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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여동생을 사랑했다-36화 (36/155)

36화. 누군가가 뿌린 씨앗이 가슴 속에 싹을 틔웠다

이건 꿈이다.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까.

이때, 과거의 나는 오전 수업과 가문의 일정을 맞추고 점심 식사 후 휴식을 취하러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로제의 것이다.

반가워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을 때 본 것은 혼자 있는 로제가 아니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모습.

뒤를 따르던 리라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정확히는 환히 웃으면서 박수를 치는 로제가 아니라, 살짝 찌푸린 얼굴로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환한 햇살에 비추는 남자의 머리카락은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빛깔이 되어 있었다.

반투명한 듯 빛나던 레몬빛의 백금발은 더욱 화사하게 반사되었다.

그것 때문일 것이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던 것은.

마침 로제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멀리 있어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떤 것이 그려진 종이 같았다.

사람의 모습 같았다.

그런데 가브리엘이, 그가 웃었다. 그것을 받아 쥐고 아주 천천히 꽃이 피는 것처럼 화사하게.

‘아.’

그때 나는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의아했다. 왜? 왜 이렇기 이 안이 아플 걸까.

이 감정의 이름은 뭘까?

*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악몽을 꾼 것처럼 헐떡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팔다리에 힘이 없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자꾸, 가브리엘을, 그리고 로제를 생각한다.

꿈속에서 욱신거리며 저렸던 가슴께를 문질렀다.

그때 가브리엘이 보던 그림에는 분명 로제리엘이 그려져 있었겠지. 그런데 나는 왜 그 그림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던 것일까.

“이건 좋지 않아.”

난 창백하게 질린 거울 속의 여자를 봤다. 나였다.

여전히 거울 속의 스스로를 보는 것은 익숙하지 않아 곧 시선을 돌리고 말았지만, 그 얼굴 가득 드리워진 것은 분명 알 수 없는 죄책감이었다.

일어나 화장대에 놓여 있는 보석함을 열었다. 화려하게 세공된 목걸이와 귀걸이가 보였다.

“아무 의미도 없는 거야.”

무의식 중에 목걸이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로제와 대화를 나누다 그 애의 방에 가 우연히 가브리엘이 주었다는 목걸이를 보았다.

그런데 그 목걸이를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심장이 쿵 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도통 알 수가 없어.”

로제에게도 목걸이가 갔던 것이야, 뻔히 아는 사실인데 왜 놀랐던 것일까?

‘보석의 색이 내 것과 다르구나.’

‘응, 보석은 색과 종류에 따라 그 의미가 천차만별이거든! 언니가 궁금하면 내가 얼마든지 설명해줄 수 있는데!’

‘아니야, 로제. 그쪽은 별 관심이 없단다. 예쁘면 그만이지.’

로제가 눈에 띄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시선을 끊어내며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안 되겠어.”

가만히 생각하다, 보석함을 쾅 닫았다.

*

“남성에게 주는 선물로 무난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챙강!

“?”

별다른 화제는 아니었는데, 내 말에 리라는 들고 있던 꽃병을 깨뜨렸고 시엔은 빗을 떨어뜨렸으며,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던 후작 부인은 비명을 질렀다.

“저, 왜들 그러시는지. 제가 못할 질문이라도 했나요?”

난 멋쩍어졌다.

내가 평상시에 또래 영식들에 대한 관심을 보인 적 없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놀랄 것 있나.

“아니면 너무 갑작스러웠나요?”

후작 부인이 탄식하듯이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녀는 아주 훌륭한 사교술의 선생님이었지만, 행동 방식은 고풍스러운 연극배우 같은 면이 있었다.

음, 백조의 날갯짓 같군.

“오, 힐데아 영애. 그런 것은 아니에요. 다만, 혹시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누가 보면 내가 누군가에게 고백이라도 한 줄 알겠다.

후작 부인의 눈은 흥분으로 흔들리고 있었고, 그 반응에 굉장히 떨떠름해졌다.

내가 진짜 못할 말을 했나?

답례 선물이라는 게 사실은 무슨 폭탄이라도 되었던 거야?

“……받은 것이 있어 답례해야 하는데 한 번도 선물해본 적이 없어서 고민이 되어서요.”

“오! 서, 선물을 받으셨나요?”

“별것 아니었어요. 다만, 받은 만큼 돌려줘야 확실하지 않을까 생각되어서요. 요즘 또래 영식들에게 유행하는 물품이나 그런 것들이면 좋겠군요.”

“선물을 준 것은 또, 또래 영식인가요? 오, 오, 세상에.”

“……그렇긴 합니다만.”

내가 선물을 보낼 상대는 가브리엘이었다.

그러니 아빠에게 드렸던 것 같은 선물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내가 직접 보내는 것 말고 사람을 통해서.

‘근데 왜 저렇게 놀라지?’

난 멀뚱하게 눈을 깜빡이며 기겁하는 것 같은 후작 부인을 한번, 그리고 놀란 것 같았는데 여전히 무표정한 리라와 시엔을 바라봤다.

착각했나?

“부디 고견을 주세요, 후작 부인.”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단순했다.

목걸이에 대해 답례를 하면서, 지지부진하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을 끊어내려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지난 12년간 편지와 화초를 받기만 했지 무언가를 되돌려 보낸 기억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부끄러워져 살짝 뜨거워진 것 같은 뺨을 문지르는데 주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시선을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뭐지?

그때, 리라가 말했다.

“시엔을 함께 데리고 가세요, 아가씨.”

“시엔을?”

“네. 저는 유행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 아이가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거든요. 상인들을 부르는 것도 좋지만 요즘 유명한 가게가 있다고 하네요.”

“그래? 부탁해도 되겠어, 시엔?”

난 시엔을 보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시엔이 화들짝 놀랐다.

그렇게까지 놀랄 건 없는데.

난 최대한 사납지 않은 표정을 하려 노력한 채 시엔을 보았으나 그녀는 날 3초 이상 바라보지 못했다.

난 퍽 우울해졌다.

“그, 그 제,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아가씨. 절 데리고 가시면……후우, 후. 제가 최선을 다해 아가씨를 보필해서 만족하실 만한 선물을 고르시게 돕겠습니다.”

“그, 그렇구나.”

누가 보면 면접시험 치르는 줄.

근엄한 상무나 이사가 된 기분을 떨떠름하게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잘 부탁해, 시엔.”

“여, 여, 영광이에요. 아가씨!”

어쨌거나 껄끄러워하는 날 위해 나서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단순한 생각 때문에, 나는 이때 알지 못했다.

데뷔탕트 전의 힐링턴의 아가씨가, 타인에게 줄 선물을 산다는 것에 관심을 가질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선물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에 관한 관심 또한.

*

“어머,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부채를 살랑이며 모여 있던 귀부인들의 눈이 팔락였다.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었나요, 영애?”

“후후, 제가 또 한 소식 하지 않나요. 이것은 믿을 수 있는 시녀들에게 직접 들은 것이랍니다.”

“아아, 못 참겠어. 빨리 말해주지 않고 뭐해요?”

이제 곧 있으면 데뷔탕트. 지루하기만 했던 사교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러면 새로운 물결로 인해 얼마나 불꽃 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

누군가는 뜨거운 로맨스로 사랑을 나눌 것이고, 또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암투를 주고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구경꾼들은 즐겁겠지!

“그 벨키우스 공작님이 직접 세공 문양을 넣은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를 두 개나 사갔다고 하지 뭐예요?”

오, 사람들의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누군가는 그 뜻을 단박에 알아듣고 뺨에 흥분으로 인한 붉은 기를 띄웠다.

“어머, 로맨틱해라.”

비록 그들이 노리고 있는 군침 도는 사윗감이 다른 여인을 위해 행동한 것일지라 하더라도 말이다.

귀족들 사이에 이른 약혼을 하는 것은 의외로 많아서, 데뷔탕트를 치르는 영애인데도 이미 약혼자가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경우 혹여라도 집적거리는 이성을 방지하기 위한, 꽤 로맨틱한 전설의 방식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직접 세공한 목걸이와 귀걸이를 선물하는 것이다.

이때 보석의 색은 선물 받는 상대의 눈동자 색과 같게 고른다.

그건 약혼자가 약혼녀에게 할 때도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이것이 왜 로맨틱하느냐는 미엘르 제국 3대 황태자의 사건을 돌아봐야했다.

“그때 당시 황태자비께서는 그렇게 아름다우셨다고 하죠? 막 약혼하신 상태라 불안하셨는지, 자신의 축언을 조각내고 녹여 그 안에 담아내셨다고요. 아, 얼마나 달콤한지요?”

“그 뒤로부터 데뷔탕트 치르기 전의 약혼자에게 선물하는 세공품에는 그런 의미가 따르게 되었죠. 벨키우스 공작이 어려서부터 전쟁터에 나가 이쪽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는데…….”

제법이었다.

그만큼 만만치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힐링턴의 두 영애 중 누가 벨키우스의 악혼녀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둘 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

그 목걸이의 뜻은 단호하게 한 가지의 뜻일 것이 분명하니.

‘이 여인은 내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꺼냈던 귀부인이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등장할 쌍둥이 중 누가 붉은색의 목걸이를 하고 있는지, 그게 중요하겠네요.”

그리고 그 상대가, 이 귀부인들의 먹잇감이 될 예정이었다.

어리고 순수한 데다 지켜줄 어머니나 다른 가문의 여인도 없이 등장할 가련한 새싹들이 아니던가.

보이지 않는 칼 같은 말로, 은근한 비웃음으로, 어울릴 수 없는 우아함으로 힐링턴의 애송이를 갈기갈기 찢고 공격하고 울부짖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분수도 모르고 맞아들인 약혼자를 기어이 포기하게 할 예정이었으니까.

*

마차를 타고 내리자마자 나는 꽤 북적이는 가게의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인기가 많은 곳일 줄은 몰랐는데…….”

마차에 동행하는 내내 숨넘어가는 표정을 하고 있던 시엔은 못 봐줄 정도로 가련한 얼굴색을 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시엔을 저택으로 돌려보내고 같이 동행한 호위기사와 함께라도 물건을 사야 하는 건 아닌지 짧게 고민했다.

바로 그때.

“아가씨.”

“응?”

시엔은 대체 언제 달달 떨고 있었냐는 듯 고요히 서 있었다. 그리고 놀랄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아가씨.”

아가씨가 들어가실 문은 그쪽이 아니랍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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