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파트너 선택은 너무 어려워요
그는 의지로 이를 악물었다.
미약한 희망이 보인 지금, 힐데아가 자신을 경멸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첫 춤의 상대.’
그건 반드시 자신이 차지하고 싶었다.
순간, 수줍게 흐트러지던 청년은 사라지고 음험한 기색의 살벌한 짐승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번뜩이는 눈에는 살기마저 뚝뚝 떨어졌다.
“초대장이라고 했던가……?”
후보들을 자세히 알아야겠다.
그는 으르렁거리듯 웃었다.
어떤 놈도 제 눈앞에서 힐데아와 춤을 출 순 없을 것이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난 어떻게 표정을 관리해야 할지 곤란하다는 듯 깃펜을 들고 고민했다.
‘이게 나만 모르는 무슨 사교계의 농담 방식은 아니겠지?’
나는 혹시라도 이 세계에 저주라는 것도 있는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연이어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지? 혹시 벌써부터 내 평판이 이렇게 최악인 것일까? 하지만 이들은 먼저 초대장을 보낸 이들이었을 텐데?
“언니, 왜 그래? 뭔데 표정이 그렇게 심각해?”
심란하게 편지를 보고 있던 나는 명랑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분홍색의 머리카락에 또렷한 붉은 눈동자.
토끼처럼 방긋 웃고 있는 여동생을 보였다.
“아, 로제. 왔니?”
“응, 오후 훈련 마쳤거든. 아유, 봐봐, 언니. 나 이제 팔에 알통도 생겼다?”
“…….”
반짝반짝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사랑하는 동생아.
지금 알통 자랑을 하고 싶니?
“그건 굳이 자랑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내 알통보다 중요한 게 대체 뭐야?”
난 들고 있던 편지를 흔들며 한탄했다.
“이것 좀 봐.”
“응? 이거 언니한테 초대장 보냈던 영식들 맞지? 아아, 파트너 관련해서 편지 보냈던 거야?”
“그랬었지. 그랬는데 돌아온 편지가 이것이란다. 어찌 해야 할지 골치가 아파.”
“어디 봐……. 어라? 이거 진짜야?”
“그들에 말에 따르면 그렇지.”
뒤에서 고개를 불쑥 내밀고 편지를 훑은 로제가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턱 끝으로 쿡쿡 눌렀다. 짓궂기는!
“이 사람은 다리가 부러지고, 이 사람은 손목이 부러졌네? 아아, 이 사람은 계단에서 굴렀다고? 에이, 이게 뭐야.”
로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 것은 말 그대로 편지에 적힌 사실이었다.
나도 파트너를 들이지 않으면 자기도 파트너 없이 들어가겠다고 우기는 사랑스러운 동생 덕분에 나는 쌓여 있던 초대장을 다시 들춰야 했고, 그 중 몇몇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변들이 이랬다.
‘설마 거절하기 위해 이따위 변명을 급조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고, 만약 이 편지가 사실이라고 해도 기분이 나빴다.
꼭 내가 같이 가자고 해서 이 꼴이 된 것 같지 않은가.
괜히 내 축언에 대한 소문만 더 부풀려지지 않을까 속상하기도 했다. 저주 받은 힐링턴의 첫째. 그따위 소리를 또 듣게 될지도 모르지.
살짝 입술을 깨물고 있자니, 옆에서 까르르 웃는 소리가 났다.
“언니, 언니. 괜찮아, 괜찮아.”
로제는 항상 이랬다.
나는 햇살을 그대로 바라본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바라보는지도 모르고 내 동생은 명랑하게 노래하듯이 말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그거 아냐. 이러고 있지 말고 나랑 말이나 타자.”
그 밝은 모습이 위안이고, 또한 부러울 때가 있다. 지금처럼.
“어때? 이번에 가브리엘이 가져온 백마가 진짜 예뻐서 언니한테 꼭 맞…….”
“로제. 말 돌리지 말고. 지금 중요한 건 승마가 아냐. 파트너 문제를 먼저 꺼낸 건 너였어. 잊었니?”
“그, 그건.”
“자, 앉아 봐. 언니랑 얘기를 좀 하자.”
난 엄격한 표정으로 로제리엘의 팔을 잡고 내 앞에 앉혔다.
로제는 잔소리 듣기 싫어하는 철부지 어린애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잠깐 마음이 풀릴 뻔했지만.
“로제. 너 정말 가브리엘과 파트너 안 할 거야?”
“엉?”
“그 사람이 너한테 청하지 않았을 리는 없고, 네가 거절이라도 한 것이니? 둘 사이에 내가 끼어서 뭐라 하는 게 좋지는 않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저, 언니……. 누가 그래, 가브리엘이 나한테 파트너 하자고 했다고?”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야? 너 오늘 가브리엘 만나고 온다고 했잖아.”
“그건 훈련 전에 잠깐.”
“만나서 뭘 했는데?”
갑자기 로제가 헛기침을 했다.
“으음, 보석, 흠, 흠흠. 언니가 받은 것처럼 나도 목걸이랑 귀걸이 세트를 받았거든! 그래서, 그래서 만난 거야.”
그러면 더 이상하다.
날 먼저 주고, 로제를 다음에 줬다는 건가?
“그런데도 파트너는 안 하겠다고?”
“으으.”
로제는 어째서인지 꼭 체할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말하지 못해 답답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언제나 솔직하고 담백한 로제에게는 가장 안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내심 의아했다. 그렇게 사이 좋게 지내면서 왜?
아니 그보다.
‘아직도 가브리엘이 파트너를 청하지 않았다고?’
둘의 사이는 내가 보기엔 어렸을 때의 치기가 아니었다.
요즘도 저택을 돌아다니다 정원에서 떠들고 있는 둘을 마주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째 밤에 목걸이 줄 때의 모습을 보면, 분명 가브리엘은 로제와 파트너를 청하려 했던 것이 분명하고.’
그런데 내가 뱉은 말 때문에 로제가 갑자기 뜻을 번복한 것이라면 너무 속상하다.
더 내뱉으며 로제의 뜻을 굽히려고 했을 때, 돌연 장난기를 가득 담은 눈이 날 훑으며 휘어졌다.
“왜 그렇게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언니는 네가 걱정돼서 이러고 있는데.”
“언니가 날 그렇게 걱정하는 만큼, 나도 언니를 걱정하는 거야. 그러니까 언니도 파트너 결정해. 그러면 나도 결정할게! 단순하잖아.”
“하려고 했지. 그런데 다 거절당했잖니. 그러니 너라도.”
“아니.”
그 단호한 답은 도무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내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청을 하려 했던 영식들이 모두 다 저 꼴이 되었으니 내게 남은 선택지는 몇 없었다.
가문의 기사들에게 파트너를 청하고자 하여도 친분이 있는 이들이 없었으니, 차라리.
“그럼 이렇게 해, 로제.”
“뭔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아빠한테 청해서 같이 파트너 하자고 할게. 그러면 너는 가브리엘과 원래대로 파트너 하는 거야. 알았지, 로제?”
“오. 그런 방법도 있었네?”
내 딴에는 크게 마음을 먹고 내뱉은 말이건만, 로제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뺨을 부풀렸다.
이 고집쟁이 같으니라고.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래?
“왜. 왜 그런 표정이야?”
“언니, 반대는 안 돼?”
“뭐?”
나는 입을 떡 벌릴 뻔했다. 반대라면 로제가 아빠와 가고, 내가 가브리엘과 가자는 뜻인가?
“당연히 안 되는 소리를. 왜 그래, 로제?”
“왜 당연한 건지 모르겠어. 언니, 가브리엘은 내 약혼자가 아니잖아. 우리 중 누구도 결정하지 않은 상태야.”
로제리엘이 간만에 진지하게 말했지만, 나로서는 코웃음이 쳐지는 말이었다.
물론 동생을 비웃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고, 상황 자체가 웃겼다.
보렴 로제, 그가 너와 내게 보내왔던 편지는 그다지도 다르고 보내왔던 물건도 달라.
너를 볼 때의 표정과 나를 볼 때의 표정이 그렇게 다른데 누가 그런 착각을 하겠니.
나도 하지 않는 생각인걸?
그렇게 말을 내뱉을 수 있었지만, 나를 우선 챙기는 경향이 있는 상냥한 동생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일로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언니 뜻 알지?”
내가 목소리를 최대한 상냥하게 내며 손등을 도닥이자, 착한 로제는 내 뜻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으럼 내가 가브리엘과 파트너로 들어갈게, 우욱, 음, 그럼 언니가 아빠랑 들어가는 거야? 약속?”
과연 아빠가 그것을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지금 로제가 구역질하지 않았나?’
어쨌든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활짝 웃은 로제가 달려들어 날 안고 다 잘될 것이라며 속삭였다.
과연. 정말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결론이 난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로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천방지축처럼 날뛰지만 언제나 시녀들의 손길 아래 가꾸고 있는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결이 좋고 부드러웠다.
의미 없이 손가락에 휘감자, 로제가 귀엽게 헤헤 웃었다.
우리 사이의 분위기도 한껏 부드러워졌고, 혹시 자매 사이에 싸움이 날까 걱정되었는지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던 시녀들도 안도하는 것 같았다.
난 속으로 웃음이 났다.
설마, 내가 로제와 싸우려고.
로제에게 화를 내는 내 모습은 상상도 안 가는데 저들은 뭘 상상한 걸까?
“그래도 춤 연습은 더 해, 로제. 네 춤 실력은 지금…… 뭐라 말하기가 참담하구나. 추기 힘들 것 같으면 가브리엘에게 모두 맡기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아.”
원작에서 가브리엘이 춤을 못 춘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응, 응! 알았어. 가브리엘 발등이 두 동강이 나지 않게 잘 해볼게.”
왜 갑자기 장르를 스릴러로 바꾸고 그래.
“그걸 지금 말이라고……. 어휴, 너를 누가 말릴까.”
로제는 세상에서 제일 웃긴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 호탕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나는 다시 한번 탄식했다.
“언니가 있잖아. 난 언니 말이라면 천사같이 잘 듣는 착한 동생 로제리엘인걸!”
“말이라도 못 하면!”
까르륵 웃는 로제리엘과 함께 그날의 오후가 저물었다.
*
떳떳하지 못한 만남은 보통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법이다.
창백한 달빛이 쏟아지는 어떤 밤, 눈에 띄게 아름다운 어떤 남자가 눈을 내리 깔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뾰족한 구두굽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걸어와 당연하다는 듯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던 남자의 앞에 섰다.
“이제 신전을 제집 드나들 듯 오가시는군요. 보는 눈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며 눈을 뜬 아름다운 남자는 바로 최고 신관 크라이스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감히 누가 나를 두고 뭐라할 수 있을까. 그대가 아니면 그 입을 찢어버리고 말았을 것이야.”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는 미엘르 제국의 단 하나밖에 없는 고귀한 황후, 데자이아였다.
“자 그럼.”
황후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대가 물어온 정보를 들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