라는 듯이 쳐다봤다.
그리고 난 숨을 들이켜야 했다.
‘뭐야.’
반전의 반전이었다. 나보다 더 당혹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가브리엘은 아까보다 훨씬 흡족한 표정으로 고기를 씹고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니, 이봐요. 왜 그런 표정이야. 로제가 당신이랑 같이 안 들어간다고 하잖아…….
*
“쟤를 대체 누가 말려?”
결국 로제리엘의 설득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한번 똥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나무에 박힌 황소뿔만큼이나 빼기 힘든 로제의 성격답게 그애는 격렬하게 우겼다.
자신이 파트너와 함께 들어가고 싶으면, 나도 파트너를 제대로, 신중하게, 정식으로 결정해서 들어가자고.
‘대체 왜 내 파트너에 다들 그렇게 이상한 반응을…….’
힐링턴의 두 자매가 파트너 없이 입장한다는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만 해도 골치였다.
“일찍 사교 활동을 시작했어야 했나?”
사실 그러고자 한다면 방법은 많았다.
사교계에 데뷔하기 전에도 가문간의 친분을 앞세워 교류를 하거나, 혹은 또래 영애와 영식들이 모임을 갖는 일은 흔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누군가를 주축으로 친근한 또래들이 생겨나고 있을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원작을 통해 사교계를 주름 잡을 미래의 새싹들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있을 것을 뻔히 알았다.
그리고 문제는 내가 그 둘 중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결국 로제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사교계의 누군가가 로제를 괴롭히고 싶더라도, 결국에는 인과응보로 벌을 받거나 모두가 사랑스러운 로제를 위한 주변으로 변해갈 것이다.
그래서 굳이 사교계엔 손을 쓰지 않았고, 스스로를 돌보는 데 집중했다.
“그래도 괴롭힘은 당하게 되겠지.”
원작에는 로제만 있었지만, 현재 이곳 세상에는 나 또한 있다.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을 여주인공의 쌍둥이 자매, 힐데아 폰 힐링턴이라는 존재가.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나 또한 가브리엘의 혼약자 후보이기 때문에 공격은 분명 내 쪽에도 날아올 것이다.
‘제일 조심해야 할 상대는 황후, 황태자, 그리고 황녀겠지?’
아, 아니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잊었을까.
“황제.”
아무튼 골치 아팠다.
난 멍하니 열린 창문의 1층 테라스에 서서 입술을 매만지다가 불현듯 화들짝 놀랐다.
‘!’
그리고 밖에서 보이지 않게 몸을 숨겼다.
테라스 아래로 보이는 정원에 서 있던 누군가 때문이었다.
‘왜 여기에?’
뒷모습뿐이었지만, 밤에도 빛나는 듯한 백금발 때문에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왜 저 시간에 여기에 있는지 모를 남자, 가브리엘이었다.
내가 자신을 보고 숨었다는 것을 눈치챘을까?
밖에서 날 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거북하신 것은 압니다.”
담담하고 차갑게만 들렸던 그의 목소리가 오늘은 어쩐지 긴장한 듯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어깨에 걸친 숄을 감싸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를 마주했다.
“…….”
“…….”
못마땅한 것을 보는 듯 살짝 미간이 찌푸려진 표정, 오래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마주했다가 금세 떨어져나가는 시선, 힘을 주며 잔뜩 경직된 턱관절과 꽉 쥔 주먹까지.
내가 여태까지 마주해왔던 가브리엘이었다. 어린 시절과 전혀 변하지 않은.
어째서일까? 대체 무엇을 기대했었는지, 알 수 없는 서늘함이 가슴 속에 번져갔다.
나 또한 나를 싫어하는 이들에게 익숙히 대응하는 무표정으로 그 앞에 섰다.
웃음도 나왔다.
12년 동안 오간 편지에는 역시 아무런 뜻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 나만 오늘도 바보 같아진 셈이다.
언젠간 버려야지.
꼭, 버려야지.
그 편지가 외롭게 견디던 순간들에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버려야지.
내 것이 아니니까.
“왜 여기에 계신 거죠, 가브리엘?”
착각일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유독 찌푸려 있던 미간이 살풋 풀어진 것 같다고 느낀 것은.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빨리 대화를 끊고 자리를 뜨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너무 친밀한 거리였다.
“로제의 건물은 이곳이 아니…….”
“제가 그것을 몰랐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일부러 조롱하시는 겁니까.”
“네? 조롱이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러나 물을 수 없었다.
난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굳었다.
“오늘 낮에 영애께 끈덕지게 청했던 이유를 묻지 않으시는군요.”
어느새 훌쩍 다가온 가브리엘이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