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부디, 제발.
1층 테라스의 난간을 훌쩍 잡고 넘어오려면 쉽사리 넘어올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알 수 없는 그윽한 향기가 풍겨왔다. 그가 뿌린 샤워 코롱이었을까?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힐데아 영애.”
“……네.”
“힐.”
그 친근한 호칭에 다시금 먹으면 안 될 것을 먹은 듯 목이 말라 미간을 찌푸렸더니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가슴팍을 살며시 문질렀다. 꼭 그곳이 아픈 사람처럼.
그러나 그의 행동에 집중할 새도 없이 가브리엘은 알 수 없는 요청을 해왔다.
“제게 물어봐 주십시오. 왜 영애를 뵙고자 하였었는지.”
난 잠시 동안 치열하게 머리를 굴렸다.
아까 로제가 갑자기 불쑥 그런 말을 내뱉은 것도 그러하고, 설마 이 둘이 사랑 싸움이라도 한 것일까?
그래서 지금 자기들이 파트너 안 하겠다고 언니인 날 끌어들여서 이렇게 말을 전하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일 리가 있는데?’
어이가 없는 한편,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쿡쿡 쑤셨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역시, 싫으신 것이군요.”
잠시 딴청을 피우는 사이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혼자 결론까지 낸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이것이라도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멍하니 그가 손을 내미는 것을 따라 나도 모르게 손을 올리고 말았다.
꼭 기사가 손등 키스를 청하고, 그것을 수줍게 허락하는 그 기사의 아가씨가 된 것처럼.
괜히 맞닿은 손끝에 정전기가 튀는 기분이 들어 움츠러들려는 찰나, 그가 움직였다.
내 손을 맞잡고 부드럽게 자신 쪽을 끌었다. 테라스 난간을 황급히 잡으며 나는 살짝 몸을 그에게 수그리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끝이 그의 어깨를 스쳤다.
‘으.’
머리카락 끝이 간지러운 것 같았다. 직접 닿는 피부처럼.
그리고 곧 다른 것에 한눈파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가브리엘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달칵 하는 문을 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찰랑이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니, 떨어진다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을 잡고 내리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낙하했다.
내 눈앞에.
“이건……?”
그건 아주 화려한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였다.
“가브리엘. 이건 마법, 인가요?”
무척 어여뻐서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쩐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아름답게 웃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의 얼굴 자체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걸 왜 내게 주지?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난간을 잡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받아주실, 겁니까?”
마른침을 삼키듯 한순간 숨을 부자연스럽게 삼킨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나는 눈앞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목걸이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커다랗고 선명한 붉은색의 루비처럼 보이는 보석을 중심으로 섬세하게 세공된 은색 문양들이 아름다웠다.
꽃이 핀 듯 맺힌 푸른색의 작은 보석들은 사파이어보다도 더욱 옅고 영롱한 빛이었다.
이건 무슨 보석들이지.
“왜, 이런 것들을 준비하신 건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난 눈부신 선물을 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흥분하기만 할 순 없었다.
가브리엘과 내가 어떤 입장인지를 되새기며 그가 잡고 있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물렸다.
놓지 않을 듯 뜨거웠던 손은 거짓말처럼 쉽게 허물어졌다. 닿았던 곳이 공기에 노출되자 식은땀이 맺힌 듯 시원해졌다.
“싫으십니까?”
벽 보고 대화하는 기분이다.
싫은 게 문제가 아니잖아.
“왜 이걸, 제게.”
“로제리엘 영애에게도 갔다고 하시면 속이 편하시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했겠지.
문제는 그가 천하의 난봉꾼도 아니고, 굳이 약혼녀 언니에게까지 화려한 세공 목걸이를 선물할 필요가 있었냐는 것이다.
“순간의 충동으로 구매한 것이 아니니, 그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또한 그렇게 값비싸고 고귀한 물건도 아니니…… 부담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미심쩍어졌다. 하지만 대놓고 무어라 할 수가 없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그가 상심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딱 1초 정도만.
“선물은, 감사해요.”
누가 보면 얼마나 우스운 광경이었을까?
세상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와 그런 여자가 거북스럽다는 듯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
그런데 그들 사이에 놓인 아주 화려한 세공 목걸이.
나는 그것을 팔에 감았다. 차르륵 늘어지며 살갗에 휘감기는 느낌이 섬뜩하도록 선명했다.
“정말 예쁘네요. 호의에 감사드려요. 로제도 무척 기뻐했겠네요. 그 아이는 반짝이는 보석을 좋아하거든요.”
“네, 잘 압니다.”
응? 지금 좀 빈정거리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로제가 보석을 좋아하는 걸 그가 그렇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많이 보내셨지요?”
사랑하는 여인이 좋아하는 것이니 무척 많이 보냈겠지.
실제로 나도 그가 로제에게 보낸 편지와 수많은 반짝이는 선물들을 보았었으니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어깨를 움찔하고 튀었다.
“그 보석들은 단순히……. 단순히 보낸 것이었습니다.”
지금 넘치는 재력을 과시하려는 걸까?
전쟁터에서 세심하게 주문하고 계속 로제에게 그런 화려한 것들을 보낸 것이 얼마나 배려 넘치는 사랑이었는지 모르는 이가 얼마나 있다고.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이 목걸이를 받아달라는 것이 만남의 이유였던 것인가요?”
어쩌면 내가 모르는 의미라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문과 가문의 약혼이 정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한쪽 후보에게도 예의를 차리는 것일지도.
아, 어쩌면 로제에게 보낸 목걸이와 모양은 같을지라도 안의 보석이 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보석에는 통 관심이 없고 세심한 문양과 그 뜻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아서 멀리했지만, 로제는 그런 곳에 통달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손길로 목걸이를 들어 비춰보니, 누그러진 눈매의 가브리엘이 보였다.
“이제 곧이네요. 축하드려요, 가브리엘.”
“……축하라고 하셨습니까?”
“네.”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 않나. 눈앞의 사내가 드디어 맞게 될 기다림의 끝이 코앞에 있었다.
비록 그 전에 꽤 고난과 역경을 겪게 되겠지만.
나는 조금은 쓸쓸해지는 기분을 감추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친근했던 편지의 친구도 잃고, 나만 발랄하게 찾던 동생도 잃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정말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과는 같지 않을 테지.
“저도 무척 기다렸답니다. 그런데 왜 파트너로 같이 들어가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게, 무슨.”
“파트너를 청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러니 그 애가 그렇게 나왔겠지.
“설마, 기다렸…….”
“그러지 않았을까요?”
어째서인지 그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나는 갸웃했다.
로제와 파트너를 하지 않아서 이 사단이 나고 있는 건데, 왜 저런 표정이야. 아까 다 들어놓고?
나는 아무생각 없이 느릿하게 떠들었다.
“다시 한번 청하시면 바뀔지도 몰라요. 첫 춤의 파트너가 없다는 것은 조금……. 흠이 될지도 모르니까. 말해놓고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후회, 하고 계십니까?”
어쩐지 나를 향해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시선의 방향 끝이 내게 향해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건 로제에게 직접 물어야지. 그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듯 간지러웠다.
그리고 이 모든 내밀하고 친밀한 대화를 나와 나누고 있는 상황이 어이가 없다는 것도.
나는 차분하게 한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그는 내 행동에 놀란 듯했다. 난 인사하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목걸이는 감사하고, 오늘의 대화도 유익하였습니다. 하지만 밤이 늦었고, 또 상황도 예의에 맞지 않네요.”
가브리엘은 퍽 당혹한 모양이었다.
“그, 그건 미처…… 실례했습니다.”
어쩐지 이 순간만큼은 당황한 그가 어수룩한 소년처럼 보여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당황하던 가브리엘의 표정이 다르게 변했다. 꼭 깜짝 놀랄 만한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왜 또 저런 표정이야.’
딱딱한 입꼬리가 내 마음대로 춤춘 적이 없으니 그랬을 리는 없지만, 갑자기 멍해진 그의 표정을 보니 내가 그의 앞에서 한껏 미소라도 지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실 환히 웃으면서 한번은 말해주고 싶었는데.
당신은 아무 의미 없이 보낸 형식상의 친절이었겠지만, 어쩌면 그 편지조차 다른 이가 대필한 것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그래도.
‘난 그 편지에 많은 위안을 받았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하지만 그 이상 흔들릴 일은 없으니 그것 때문에 당신에게 부담을 주는 일을 없을 것이라고.
내가 사랑하는 내 여동생에게도.
“그럼 살펴가세요, 가브리엘.”
단지 그렇게 많은 뜻을 담고 멍하니 서 있는 남자의 앞에서 테라스 문을 닫았다.
커튼을 치고, 불을 껐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앞에 있는 가브리엘의 그림자가 사라지게 될 때까지 나는 숨죽이며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꼭 떠날 수 없는 사람처럼, 그 차가운 목걸이를 손에 꽉 쥔 채로.
*
“아.”
어쩌면 저렇게 다정하고 부드럽게 다가왔다가, 차갑고 냉정하게 쳐낼 수 있을까.
가브리엘은 볼품없이 떨리는 제 손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당장 야속하게 닫혀버린 창문을 두드리고, 굳건하게 내려온 커튼을 걷고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힐데아.
당신도, 설마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인가요?
아쉬웠습니까?
파트너를 청하지 않은, 아니 말하지 못했던 내 용기가 당신을 상처 입게 했나요?
심장이 쿵쾅거리며 귓가가 발긋해졌다.
또렷하게 마주하던 그 시선이 여태까지 희미하게 품었던 희망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편지가, 거짓이 아니었다고.”
차갑고 무정하도록 단조롭던 문장들이 조금씩 마음을 담고, 일상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을 때.
그 사이로 오간 편지의 문장들에는 분명 친밀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가브리엘은 생각보다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세간에서는 힐데아 영애를 두고 똑똑하고, 외로움을 모르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편지 속의 당신은 외로워 보였어.’
손을 잡아달라는 것처럼, 그렇게.
그는 초조하게 입을 문지르며 몇 걸음 빠르게 걸었다.
그 웃는 얼굴이라니.
로제리엘이 훔쳐보듯 그렸던 그 미미한 미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목걸이를 손에 쥐고, 자신을 보며, 애틋할 정도로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그의 심장을 터뜨리는 무기와도 같았다.
“너무…….”
어떤 미사여구로도 표현할 수 없는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